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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78번 말씀
제목 : 신랑과 신부 그리고 우물가
창 29:1-20
1.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웠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물을 양떼에게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구를 덮었다가
3.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양에게 물을 먹이고는 여전히 우물 아구 그 자리에 돌을 덮더라
4.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형제여 어디로서뇨 그들이 가로되 하란에서로라
5.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가로되 아노라
6.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가로되 평안하니라 그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7.야곱이 가로되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
8.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9.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중에 라헬이 그 아비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침이었더라
10.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11.그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비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고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비에게 고하매
13.라반이 그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 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고하매
14.라반이 가로되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하더니
15.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나 어찌 공으로 내 일만 하겠느냐 무엇이 네 보수겠느냐 내게 고하라
16.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봉사하리이다
19.라반이 가로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 아멘.
우린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왜 야곱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그리고 택한 자들의 목표지점에 대해서 심도있게 공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야곱의 행위나 됨됨이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구속사의 그림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가 야곱의 됨됨이와 상관없이 그의 삶 속에 그려져 있어요. 오늘 본문은 야곱이 드디어 외삼촌 라반의 동네에 도착해서 우물가에서 그의 신부인 라헬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에요. 우물가에서 신랑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의 신부를 맞이하는 그런 장면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거의 쫓겨나다 시피해서 외삼촌의 집으로 온 사람이에요.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 뿐이에요. 다른 것은 다른 이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한 언약의 사람이 우물가에서 신부를 만나는 그런 그림, 그 그림은 이미 우리가 앞서 한 번 본적이 있습니다. 어디서 봤죠? 창세기 24장에서 봤죠. 창세기 24장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 우물가에서 역시 언약의 후손인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만나는 장면이 나와요. 바로 그 창세기 24장의 우물가의 그림이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반복되어 그려져 있는 거예요. 그렇게 언약의 후손, 언약의 후손 하나님의 라인이 우물가에서 신부를 만나는 장면은 역시 언약의 후손, 하나님의 라인인 모세에게로 이어집니다.
출 2:15-21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17.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무리에게 먹이니라
18.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그들이 가로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무리에게 먹였나이다
20.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
21.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모세가 자기 아내 십보라를 우물가에서 만나는 거예요. 그렇게 언약의 후손들의 신부들은 모두 우물가에서 신랑을 만 나는 거예요. 근데 특이한 것은 그들이 하나 같이 그 우물가에 자기의 필요를 채우러 왔다, 라는 사실이에요. 누구 하나 그 우물가에서 자신의 신랑을 만날 것이다, 라는 기대를 품고 오지 않았다는 게 중요해요. 거기에 신랑이 있는 지도 몰랐어요. 근데 갔더니 신랑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를 덥석 잡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여기에서 신부는 교회를 이야기하는 거고 신랑은 언약의 후손, 참 언약의 후손 예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이 창세기에서부터 이렇게 작은 그림으로 반복되어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의 물을 구하러 왔다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언약의 후손에게 붙들려서 언약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거예요, 신부는. 그리고 결국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게 되고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신부들의 공통점이에요. 성경은 참 언약의 후손이시며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랑이신 참 생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신부로 택함을 받는 성도의 모습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반복하여 그려내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신부들은 언약이 뭔지도 몰라요. 그리고 생수가 뭔지도 몰라요. 그런데 생수를 품고 계신 언약의 후손이 세상 힘의 원천을 상징하고 있는 우물가에서, 우물은 당시에 사람들에게 재산목록 1호였어요. 땅도 우물이 있어야 땅의 구실을 할 수 있었고 가축도 몰이 있어야 살 수 있었어요. 그래서 우물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재산목록 1호였어요. 그래서 제가 그 우물을 세상 힘의 원천을 상징하는 거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약의 후손이 세상 힘의 원천을 상징하고 있는 우물가에서 그 우물, 세상의 힘을 기각하고 밀어내버리는 거예요. 밀어내고 그 앞을 막아서서 참 생수를 내미는 것, 그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 생명수는 어떠한 댓가도 요구하지 않는 공짜 선물로 주어진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세상이 주는 목마름에 찌들어서 열심히 걸어서 우물가에 도달한 신부들의 고단함 앞에 공짜로 준비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참 생수가 준비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신부가 원하지도 않는데 기다리고 있던 신랑이 신부에게 생수를 쏟아부어버리는 거예요. Irresistible Grace 저항 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 작은 그림들이 완성되는 곳이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인 거예요.
