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시 (13수)
1월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神)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神)의 발성법(發聲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내 영혼의 현(絃)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써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오세영·시인, 1942-)
1월
목필균
새해가 밝았다
1월이 열렸다
아직 창밖에는 겨울인데
가슴에 봄빛이 들어선다
나이 먹는다는 것이
연륜이 그어진다는 것이
주름살 늘어난다는 것이
세월에 가속도가 붙는다는 것이
모두 바람이다
그래도
1월은 희망이라는 것
허물 벗고 새로 태어나겠다는
다짐이 살아 있는 달
그렇게 살 수 있는 1월은
축복이다
(목필균·시인)
1월에는
목필균
열 한 달이나 남은 긴 여유가 있다는 것
누구나 약속과 다짐을 하고도
다 지키지 못하고 산다는 것
알고 나면
초조하고 실망스러웠던 시간들이
다 보통의 삶이란 것 찾게 될 거예요
1월의 아침
허형만
세월의 머언 길목을 돌아
한줄기 빛나는 등불을 밝힌
우리의 사랑은 어디쯤 오고 있는가.
아직은 햇살도 떨리는 1월의 아침
뜨락의 풀뿌리는 찬바람에 숨을 죽이고
저 푸른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살아갈수록 사람이 그리웁고
사람이 그리울수록 더욱 외로워지는
우리네 겨울의 가슴,
나처럼 가난한 자
냉수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깨끗해진 두 눈으로
신앙 같은 무등이나 마주하지만
나보다 가난한 자는
오히려 이 아침 하느님을 만나 보겠구나.
오늘은 무등산 허리에 눈빛이 고와
춘설차 새 잎 돋는 소리로
귀가 시린 1월의 아침
우리의 기인 기다림은 끝나리라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땅도 풀리고
꽃잎 뜨는 강물도 새로이 흐르리라
우리의 풀잎은 풀잎끼리 서로 볼을 부비리라.
아아,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 분다
무등산은 한결 가즉해 보이고
한줄기 사랑의 등불이 흔들리고 있다.
1월의 시
박광호
새해 새 아침에는
가슴에 해를 품었다
암청색 옷을 벗으며
새뜻한 소망이 솟구쳤다
하늘에로 기도를 보내고
흙을 파고 씨를 심었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깨달음의 산하여
억만년 힘차게 출렁이는
동해 서해 남해여
격동의 아픔 속에
연면히 이어온 역사
꿋꿋이 견딘 인고와
슬기와 강인함 속에
오늘을 엮어 가는 생명력
우리를 살리는 맥박이여
서로 마음을 열고
봄을 향하여 나아가라
힘차게 지축을 울리면서
뜨거운 쇳물을 쏟으면서.
1월의 기도
박성일
주여!
새로운 한 해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고 오는 날들이
아이들의 이가 자라나는 것처럼
슬픔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하시고
희망차고 보람된 나날들이 되게 하소서
주여!
새해에는 더욱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손을 내밀어 모르는 이웃들의 손을 잡게 하시고
주위의 사람들을 따뜻한 눈으로 둘러보게 하시어
세상을 주의 사랑으로 품게 하여 주소서
주여!
새해에는 다른 사람들을 탓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더욱 돌아보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비판하기보다는
나의 부족함을 가지고 아파하면서
나 자신을 성숙시키는 시간들이 되게 하소서
주여!
주님이 주신 새로운
꿈과 희망과 사랑의 마음으로
힘차게 새해의 첫 발을 내딛게 하시고
한 해 동안 이 마음 변치 않도록 지켜 주소서
1월
신달자
때는 새벽
1월의 시간이여 걸어 오라
문 밖에 놓인 냉수 한 그릇에
발 담그고 들어오면
포옥 삶아 깨끗한
새 수건으로
네 발 씻어 주련다
자세는 무릎을 꿇고
이마엔
송글송글 땀방울도
환히 미소 지어리니
나의 두 손은 잠시
가슴에 묻은 채 쉬리라.
