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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실 수 없는 것이 있다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장)
세 번째 수난 예고 (10:32-34)
예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실 때마다, 제자들 사이에선 오해와 갈등이 벌어집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8:31)에선 베드로가 예수께 항의하고, 두 번째 수난 예고(9:31) 다음엔 제자들 사이에서 후계자 문제로 다툼이 일어납니다. 두 번에 걸친 수난 예고로, 제자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불안은 공동체의 기반인 신뢰를 흔들고, 이어, 가면 뒤에 감추어진 개인의 속셈들이 정체를 드러냅니다. 한편으론 예수의 수난에 대한 의도적 부정이나 외면이 진행됩니다. 갈등을 일으키는 말과 요구들이 불거져 나오고, 욕망과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충돌합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난 예고의 도입 부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라는 목적지가 명시됨으로써, 종착점이 멀지 않았음이 암시됩니다. ‘예수께서 앞에 서서 가시고 따르는 제자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10:32)라는 정황 설명에서, 주저 없이 자신의 소명을 향해 나아가시는 예수와 주저하는 제자들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를 듣고 난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더 온전한 이해에 닿게 될까요?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35-37절)
세 번째로 수난이 예고되고(10:33-34) 난 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형제 사이인 이 두 제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예수께 부탁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자신들을 각각 우편과 좌편에 앉게 되는 겁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와 함께 변모산에 올라갔던 세 제자 중 둘이었지요(9:2-8). 변모산에서 그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예수의 좌우에 모세와 엘리야가 서 있는 영광의 순간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장차 예수의 영광 때에, 예수의 좌우에 자신들이 서게 되길 청하는 중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요구하는 좌우의 자리, 그 자리는 곧 힘입니다. 힘 있는 정도에 따라 자리가 정해지기도 하거니와, 자리가 그 자리의 임자에게 힘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힘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끝이 없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손을 댄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창 3장).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 곧 힘에로의 욕망 때문이었지요. 예수께서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시는 시점에, 이 강력한 욕망은 여지없이 분출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 (38절)
요한복음의 수난 예고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12:23)는 말로 간단히 표현됩니다. 이 영광의 때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순간’(12:23)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영광은 예수께서 “들리어짐”의 사건인데, 한편으로는 십자가에 들려지는 죽음을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덤에서 들려지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많은 이들은 “영광”이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예수의 영광은 죽음의 때라는 점을 깨달았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그 좌우의 자리를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 터입니다. 변모산에서의 광채와 승리를 영광이라고 여기는 야고보와 요한이기에 영광 중의 좌우 자리를 요구한 것입니다. 이런 착오를 두고,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 내가 받는 세례 [38-39]
구약성서에서, ‘잔’은 상반된 두 의미를 지닙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시16:5);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시116:13) 등에서의 잔은 기쁨과 은혜를 상징합니다. 반대로, “분노의 잔” 혹은 “진노의 잔”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시11:6; 75:8; 사51:17, 22; 렘25:15; 51:7; 겔23:33-34). 예수께서 붙잡히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하셨던 기도(“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14:36)에서도, “잔”은 고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 언급되는 ‘잔’도 예수의 피, 즉 예수의 죽음과 연결됩니다(14::23-24).