요 4:5-14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우물이 나타나는데 야곱의 우물이 등장해요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2.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이게 세상 우물의 실체에요]
14.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일부러 사마리아 땅으로 가신 거예요.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갈 때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꼭 지나가야 하는, 그 중간에 사마리아 땅이 있었거든요. 꼭 지나가야 하는 사마리아 땅을 피해서 요단강 동편으로 건너가서 돌아다닐 정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했어요. 개취급도 안 했습니다. 근데 주님은 일부러 그것도 황급히 서두르셔서 사마리아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로 가셨어요.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해서. 얼마나 행로에 고단하셨는지 주님은 도착하자마자 우물가에 철퍼덕 주저앉으셨어요. 참 신랑이시며 참 언약의 후손이 우물가에서 죄인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신부로 맞기 위해 홀로 먼저 가셔서 거기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야곱의 우물가 사건이 어떻게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이어지는지 이해가 가시죠? 주님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 이 세상의 힘으로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려 하는 자들을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그 여인에게 뜬금없이 남편을 데려오라 그러죠? 그 여인은 다섯 번 이혼하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 말은 그 여인이 자신의 목마름을 이 세상의 남편들, 즉 이 세상의 힘으로 채우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얼마나 그 목마름이 심했으면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는데도 채워지지가 않았어요. 그 목마름이. 근데 자기의 목마름을 온전히 해갈해줄 진짜 남편, 진짜 신랑이 우물가에서 생수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의 남편을 상징하는 세상의 우물가에 하늘의 남편인 언약의 후손이 진짜 생명수를 들고 있는 이 극명한 대조를 보세요.
하나님의 구원이 어떠한 것인지 너무나 명약관하하게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도 세상의 우물을 찾는 자들아, 거기에서는 절대 너희들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으니까 나에게 와라, 라고 외치신 거예요.
요 7: 37-38
명절 끝날 [초막절 끝 날이죠]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나에게 오라는 거예요. 그 세상의 우물은 절대 너희들을 만족시켜줄 수 없어. 그러니까 나에게 와서 나를 마셔라, 라는 거예요. 근데 오늘날 많은 곳에서 참 생수인, 참 생수를 들고 기다리고 계시는 그 신랑 예수에게 세상의 우물을 파달라고 조르고 있어요.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참 생수이시며 참 우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얘들아, 세상의 우물에 가서 물 찾지 마, 세상 것으로 너희들의 만족, 너희들의 행복 추구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를 마시라는 거예요. 예수 안에 행복이 있고 예수 안에 만족이 있고 예수 안에 영생이 있으니 그리고 가라, 라고 구약 내내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다고요. 몇 군데만 찾아드리죠.
사 12:2-3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세상의 우물 거기서는 절대 너희의 구원, 너희들의 행복에 필요한 물을 얻을 수 없어. 그러니까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지,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사 49: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누구 때문에? 예수 때문에]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누가? 예수가, 어디로?]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사 55:1-2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근데 그 물이 어떤 물인지 보세요]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목마른 자들아 물가로 나오라. 근데 그 물은 어떤 물이냐 하면 돈 없이 값없이 살 수 있는 물. 예수께 나오라는 거예요]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게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인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 수고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굉장히 세상 것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먹으면서 그런 것들을 내 인생을 채우면서 참 배부르다, 참 만족스럽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그건 절대 너희들의 배를 부르게 해주지 못하는 것들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왜 거기에 매진하고 있어? 왜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어? 왜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어?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의 우물이라는 거예요. 구원은 값없이 돈 없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거예요. 왜 거저 주어지는지 아세요? 너무 가치가 없어서? 아니에요, 너무 값비싼 것이어서,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고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것이라서 거저 주어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거저 주는 것입니다. 너무 값비싼 것이어서. 그게 바로 영생인 거예요.
그리고 아울러 하나님의 신부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하고 은혜로만 살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은혜로, 선물로, 공짜로 주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가 아무것도 보탤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근데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의 선물을 홀대해요. 왜냐하면 그게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생수의 근원이 자기 앞에 서 계신데도 세상의 우물 파는 데에 여념이 없는 거예요. 잠깐 눈을 들어서 쳐다보면 생수의 근원이 거기서 철철 넘치고 있는데 그걸 못 보기 때문에. 우물 파는 데에 여념이 없는 거죠.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셨어요.
