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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시조 작가로 알려져 있기에, 국문학사에서는 주로 그의 시조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그렇듯이, 윤선도 역시 시조보다 더 많은 한시를 남기고 있다. 한시와 시조를 비롯해서 그가 남긴 문학작품들은 <고산유고>라는 문집을 통해 전해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윤선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어부사시사>를 비롯해서 모두 75수에 이르는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시조 작품들로 인해, 그는 ‘자연미의 시인’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여기에 수록된 한시 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일생을 관류하는 작품 세계와 작가 의식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원칙주의자로 알려진 그였기에 관직에 나아가기 전부터 당시 권력자들을 질타하는 상소문을 올려, 결국 그로 인해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가야만 했다. 경원에서 유배생활을 한 지 1년 만에 경상도 기장으로 옮겨졌는데, 그 이유가 ‘북쪽 변방의 오랑캐들과 결탁해서 나라에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후에 효종으로 등극하는 봉림대군의 왕자 시절 사부로 활약하여, 인조가 죽고 효종이 등극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를 견제하던 세력들은 갖은 이유로 윤선도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고, 그로 인해 다시 유배형에 처해지는 등 10년이 넘는 기간을 유배지에서 지내야만 했다.
때로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향인 해남과 은거지인 보길도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부사시사>와 <산중신곡> 등 문학사에 거론되는 시조 작품을 남겼던 것이다. 윤선도는 상대 당파의 집중적인 견제로 생애의 절반 이상을 유배를 떠나거나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지에서 지내야만 했다. 그의 시문을 모은 문집(고산유고)에는 14세 때 부친의 임지를 방문하면서 지은 한시가 남아있으며, 이후 평생 한사와 시조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정서를 표출했다.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이 대부분 정치인이자 문학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데, 윤선도는 그러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의 한시 가운데 선정된 작품을 원문과 함께 번역하여 수록한 작품집이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을 살펴보면서, 그동안 시조를 통해서 접했던 윤선도의 작가로서의 면모가 더욱 뚜렷하게 각인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특히 윤선도의 작품을 시대순으로 배열하여, 한시를 통해서 그의 작가로서의 면모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원문이나 번역에 오탈자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한시는 물론 책의 뒷부분에 수록된 ‘작품 해설’과 일생을 간략하게 정리한 ‘연보’ 등을 통해서 윤선도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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