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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은 있겠지만 아직은 끝이 아니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가복음 13장)
유대 전쟁과 복음서 기록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교회가 생겼고, 오랫동안 교회의 주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생긴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예수의 행적과 말씀을 체계적으로 담은 기록물인 복음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은 예수를 직접 경험하고 기억하는 사도들을 비롯한 증인들을 통해서 구전(口傳)으로 전해지거나, 매우 짧은 단편 자료로 통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기가 되어 예수의 전기(傳記) 성격을 띤 복음서들이 등장하는데, 그때는 유대 전쟁 전후입니다.
유대 전쟁은 복음서들이 기록되는 이유와 배경에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전쟁에서 유대인들을 이끌었던 지도자 중에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거나 재림 예수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절). 그 말을 곧이듣고 전쟁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도 적잖았습니다. 자칭 예수라 하는 이들의 교설에 맞서서 교회는 참된 예수를 확정적으로 제시해야 할 필요성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런 정황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또한, 전쟁의 참화와 이어진 박해로 인해, 예수의 삶과 말씀을 전해 주던 증언자들이 순교하거나 죽게 된 정황도 복음서 기록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마가복음이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대학살 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짐으로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대 전쟁과 교회
교회가 생겨나고 나서 한 세대가 더 지난, 주후 66-70년에 걸쳐 팔레스틴에서는 ‘유대전쟁’(7절, ‘난리(폴레모스)’의 원래 의미는 ‘전쟁(war)’)이 벌어집니다. 로마의 오랜 식민 지배와 세금 정책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대의와,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워진 로마 황제의 신상을 없애는 신앙적 당위성을 기치로 하여, 유대인들은 전면적으로 무장 봉기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이끌면서 전쟁 초기에 승리를 거두던 영웅들이 메시아(그리스도)로 칭해지고, 로마와의 싸움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마지막 성전(聖戰)이라는 종말론적 의미가 덧입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믿는 유대인들은 너나없이 전쟁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습니다. 평소에 갈라져 있던 유대교의 모든 분파와 세력들도 동지가 되어 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하나님신앙)의 여러 분파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교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전쟁에 동참해야 한다는 견해가 안팎에서 지배적이었습니다. 유대 전쟁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의로운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최후의 전쟁이라는 대의에 동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이 전쟁에 앞장선 영웅 지도자 중 누군가가 재림하신 예수라는 주장까지 생겨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했던 당시의 교회들은 유대 전쟁 참여 여부를 두고 긴박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복음서의 소묵시록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처럼, 세상의 종말을 전제로 하여 마지막에 벌어질 일들과 징조와 결말들을 상징적 언어로 기록하는 것을 묵시록이라 합니다. 묵시록은 미증유의 전쟁이나 재앙, 박해나 고난의 상황을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록됩니다. 악한 세상에서 의인이 고난을 받음이 당연하다고 묵시록은 해명합니다. 그리고 고난을 견디면서 의를 위해 싸우고 신실함을 지키라고 의인들을 격려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악을 이기고 반드시 승리하실 것이고, 종말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여실 것이며, 신실함을 지킨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전쟁이 세상의 종말일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던 흔적이 공관복음서들 안에 담겨 있습니다. “소묵시록”이라고 불리는 마가복음 13장, 마태복음 24-25장, 누가복음 21장에서입니다.
이 돌들(성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1-3절)
초개같이 목숨을 버리면서 온 유대인이 전쟁에 뛰어든 이유는 ‘성전(聖殿)’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로마황제의 신상, 14절)”이 성전 안에 세워진 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면전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유대인의 사랑은 가히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한 로마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원수이며, 악의 세력과 마지막 항전을 벌이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책무라고 믿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승리하신 주님이 그들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돌들(성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예수께 묻는 제자의 질문은 성전에 대한 교회의 애정을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존재했던 초기 교회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 의례를 중시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행 3:1), 유대 전쟁 끝에 성전이 어찌 될까의 여부는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이기도 했겠지요. 이 물음은, 예수 일행이 성전 경내에서 나가면서, 웅장하고 장엄한 성전 건물을 보면서 던져집니다.