1월에 쓰는 엽서
신현복
우리, 1월이 있음을 감사하자
어제까지의 시간을 용서 받고
삶에 새벽 같은 1월이 있음을 감사하자
마음속에 작은 항아리를 들여놓고 사랑을 숙성시키자, 1월에는
묵은 신문의 슬픈 기사에도 눈길이 필요한
늘 배고픈 우리들 사랑이지 않나
그 먼 별도
그 작은 초승달도
가슴 따뜻하게 해주는 약 숟가락 크기의 빛으로 사랑 받지 않나
마른 들풀에게는 봄을 기다릴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고
가난한 마음에는 행복의 싹을 잃지 않게 하는
작지만 큰사랑의 빛
우리 1년 동안 베풀 그 빛을 숙성시키자, 1월에는
슬픔은 기쁨으로
미움은 용서로
불행은 행복과 찬란한 희망으로……
1월
용혜원
1월은
가장 깨끗하게 찾아온다
새로운 시작으로
꿈이 생기고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올해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기대감이 많아진다
올해는
흐르는 강물처럼 살고 싶다
올해는
태양처럼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
올해는
먹구름이 몰려와
비도 종종 내리지만
햇살이 가득한 날들이 많을 것이다
올래는
일한 기쁨이 수북하게 쌓이고
사랑이란 별 하나
가슴에 떨어졌으면 좋겠다
1월의 기도
윤보영
사랑하게 하소서.
담장과 도로 사이에 핀 들꽃이
비를 기다리는 간절함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새벽잠을 깬 꽃송이가
막 꽃잎을 터뜨리는 향기로
사랑하게 하소서.
갓 세상에 나온 나비가
꽃밭을 발견한 설렘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바람이 메밀꽃 위로
노래 부르며 지나가는 여유로
서두르지 않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그게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늘 처음처럼, 내 사랑이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게 하소서.
1월
이외수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내가 서있다
이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한밤중에 바람은 날개를 푸득거리며
몸부림치고
절망의 수풀들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망명지
아무리 아픈 진실도
아직은 꽃이 되지않는다.
내가 기다리는 해빙기는 어디쯤에 있을까
얼음 밑으로 소리죽여 흐르는
불면의 가움
기다리는 마음 간절할수록
시간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추억을 살해한다.
모래바람 서걱거리는 황무지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심은 감성의 낱말들
해맑은 풀꽃으로 피어날까
오랜 폭설 끝에
하늘은 이마를 드러내고
나무들
결빙된 햇빛의 미립자를 털어 내며 일어선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눈부시다.
1월의 시
이해인
첫 눈 위에
첫 그리움으로
내가 써보는 네 이름
맑고 순한 눈빛의 새한 마리
나뭇가지에서 기침하며
나를 내려다본다
자꾸 쌓이는 눈 속에
네 이름은 고이 묻히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무수히 피어나는 눈꽃 속에
나 혼자 감당 못할
한방울의 피와 같은 아픔도
눈밭에 다 쏟아 놓고 가라
부디 고운 저분홍 가슴의
새는 자꾸 나를 재촉하고……
1월
최명진
모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아래층 노점천막이 무너지지 않을 만큼
길을 지나간 구두 굽들의 높이만큼
쓸린 눈 무더기가
외눈가로등 밑에 수북이 쌓였다
창밖은 내내 시시하고
늦게 잦아든 겨울 속으로
꽃처럼 성에가 핀다
더딘 구름 속
찬 햇살이 얼핏 고개를 민다
새벽일을 마치고 온 엄마는 늦은 잠을 잔다
산토끼처럼
발자국처럼
듬성듬성
길은 조용하다
이 도시에서 자란 옆집아이처럼
긴 겨울이 시작됐다
1월의 달력은 두껍고
아직 눈을 털지 못한 녹슨 그네가
빈 놀이터에 나란히 매달려있다
[임인년 새 해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운산 최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