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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인가, 일부인가?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2장)
서기관 : 율법 전문가
고대 시대의 신분과 지위는 대개 태어나면서 결정되었습니다. 왕과 귀족 혹은 천민과 노예 등이 모두 세습 신분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 신앙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 권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제사장과 사두개인들 역시 출신에 의해 그 지위를 취득했습니다. 출생과 더불어 획득한 세습 신분 덕에 평생 힘과 명예를 거머쥐고 살아가는 이들을 존중하지 않을 순 없지만, 그런 이들 뒤에는 손가락질과 비아냥이 따라다니기 일쑤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세습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여 남다른 성취를 이룸으로써 얻는 신분이나 지위가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출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예는 거의 없지만, 드물기에 그만큼 더 주목받고 빛납니다. 신앙 공동체인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중받으면서도 권위를 지닌 비 세습 신분은 서기관입니다.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서기관(grammateu,j, scribe)은, 문맹 사회였던 고대 세계에서, 읽고 쓰는 능력만으로도 대단히 중용되었던 전문가들입니다. 예수 때의 유대 사회에서는 이 서기관들이 율법 전문가의 역할을 도맡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성서)을 전달하고 가르치고 연구하는 율법 학자로 공인되었습니다.
긴 옷을 입고, 인사를 받고, 윗자리에 앉는 사람들 (38절)
유대 사회에서, 세습 고위직인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형식적인 존대를 받았지만, 서기관들은 진심으로 존중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율법의 중요성을 역설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 철두철미 율법을 지키는 데에 힘썼습니다. 율법대로 사는 삶을 위해 기꺼이 손해나 위험을 감수하는 서기관들이었기에,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 믿을 만한 실질적인 지도자로 인식되었습니다.
서기관들이 입는 긴 옷이란, 값비싼 고급 의복이 아니라, 경건한 이들의 격식에 맞는 의복을 말합니다. 서기관들이 거리에서 인사를 받는 상황은, 그들의 거만함을 보여주는 예가 아니라, 그들이 존중받고 있음을 방증합니다. 안식일에 모여 율법(토라)을 읽는 회당의 윗자리는 가르치는 이의 자리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서기관이 그 자리에 앉음은 지당합니다. 모든 잔치는 거룩한 축제요 의식이라는 점에서, 그 윗자리가 서기관에게 배정되는 것도 상식적입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목사가 예복을 입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고, 교회에서 강단을 차지하고, 식사 때 상석에 앉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 (39절)
유대 사회는 율법을 따르고 율법의 지배를 받는 공동체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어떤 분쟁이나 충돌로 인해 소송이 벌어졌을 때, 율법에 따라 해결하는 방식을 원칙으로 여겼습니다. 이 경우, 율법에 따라 판결하는 일에 적임자는 단연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분야에서 전문가였던 서기관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가장 신망받는 부류였기에, 그들의 판단은 권위를 지닌 결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남편이 일찍 죽었을 때 과부가 된 여인은 남편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아내에게 상속되지 못한 유산은, 그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이가 나타날 때까지, 삼자(三者)를 관리인으로 정하여 맡겨졌는데, 서기관이 유산 관리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일찍 남편을 여읜 과부는 구걸과 적선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빈곤 속으로 내쳐졌고, 이런 결과를 확정하는 이들이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가난한 이들에게도 성전세를 비롯한 헌금의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과부의 어려움을 가중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의 이러한 결정과 판단은 모두 율법을 따르는 경건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일에 앞서 기도하고, 마치면서 기도하고, 중간에 기도하고, 오래 기도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이 길게 기도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결정과 판단이 옳다는 점을 과시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기도를 보이기 위한 기도, 즉 외식(外飾)하는 기도라고 규정하십니다. 길게 혹은 많이 드리는 기도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닙니다. 그 기도를 드리는 서기관의 감춰진 의도, 속생각을 예수께서는 주목하십니다. 또한 그런 경건한 이들의 판결이 초래하는 가난한 과부의 고통을 지적하십니다.
