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천을 펼친다. 붉은 바탕에 큰 목련꽃이 놓인 화려한 천이다. 금방이라도 잎을 너풀거릴 듯 목련에 생동감이 돈다. 꽃을 살려 앞치마를 만들면 제격이겠다.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둔 가위를 꺼낸다. 은은한 베이지 톤에다가 잘 마름질한 버선코처럼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간 가위다. 작고 앙증맞은 것이 내 손에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끝이 가늘어 잘못 기운 실을 따낼 때도 요긴하게 쓰인다.
얼마 전, 조카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다. 처음으로 해외출장을 간다며 뭘 사다 주면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선물은 무슨 선물이냐며 건강하게 잘 다녀오기나 하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굳이 한 가지를 말하란다. 먼 길에 짐이 되지 않도록 부피가 작고 무게가 나가지 않으면서 나에게 의미 있는 물건이 뭐가 있을까. 고심 끝에 생각해낸 것이 가위였다. 바느질을 즐겨 하는 탓에 이미 몇 개의 가위가 있었지만 모두 크고 무거워서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가위가 필요하던 차였다.
내 속에 들어왔다 나가기라도 한 듯, 조카는 마음에 쏙 드는 가위를 사왔다. 새 것 같지 않게 금세 손에 익어 쓰기에도 편했다. 민첩하고 엽렵한 것이 조카의 마음씀씀이를 닮았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이모 노릇도 제대로 못했는데 싶으니 살뜰하게 챙겨주는 마음이 기특해 자주 손길을 주는 가위다.
오래전, 어머니에게도 지극히 아끼던 가위가 하나 있었다. 까만 손잡이의 무쇠 가위였다. 크고 묵직한 그 가위가 입을 쩍 벌릴 때면 무섭기도 했지만 기다란 천을 가르며 쏜살같이 내달리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삯바느질을 하셨던 어머니에게 가위는 분신과도 같았다. 그래서일까. 우리 자매들이 대대손손 유물로 남기자고 농을 했을 만치 어머니는 가위를 애지중지 하셨다. 가끔씩 바느질을 도와주러 오던 고모도 어머니의 가위를 부러워할 정도였다.
몇 달에 한 번씩, 동네에 칼 가는 아저씨가 나타나면 간만에 가위도 단장을 했다. 묵은 때를 벗기고 무뎌진 날을 세웠다. 먼저 숫돌을 깨끗이 씻어 낸 아저씨는 물 몇 방울을 성수처럼 뿌렸다. 이리 누웠다, 저리 누웠다, 가위는 아저씨 손에서 몸을 뒤집어가며 제 몸을 벼려야했다. 가위가 지나갈 때마다 시커먼 물이 숫돌을 흘러내렸다. 그렇게 벼룬 가위를 깨끗한 물로 헹궈낸 아저씨는 실눈을 뜨고 날을 햇볕에 비춰보곤 했다. 날이 빛을 받아 번쩍 하고 빛나면 괜히 가슴이 서늘해졌다. 금방이라도 가위가 내 몸을 긋고 갈 것 같아 오금이 저려오기도 했다.
사그락 사그락. 아저씨 손을 거친 가위는 소리부터 달랐다. 가위를 받아 든 어머니는 시험 삼아 자투리 천을 잘라보곤 했는데 가위를 갖다 대기가 무섭게 잘린 천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어머니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호주머니를 열었다.
종갓집 맏며느리답게, 어머니는 손재주가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손수 식구들의 옷을 만들어 입히는가 하면 동네 잔칫집 요리사로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을 만치 손끝이 여물었다. 누마루가 있는 큰 집에는 늘 손님이 들락거렸고, 한 번 오면 두어 달씩 묵고 가는 친척들도 많았다. 모든 치다꺼리가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유머 있고 박식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내에게만은 유독 가혹한 남자였다. 기억하건데 단 한 번도 살가운 눈빛으로 어머니의 고단함을 위로해주지 않았다.
직장 일로 타지를 전전하던 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아내가 있었다. 내리 딸만 두었던 어머니와 달리 그녀는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독차지 하고 살았다. 대소사가 많았던 종갓집이라 이따금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술에 취한 채 느지막이 왔다가 새벽같이 돌아가는 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듯했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에게 냉담했다.
아버지는 올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어머니와 다투었다. 손찌검은 하지 않았지만 어떤 날은 상이 날아가고 어떤 날은 장독이 깨졌다. 온기가 남아있는 아궁이 앞에 앉아 두 분의 언쟁이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절, 나는 차라리 아버지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다녀간 다음날이면 어머니가 재봉틀 앞에 앉는 시간이 길어졌다. 자투리 천을 쏟아 놓고 가위질을 했다. 자르고, 도려내고…, 어머니의 손에서 떨어져 내린 천 쪼가리들이 당신의 한숨처럼 수북하게 쌓여갔다. 덜덜덜, 집안을 울리는 재봉틀 소리는 어머니의 감정정리가 끝난다는 신호였다. 자른 천을 이어 붙여 알록달록한 조각보를 만들거나 앞뒤가 다른 우리 옷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어머니는 불편한 감정의 찌꺼기들을 툴툴 털어내곤 했다.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홀로 쓰러지고 홀로 일어나야만 했던 어머니와 함께 한 것이 무쇠가위였던 셈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는 공납금 독촉을 받을 만큼 가난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곱게 쪽을 지고 한복을 차려입고 있던 어머니도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다. 헐렁한 고무줄 바지 차림으로 밤낮없이 재봉틀을 돌렸다. 많은 일가친척을 건사하고, 삼촌 학비에 4대 봉제사를 지내야하는 장손살림을 감당하기가 쉬웠으랴. 머리에 허연 실밥을 이고 앉은 야위고 초췌한 어머니, 그 모습이 마음 아파서 동정 다는 법이라도 배워 일을 덜어드리고자 하면 팔자는 만들기 나름이요, 못 하면 편하게 산다고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나도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습관처럼 가위를 든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바느질만큼 오만 잡념들을 잊기 좋은 것도 없다. 어머니 역시 그러하셨을까.
사각 사각, 가위 끝에서 목련 한 송이가 곱게 피어난다. 꽃을 들고 그 옛날 가위를 햇빛에 비추어 보듯 불빛에 비추어본다. 올올이 빛을 머금은 꽃에서 금방이라도 향이 뭉근하게 피어오를 것만 같다. 뒤늦은 위무이지만, 평생 고달프게 살다 가신 어머니라는 이름 위에 훈장처럼 가만히 달아드리고 싶다.
첫댓글 완료추천이라 해도 좋은 글입니다.
가위로 말하는 여인의 생, 가위에 서린 필자의 상념들이
고운 사유의 조각보를 지었네요.
선생님은 부산에 사시는군요. 혹 유병근 선생님의 제자가 아니신교?
감동으로 잘 읽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부산 대학교의 정진농 선생님에게 수필을 배웠습니다.
아, 이 글을 쓰신 분이군요. 그때도 참 마음에 닿았는데 다시 읽어도 좋습니다.
어머니와 가위,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읽힙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아도 감명 깊게 읽었더랬습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