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들꽃'<윤흥길> 독후감(행복의나라로)
윤흥길은 6.25를 소년 시절에 겪은 작가(9살 때 6.25가 일어남)답게 6.25의 상흔을 토대로 쓴 소설이 많다. 이 소설도 그 중의 하나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숙부마저 의지할 사람이 못되어 숙부로부터 도망쳐 마침내 전혀 남의 집에 배짱 좋게 의탁하여 살고 있는 한 소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명선'
명선은 어린 나이에도 어느 새 세상 물정에 눈을 떠 전쟁 중에는 인심은 사나울 수 있어도 사람들의 물욕은 더욱 예민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부모가 물려준 금부치를 적절한 때를 가려 주인집에 제공함으로 그 집에 계속 머물 수 있는 특권을 얻어낸다.
그 집에서는 소년이 금부치를 더 가지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그 소재를 알아내려 하지만 명선 역시 그 소재를 알려주는 순간 자신의 특권이 더 이상 특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영악한 소년... 그런 그가 이를 알려줄 리가 없다.
명선은 주인 집 아들과 친숙하게 지낸다.
명선은 얼핏보면 여자 같이 생겼음에도 배짱으로 말하면 주인 집 소년은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어느 날 뜻밖에도 명선이가 소년이 아니라 소녀인 것이 드러난다.
그래도 변함 없이 둘은 친하게 지내고 주인집 아들도 이런 사실을 남에게 발설하지 않는다.
피해갔으면 좋았을 운명의 날 둘은 가끔 가던 마을 근처의 강가에 간다.
거기엔 폭격으로 부서진 다리가 있고 두 소년소녀는 그 다리 위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만 명선이 실족해서 강 아래로 떨어져 죽고 주인 집 소년은 명선이가 떨어져 죽은 다리 구석에서 그렇게나 부모가 알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찾던 금부치가 담긴 주머니를 우연히 발견한다.
명선을 통해서 한 몫 단단히 잡으려는 어른의 추악한 심성에도 주인집의 아들은 그런 부모를 닮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시종일관 명선을 대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다리가 폭격 당할 때에 인근에 있던 피난민들도 피격 당한다.
불행하게도 그 사람들 중에 명선의 부모가 끼어 있었다.
전투기가 폭격을 위해 저공 비행할 때 나는 폭음과 포탄이 터질 때의 굉음 속에 한순간 명선이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났을 때에 뭔가가 명선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는데 그게 다름아닌 어머니의 시신임을 알았을 때에 명선의 심정이 어떠했을까?...고아가 된 명선을 숙부가 맡았지만 숙부가 어떻게 조카를 대했길래 전쟁통에 아무도 돌봐줄 사람 없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숙부에게서 도망을 쳐야 했다는 말인가?
부모를 잃고 자기 집에 구걸온 자기 자식만한 아이에게서 마저 물욕을 채우려는 소년의 부모 모습은 전쟁이 가져다 준 광기, 비인간성의 맨얼굴이 아니고 뭐라할 것이며 나 역시 그런 환경에 놓이면 그러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을 가질 수 없게 한다.
타지에서 굴러 들어온 고아라고 해서 마을의 아이들이 명선을 괴롭히려고 할 때에도 명선은 이들에게 가만히 앉아 당하지 않고 도리어 당당히 맞서서 이들을 물리치는데 여자 아이가 아무리 소설 속 얘기라고는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소년네 부모가 이제는 아예 명선에게서 금부치가 더 이상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기를 쫓아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는 가끔씩 금부치를 갖다주는 명선은 어린 나이에도 너무 나이를 먹어 보여 징그럽기마저 했지만 왜 그가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 끝에 가끔씩 가서 주인 집 아들과 위험한 곡예를 했는지 알려주는 소설의 맨 마지막 장면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거기에는 주인 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그렇게나 알고 싶어하던 금부치 담긴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던 것...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왜 하필이면 명선이가 그 날 폭격 맞은 다리 끝에 위험하게 매달려 있을 때에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명선의 머리 위로 지나갔던 것일까?
명선은 담대한 심성이었으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때에 폭격에 대한 비참함 때문이었는지 전투기의 굉음을 굉장히 두려워했고 겁을 먹었다.
명선이 그 날도 금부치를 꺼내올 마음이었는지는 몰라도 끊어진 다리 끝에 위험하게 매달려 있을 그 순간에 전투기가 편대를 지어 굉음과 함께 다리 위를 지나간 것인데 이에 놀라 중심을 잃고 전에 여기 와서 놀 때에 벼랑에 피어있는 쥐바라숭이꽃을 따서 가지고 놀다가 다리 아래로 날려 버릴 때에 빙글빙글 돌며 강심으로 떨어져 내리던 그 날의 들꽃마냥 명선은 다리 아래로 떨어져 내려 물에 잠겨버리고 다시는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고 만다.
부모님을 잃었어도 꿋꿋하게 버텼고, 동네의 남자 아이들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던 담대하던 명선이가, 그리고 어른들이 금부치의 소재를 알아내려고 해도 이를 비밀로 남겨두리만큼 영악하던 소녀 명선이 어찌하여 비행기 소리에는 그다지도 겁을 먹고 다람쥐처럼 자유자재로 오가던 다리 위에서 단번에 추락해버린다는 말인가?
전쟁은 모든 사람의 심성을 파괴한다. 죽은 자나 산 자나 피해를 당한다는 점에서는 하등의 차이도 없다.
작가가 묘사하려한 '기억 속의 들꽃', 그가 바로 명선이라는 한 당당한 소녀라는 것을 누가 모를까만 그 당당하던 소녀가 어이 없게 무너져 내리던 모습을 비록 소설 속에서라고는 해도 대하게 되는 나의 마음과 가슴은 너무나도 답답하고 쓰리고 아프고 치가 떨린다.
기억 속의 들꽃은 전쟁의 불행과 비극을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모두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아직도 나는 명선이가 다리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그가 꿋꿋이 살아 남아 자녀를 낳아 그 자녀에게만큼은 전쟁이 가져다 준 자신의 어린 시절 처절한 상처를 전혀 물려주지 않고 아름답게 키워주기를 갈망했는데 작가는 아름다운 들꽃 명선을 너무나도 쉽게 죽이고 말았다.
이 순간 작가가 몹씨도 원망스럽다.
명선을 살릴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명선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자신을 회상하는 소설로 할 수는 없었을까?...
전쟁이라는 배경이 아니었더라면 황순원의 '소나기'를 능가할 수도 있는 아름다운 소설이 될 수도 있었으련만 전쟁은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명선에게서 앗아갔다.
어떤 명분이 있더라도 전쟁은 추악하고 비참하며 모든 것을 말살하는 것...제아무리 비굴한 평화일지라도 제아무리 당당한 전쟁보다 훨씬 낫다고 절규 하고 또 절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