세례도 두 측면을 지닙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며 ‘너는 내 아들이다’는 선언이 울려 퍼지는 환희의 순간입니다(1:9-10).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례는 물속에 자신을 담금으로써 내가 죽음의 사건입니다. 예수의 수난이 예고되는 이 맥락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받는 세례”는 고난과 죽음의 세례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마시는 잔’을 마시고 ‘예수께서 받으시는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답합니다(39절). 아마도 두 형제는 그 잔은 은혜의 잔이고 그 세례는 영광의 세례라고 생각해서, 망설임 없이 그 잔과 세례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일 수 있겠습니다. 아니면, 그 잔과 세례가 고난과 죽음을 뜻한다고 해도, 우편과 좌편의 자리를 얻는 대가로 치르겠다는 각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줄 것이 아니다 … 그들이 얻을 것이다 (40절)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의아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 좌우편 자리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다”(40절)는 말씀은 ‘주지 않겠다’는 거절 의사이기보다는 ‘줄 수 없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이어지는, “(그 자리는)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는 말씀과 함께 읽으면, 예수의 좌우편 자리는 예수께서 수여할 수 없는 자리라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원하는 좌우 자리를 예수께서 그들에게 주실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좌우편 자리로 대변되는 힘과 권세가 예수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형제가 요구하는 그 자리는 예수께서 세상의 권력을 뒤엎고 왕이 되어야 줄 수 있는 것인데, 예수께서는 지금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시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어떻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줄 수 없는 것이다’(40절) 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 영광 받으시던(십자가에 달리시던) 때에, 예수의 좌우편을 차지했던 이들이 있었지요. 그들은 두 사람은 이름 없는 두 강도로 알려졌고, 그중 한 강도는 예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부탁합니다(눅23:42).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나라에 ‘나의 자리’를 부탁한 셈인데,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으로 응낙하십니다(눅23:43). 정작, 좌우의 자리를 달라고, 예수의 잔과 세례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던 야고보와 요한은 그 자리를 피해서 도망했습니다.
권세와 분열 (41-42절)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께 가서 좌우편 자리를 청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른 열 명의 제자는 격분합니다(41절). 열 제자는 두 형제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분노하지만, 그들이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따지고 보자면, 그들 역시, 야고보와 요한과 다를 바 없이, 자리를 탐하고 있습니다. 집권자와 고관(42절)이 되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롭기란 어렵습니다.
분란에 휩싸인 제자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힘과 권력은 반드시 분열을 일으킵니다. 힘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고, 권력은 숭배를 받고 모두를 굴복시킬 수도 있지만, 분열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자리, 힘, 권세, 명예를 놓고 사람들은 목숨을 건 다툼을 벌이고, 마침내는 공멸합니다. 가족이 갈라지고 우정이 짓밟히고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교회에도, 무수히 넘어지고 찢어지는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엔 그렇지 않을지니 (43-44절)
분노하고 분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3-44절). 예수께서는, 후계자 논쟁을 벌이던 제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9:35).
이런 유의 말씀 끝에,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실례로 제시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다”(9:37);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10:15). 어린아이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옵니다. 누구를 부리고 지배하기보다는, 따르고 복종합니다. 오른편과 왼편의 자리와 같은 권세를 바라기보다, 주어지는 작은 것들에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목숨을 주려 함이다 (45절)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섬김을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건만, 많은 사람은 예수를 섬기겠다고 앞다투어 나섭니다. 그런데 이들의 속내가, 유감스럽게도, 예수를 섬김으로써 그 옆자리를 차지하여 섬김을 받으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처럼 섬기겠다’고 말하는 다수의 그리스도인에게, 섬김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섬김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나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대속물(lytron, ransom)이란, 노예나 종을 자유롭게 놓아주기 위해 치르는 대가입니다. 예수께서는 대속물을 통 크게 내어놓으시는 인심 좋은 주인 혹은 부자가 아닙니다. 그 주인(하나님)이 포기한(버린) 대속물이며, 그것은 예수의 목숨입니다. 대속물에 지나지 않는 예수께 무슨 권세나 힘이나 능력이 있을까요? 그래서 좌우의 자리를 달라는 이들에게 ‘내가 줄 수 없는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는 분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자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구원)를 얻습니다.
우리는 예수께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요? 우리는 예수께서 무엇이든 주실 수 있다고 믿으며 기도하지만, 정작 예수께서는 “그것은 내가 줄 수 없는 것이다”고 응답하실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 누군가를 부자가 되게 하시거나, 권력이나 성공을 수여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섬김의 힘, 좌우 편 자리가 아니라 종의 자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섬김의 힘과 종의 자리는 생명을 구원하고 살려냅니다. 정복하는 권력자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참으로, 구원은 남보다 우월한 저 윗자리에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내어주는 저 아래로부터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