헌금하는 이들을 지켜보시는 예수 (41-42절)
서기관에 대한 비판에서, 이야기는 갑자기 전환됩니다. 예수께서 성전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셨다는 것은 좀 의외입니다. 굳이 보시겠다면, 헌금하는 이들의 내적 태도(즐거이 드리는지, 억지로 드리는지)에 초점을 맞추면 좋았을 것을, 액수의 많고 적음에 관심을 보이셨다는 사실은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전 장에서, 성전에서 장사치들의 상을 둘러엎으시던(11:15-17) 예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헌금을 드린 다수의 성전 방문자 중 두 부류가 대비됩니다. 많이 넣는 부자 여럿, 그리고 두 렙돈을 넣은 과부 한 사람입니다. 많은 헌금은 언제나 사람들 눈에 띄게 마련이지요. 마찬가지로, 터무니없이 적은 헌금도 구설수가 되기 마련입니다. 과부의 헌금은 “그들(서기관들)은 가부의 가산을 삼킨다”(40절)는 예수의 말씀을 소환하는 역할을 띱니다. 서기관들은 가난한 과부들에게도 헌금(제물)의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ch/roj)”이란 용어는 구걸하며 살아가는 삶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이 가장 크다 (43절)
마태 10:29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를 언급하는데, 한 앗사리온은 8렙돈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참새 한 마리는 4렙돈이고, 두 렙돈은 참새 반 마리 값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이라도 비둘기(새) 한 마리는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2렙돈을 드린 과부의 헌금은 율법 규정에 어긋나는, 사실상 자격 미달의 제물입니다. 이 돈은 동냥으로 얻은 것이겠지요. 서기관이라면 두 렙돈은 너무 적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누구보다도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많고 적음을 결정하는 세상의 기준은 숫자의 크기입니다. 만 원보다는 십만 원, 백만 원보다는 천만 원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주의 기준에서 보면 거대한 항성이나 작은 소행성이나 모두 먼지에 지나지 않듯,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는 일억 원이나 일백 원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큰 금액이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그냥 미미한 것이라서, 액수로는 많고 적음이 판별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눈높이에서는 어떤 것도 하잘것없으니 많고 적음의 구별 자체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예수께서는 많은 것과 적은 것을 분명히 구분하십니다. 다만 주님 보시기에 많고 적음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준이 다를 뿐입니다.
전부와 일부 (44절)
주님이 헤아리시는 차이는, 전부(全部)냐, 일부(一部)냐에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그것은 그 사람의 전부(全部)이거나 일부(一部)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누구에게는 전부가 되고, 큰 것이라도 어떤 이에게는 일부입니다. 전부와 일부는 액수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아니라, 다함과 다하지 않음의 차이입니다. 이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 계명(10:30)과 관련됩니다. “다한 것”과 “다하지 않은 것”, 주님이 보시는 유일한 차이입니다. 부자는 많은 액수를 드렸지만 다하지 않은 것이기에 부스러기일 뿐입니다. 반면 두 렙돈은 과부의 전부이기에 가장 큽니다.
우리가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요3:16). 이는 하나님 자신을 세상에 주신 것이며, 아낌없이 다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다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존재하고 보존되며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다하는 사랑”을 받는 존재들 역시 “다하는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얼마의 헌금?, 어떤 헌금!
41절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무리가 “어떻게”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셨습니다. 예수의 관심사는 “얼마”가 아니라, “어떻게”였다는 얘기입니다. “얼마”가 기준이라면 두 렙돈은 결코 가장 큰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의 차원에서는 두 렙돈이 가장 큽니다. 왜냐하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전부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부”는 가장 많은 것이며 언제나 충분한 것입니다. 현실에서의 두 렙돈으로는 빵 한 덩이도 사기 어렵지만, 과부가 바친 두 렙돈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넉넉히 삽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예수를 따라나서는 이들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1:18; 10:21). 밭에 묻힌 보화를 손에 넣으려는 사람이나, 원하는 진주를 제 것으로 삼으려는 장사꾼이 자신의 “전부”를 파는 까닭도 이것입니다(마13:44-46). 가난한 자들이 복되다는 선언(마5:3)은 과부에게서 극명히 증명됩니다.
이어 쓰는 후기
가장 많이 바쳤다는 인정을 받은 이후, 과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흥부처럼 복을 받아 벼락부자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그 후에도 가난하게 살았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그 과부는 여전히 빈곤한 삶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여인의 빈곤이란, 오늘 필요한 하루치의 밀가루와 기름만 남아 있는 빈곤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 소진하고 내일이 되면, 새로운 하루를 위한 양식이 항아리와 병에 채워지는 그런 빈곤입니다. 사르밧 과부처럼(왕상17:8-16),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하루하루가 기적이면서 명백한 은총인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필요 이상으로 남아도는 풍족함이 아니라, 부족함이 없는 돌보심입니다(시23:1). 남겨둔 것이 많은 상태인 과잉은 축복이 아닙니다. 어느 때보다도 잉여물이 많은 오늘날, 어느 때보다 많은 생명이 기아에 허덕이거나 멸종의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이 시대의 치명적인 질병들은 모자람이 아니라 과다에 기인합니다. 지구별이 직면한 생존의 위협도 물질의 풍요함에 의해 가중되고 있습니다.
일부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저장고에 남겨놓은 것을 의지해서 살아가고, 전부를 드리는 사람은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의지해 살아갈 것입니다. 남겨놓은 것은 필시 썩기 마련이지만, 빈 항아리에는 새로운 생명의 양식이 담깁니다. 하나님이 전부를 주신다는 것을 믿는 이들이 전부를 드립니다. 주님의 은혜가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데, 묵은 양식을 남겨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신비롭고 온전한 생명의 삶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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