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 사도행전 5장 34-39절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요즘 워낙에 세대의 문화가 다르고 빠르게 변하다보니 세대간의 갈등이 많은데 명절 지내시면서 혹시라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들이 있으시면 빨리 잊으시고 다 잘 하려고 했던 것들이니 용서하시고 잘 들 들어갔는지 안부 전화하면서 일상을 잘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최근에 경험했던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지지난주 토요일에 저희 젬배팀이 처음으로 결혼식에 초대되어서 젬배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멤버 중에 한분 따님 결혼식이 있었는데 제 생애 최초로 음악 없이 리듬만 공연하는 첫 번째 공연이었습니다. 그날 의상이 흰색 바지에 검정 티였습니다. 공연의상이긴 해도 제가 살아오면서 흰색 바지를 입어볼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입어본 적도 없고 입어야할 이유도 없고 입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웬지 입어서는 안 어울릴 것 같고, 흰색은 왠지 저 하고는 상관이 없는 의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입어보니 흰색이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웃도리가 여타의 다른 바지보다 흰색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겁니다. 어 괜찮네 하면서 머리 속에서 작은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작지만 매우 낯선 충격이었습니다. 내안의 고정관념이 참 무섭구나 싶었습니다. 세상에 지천에 흰색 바지가 깔려있었는데 수없이 많은 옷들이 생산되었는데도 저는 제 고정관념 때문에 인생을 살면서 그 옷들을 즐기고 누려볼 기회조차도 없이 살았던 겁니다. 내 생각이 나를 자기 감옥에 가둔 겁니다.
결혼식은 양평에 있는 팬션의 숲속에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이 무척이나 이색적이었습니다. 보통의 경우 사회자가 있고 주례자가 있고 신랑은 혼자서 당당히 입장하고 신부는 아버지나 아버지가 안 계신 경우 삼촌이나 다른 집안 어른들 손을 붙잡고 들어가는 경우가 예사인데 신랑측은 부모님 부부가 입장하고 신부 측은 아버지가 안계셔서 신부 어머니와 동생이 손을 잡고 입장을 하고 신랑신부는 둘이 함께 살아갈 세상을 그리며 두 손을 잡고 함께 입장을 합니다. 주례사는 없고 양측에서 신랑측은 신랑 아버님이 신부측에서는 신부 동생이 길지 않는 덕담을 해줍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가 함께 혼인 서약을 하는데 마치 둘의 연애 라이프 스토리를 들려주듯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반했고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잔잔하게 들려주는 식으로 혼인 서약을 하더군요. 무척이나 이색적이었고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예식 순서들이었지만 매우 신선했고 생각보다 솔직 담백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역시 내 경험치 안에서도 하나님은 감동적으로 역사하시지만 내 경험치 넘어서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의 방식속에서도 하나님은 더 풍성히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그 뒤를 이어 예수 운동을 하는 이들까지 잡아다 가두고 돌로 쳐죽이고 핍박하고 다니까 참다 참다 못해서 가말리엘이라는 율법학자이자 의회원이었던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너희가 옳고 저들이 그르다고 해서 핍박하고 옥에 가두고 잡아다 죽이고 그러지만 저 사람들이 옳으면 어떻할래. 예전에도 드다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켜 세상을 변화시키려했으나 그가 죽으니 다 떠나지 않았드냐, 갈릴리에서도 유다가 세를 규합해서 난을 일으켰는데 그가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흩어지지 않았느냐 이게 결국 자신들의 욕망을 위한 거라면 결국은 사그라들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너희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훼방꾼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하면서 예수 운동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만류합니다.
