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60) 정서의 감수성 균형 - ③ 나르시시즘과 삼라만상/ 시인 이승섭
정서의 감수성 균형
Daum카페/ 나르시시즘에 빠진 이들
③ 나르시시즘과 삼라만상
불가의 인연을 나타내는 영원의 개념은 결국 원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공이라는 뜻이다.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결정은 공즉생으로 집약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땅 위에 한 방울의 물이 증발하면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되듯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보이는 것으로 변한다.
이는 현대물리학의 질량질변의 법칙이 되기도 하고
불경이나 노자의 철학은 이런 개념을 포괄하고 있음을 카프라나 쥬커브는 증명하고 있다.
원이란 인간이 영원을 지향하여 만든 위대한 기호의 내면이라는 뜻이다.
서양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파리 잡는 항아리’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존재를 말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위쪽은 막히고
맨 아래쪽이 작게 열린 둥근 유리그릇에 된장을 넣고 물에 넣으면
아래로 들어온 물고기는 결코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이를 세계 내 존재, 인간은 태어났지만 지구라는 그릇 속에서 죽음 이외엔 결코 벗어나는 방법이 없다.
잠시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는 허락도 없고 또 그런 여유도 없는 상황에서
밖을 동경하면서 미지를 그리는 존재가 인간의 운명이라 된다고 했듯이
원 공간에서의 이미지를 주고 있다.
아침에 떠났다 다시 원으로 돌아오고 또다시 되풀이되는 일상을 보내는 일로 생애를 맞이한다.
내려야 할 세상 정거장에 옷깃을 여미며 작별을 해야 하는 순명의 길이
곧 삶의 의미인지 묻고 있는 것이라면 경계라는 슬픈 일정의 길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물음표를 묻고 있는 연과 물이 조화를 이루면서 삶의 현장들이 물음표 묘사기법인 듯하다.
나를 알면 철학의 끝에 와 있을 것이다.
‘나’라는 그림자를 이끌고 길을 가지만 그곳은 바로 원이라는 임무의 존재가 탐구의 상상으로 나래를 펴고 있다.
거울에 가만히 나를 본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나는 없다
내가 양보도 없이 뚫어지도록 주시하는
저 허상의 깊은 눈 속에는 시든 점 하나
그 점이 점점 나를 보며 넌 누구냐고 다그친다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없다, 나는
―홍현기, 「나르시시즘」
마치 봄을 찾아 들판을 방황했지만 끝내 봄을 못 찾고 집에 돌아와
정원에 핀 꽃을 보고 봄을 찾았다는 예처럼
나를 찾는 일은 일상,
날마다 헤매는 일이지만 나를 만나는 일은 늘 궤적을 달리하면서 숨바꼭질을 한다.
그렇다면 나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한 인간의 숙제인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인 명제나 모든 철학은
나로 돌아오는 회귀의 말을 설파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닌,
오로지 참고사항일 뿐 정답은 바로 나 자신에 의해 터득하는 것이다.
‘거울에/ 가만히 나를 본다’라는 자화상 찾기의 일은 결국에는
거울 속의 허상과의 조우에서 무엇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정말 거울 속의 허상은 나와 닮았는가?
이런 의문은 결국 허망으로 끝나는 게임일 것이다.
나를 찾는 일은 끝없는 삶의 궤적과 연관이 있고 수시로 변하는 현재는 곧 과거로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정지나 스톱할 수 없는 나의 찾음은 마침내 체념을 내려놓는 그 장소에 있을 뿐
어디에도 나의 모습은 액자 속으로 다가오지 않는 일생일 뿐이다.
오로지 나를 찾는 일은 반복으로 지속될 때,
자아의 모습을 정립하는 방법이 나타난다고 하는 철학,
시는 노래하는 일이 의무일 뿐이다.
< ‘이승섭 시평집, 문학의 혼을 말하다(이승섭, 마음시회, 2022.)’에서 옮겨 적음. (2024. 6.27.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60) 정서의 감수성 균형 - ③ 나르시시즘과 삼라만상/ 시인 이승섭|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