예수께서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성전이 무너지리라”(2절)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유대 전쟁은 성전이 불타고 잿더미가 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성전 붕괴의 전조로 여겨지는 예수의 말씀은 비단 여기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며칠 전 성전에 들어가셔서 상을 둘러엎으시면서 ‘강도의 소굴’이라 호통하신 일이 있으셨지요(11:15-18). 뒤에서는, “성전을 헐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 예수의 기소 이유로 제기됩니다(14:58; 15:29).
보이는 것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성전 건물조차도 그렇습니다. 성전을 짓고 그것을 하나님인냥 받들면 성전 그 자체가 우상이 됩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을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건물이 무너진대도 하나님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이라면 무너지는 것이 마땅하며, 같은 이유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에 의해 모독을 당하기 전에,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더럽혀졌습니다. 유대 전쟁에서는 열심당원들이 성전을 자신들의 본부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성전을 명분으로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이루려는 유대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미혹 : 누가 메시아인가? (5-6절)
마가복음 공동체가 유대 전쟁을 치르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먼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전쟁의 영웅들을 메시아로 부르는 것(6절)에 대해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공동체가 고백하는 메시아는 “나사렛 예수”입니다.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는 로마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존재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었던 예수를 메시아로 믿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예수께서 다윗의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염원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10:10).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고 성전을 더럽히는 로마를 무찌르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은 유대 전쟁에서도 반복됩니다. 또한 이천 년 그리스도 역사 속에서, 같은 명분으로 싸움을 부추기고 전쟁을 정당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로마를 정복하는 대신 그들의 손에 죽으십니다.
끝이 아니다 (7절)
4절에서, 제자들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은밀히 묻습니다. 이 물음은 “언제(어느 때에) 종말(이런 일)이 오겠으며, 종말이 올 때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고쳐 쓸 수 있습니다. 유대 전쟁을 종말 사건으로 보았던 유대인들의 이해를 반영한 질문입니다.
마가복음 공동체가 유대 전쟁에 합류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전쟁에서 메시아로 불리는 이들이 말하는 ‘종말이 왔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까닭입니다(7절). 마지막은 언젠가 반드시 올 것이고, 그것은 예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끝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의심하지 않지만, ‘그 마지막이 지금이다’는 주장에는 찬동할 수 없습니다. 유대 전쟁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난리와 고통과 재난이고, 따라서 마지막의 징조임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 징조들은 마지막이 있을 것이라는 징조일 뿐이지, 지금이 그 마지막임을 증언하는 신호는 아닙니다. 마지막을 가리키는 징조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때때로 거짓 선지자들이 그 징조들을 근거로 마지막 때라고 주장했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예수 자신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32-33절). 그때에 관한 어떤 추측이나 주장도 미혹일 따름입니다.
진통(재난)의 시작이다 (8절)
유대 전쟁은 유대 남자들이 거의 학살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며(2절),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유대 전쟁 후에 교회는 유대사회로부터 단절됩니다. 유대 전쟁에 동조하지 않은 교회를 유대인들은 용서할 수 없었겠지요. 유대교이든 교회이든, 최후의 승리가 아닌 최악의 비극을 맞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결말을 ‘진통(odin, 일반적 재난의 고통이 아니라 산고의 고통)의 시작’(8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통은 죽음의 고통이 아니라 새 생명을 출산하기 위한 고통입니다. 성전 파괴와 유대공동체의 괴멸을 가져온 유대 전쟁은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시는 구원의 산고라는 의미입니다. 수백 년 전(기원전 586년)에도 바벨론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완전한 끝이라고 절망하던 시간이었지요. 그러나 그 폐허의 시간에 히브리 성서(구약)가 기록되었고, 성전 공동체가 아닌 말씀(경전) 공동체로서의 종교로 거듭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역사는 유대 전쟁에서 다시 성전이 허물어지는 진통으로 재현되고, 하나님은 보이는 건물인 성전이 아니라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진리가 다시 선언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시대는 종말의 징조를 목도합니다. 전쟁과 기근과 역병과 자연재해와 기후 위기는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끝이라고 술렁거리는 혼란 속에서, 끝은 오겠지만 아직 끝은 아니라는 믿음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미혹되어 동요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소명을 따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신실하게 살아감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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