겸손하라는 겁니다. 나만 옳고 내가 세상을 판단하고 보는 눈에만 갇혀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의 좁은 시야에 삶의 모든 것을 잡아 가두지 말고 나의 편협한 판단력에 의존해서 세상을 살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세상을 여유롭게 보면서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가난과 아픔과 고통과 삶의 그늘진 구석구석들이 보이면 오히려 남 욕하고 싸우는 시간에 그곳을 따듯하게 챙기라는 것입니다. 명절이라고 만났는데 정치적인 시각이 다르다보니까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헤어지는 가족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정치는 누구를 위한 거고 그런 판단과 싸움을 누구를 위한 것입니다. 그 시간에 오히려 아픈 서로의 그들을 들여다보고 따뜻하게 만져갈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따뜻한 세상을 한뼘 더 키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연휴기간에 신병이라는 군대생활을 소재로한 드라마를 보았는데 거기보면 무척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상병정도 달기 시작한 한 상병의 고뇌가 확 다가오더라구요.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자기를 안다고 생각해왔다는 것입니다. 다름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선임들의 폭력에 대해 잘 견뎌내고 잘 해내고 그것을 후임병들에게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름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는 인간으로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이등병때 선임들에게 많은 일을 당하면서도 자신은 상병이 되고 고참이 되면 절대로 이 악습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반드시 끊어내리라 결심에 결심을 하면서 살아왔더라는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 선임이 되고 신병들이 들어오면서 자신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선임들이 자신에게 해왔던 일들을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더 악마화되어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극도로 좌절하는 상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던 직속 후임병의 연기가 더 리얼해요. “상병님 저도 이해합니다. 저도 안그럴려고 하는데도 눈 앞에서 얼쩡거리면 갑자기 화가 올라오고 제대로 해놓지 않으면 욕이 막나가고 주먹이 나갈려고 하고 그럽니다. 상병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군대에서 누군가가 고참들 비리를 다 일러 바친 겁니다. 그걸 색출하는 과정에서 병장이 이 상병을 너무 괴롭히니까 제대로 확인도 안해보고 이 후임병이 했다고 했는데 이 후임병이 자신이 실제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했다고 하고는 그 모든 선임들의 수모를 스스로 다 받아내거든요. 그러니까 쪽팔려서 말도 못하는 거예요. 그런 선임병에게 이 후임병이 한다고 하는 예기에요.
우리는 이렇듯 뭔가 군기를 잡고 기세를 잡고 뭔가 주도권을 잡아야 삶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에서 살고 있고 명절 문화나 군대문화나 기업문화가 여전히 그런 문화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최근의 손흥민이 속해있는 토트넘을 보면서 이런 문화 넘어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아니 훨씬 더 행복하게 축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케인이라는 세계적인 선수가 토트넘의 주장이었을 때 모든 것이 케인중심이었고 모든 공은 케인을 중심으로 모아졌고 모든 선수들은 케인이라는 한 스크라이커를 위한 존재였을 뿐이었습니다. 실수가 나면 모두가 책임을 묻기 바빴고 너나 할 것 없이 성적 내기에만 바빴습니다. 적자생존에 중앙집권적인 문화가 가져다주는 숨막히는 경쟁문화가 지배하고 있던 토트넘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장이 바뀌고 케인이라는 인물이 떠납니다. 손흥민은 선수들이 실수하면 다독이고 그 경기나 다음경기에 골을 넣거나 액션을 취할 때 일부러 그에게 다가가서 당신도 우리와 한팀이라는 선수애를 느끼게 도와줍니다. 공을 제때에 적절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패스를 해주고 그 골을 넣는 사람이 누구인가가 전혀 중요하지 않게 게임을 이끌어갑니다. 젊은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전날 패널트킥 실축으로 기가 죽어있는(언론이 비방)이를 찾아가서 골 세레머니를 펼칩니다. 오랜 세월 슬럼프로 기가 죽어 있는 동료를 승리의 세레메니 가장 중심에 세워주고 우리 모두가 함께 이룬 것이라는 팬들앞에서 감동적으로 이벤트해줍니다.
기를 죽이지 않고도 군기를 잡지 않고도 충분히 존중과 배려와 따뜻함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온 세계에 보여주고 있고 실제 이런 리더쉽으로도 이기는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토트넘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8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너의 친적 아비집을 떠나내가 너에게 명하는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는 기존의 자신의 경험, 삶의 노하우, 익숙했던 모든 것 너머에서 오라 손짓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낯선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를 위한 환대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공존과 존중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갑니다. 대를 이어 이삭이 함께 사는 사람들을 위한 빅텐트를 치고 종국에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온세상 모든 기근든 생명들을 먹여살리는 온세상의 살림꾼이 되어 온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살려갑니다. 어쩌면 익숙하고 정들고 편한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의 변화도 원치않는 그런 삶 너머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을 때 맞이할 수 있었던 세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내 생각안에 가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불편해하고 때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 그런 만남 가운데서도 일하십니다. 내편 니편을 넘어 내사람 니사람을 넘어 삶의 그늘진 아픔들을 챙겨가면서 모든 곳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져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