렘 2:11-13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하나님 나라의 것을 무익한 세상의 것으로 바꾸었다는 거예요]
12.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13.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그게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 것들로 나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모든 행위가 우물을 파는 일인데 그것은 절대 물을 저축치 못하는 터진 웅덩이 같은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헛수고 하지 말아라, 얘들아. 나를 마셔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물에서 자기의 목마름을 해갈하려하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일갈인 거예요. 자기들의 힘으로 우물을 파려하는 자들, 자기들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행복과 만족에 도달하려 하는 이들은 두려워 떨라는 거예요. 그들이 바로 심판 받을 자들이며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부들은 하나님으로만 만족해야 되고 하나님으로만 행복해야 되는데 그들이 자꾸 다른 우물을 구하고 있다는 거예요.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고 고지를 점령하여 하나님 일에 보탬이 되려하고 신비한 현상을 앞 다투어 찾아다니죠.
믿음으로 깨닫고 믿음으로 볼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에는 관심이 없어요. 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아버지와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눈에 보이는 걸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신비한 현상들에, 기적들에 열광하는 거죠. 요즘은 은 이빨이 금이빨로 바뀌는 건 한물 지나갔어요. 요즘은 기도하면 손에 다이아몬드가 생긴 대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어요.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그 보다 더 귀중한 게 내 손에 주어진다 하더라도 거기에 관심이 없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 나에게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는데 그건 다이아몬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다이아몬드 같은 거에는 관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근데 믿음이 없는 자들이 그러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열광하며 쫓아다니는 거예요. 그 자들이 바로 세상의 우물을 추구하는 자들인 거예요. 생수의 근원인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 우물이라는 것은 다른 남편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지금 내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를 이 세상의 것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남편을 구해서 거기서 쾌락과 행복과 만족을 구하는 거예요. 그걸 뭐라 그래요? 간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성경에서 간음한 자를 돌로 때려죽이는 거예요. 그게 불신자니까.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모든 행위를 성경은 간음이라 그래요. 남편이 안 보인다고 해서 지금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쫓아다니는 게 눈에 보이는 세상의 남편을 구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간음이라니까요. 그게 영성 깊은 것이 아니라 그게 간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려죽이는 거예요. 간음이 다른 죄보다 훨씬 나쁜 죄라서가 아니에요.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아요. 그러나 그 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 안식일을 어기는 건 언약 밖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때려죽이는 거고 간음을 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으로 나의 만족과 행복과 구원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때려죽이는 것입니다.
고전 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어떤 때에 하루에 2만 3천명이 집단으로 간음한 적이 있었나요? 그 이야기하는 거 아니죠? 그죠? 민수기 25장 1절 이하에 기록된 사건을 인용해서 고린도교회를 사도바울이 지금 경고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모압을 지날 때에 그곳 모압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서 그들이 섬기던 이방의 신, 바알 부호를 섬겼죠? 그 때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내리셔서 2만 3천명이 죽었어요. 바울이 바로 그 우상 섬긴 일을 가리켜 간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때 2만 3천명이 죽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 삼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예요. 쉬운 말로 하나님이 아닌 나를 내 인생의 왕좌에 올려놓고 나를 위해 사는 모든 행위가 간음인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우상의 뿌리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 여러 가지 종류의 우상이 있지만 그 우상의 뿌리는 바로 ‘나’거든요. 그러니까 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은 전부 간음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자들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에 신부인 교회가 결국 참 생명수의 소중함을 깨닫고 성령과 함께 소리 높여 이렇게 외치죠.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누가 외치는 거예요? 교회가 외치는 거예요. 신부가 외치는 거예요. 우물가에서 신랑을 만난 그 신부들이 외치는 거예요. 나도 우물물을 뜨러 갔다가 예수를 만났어. 진짜 우리의 목을 해갈해줄 수 있는 건 예수 그리스도야. 그러니까 세상아 들어라! 생명수를 마셔야 된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걸 깨달은 자들인 것입니다. 교회가. 구원은 그렇게 우물에서 기다리고 계신 우리 신랑의 은혜로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목마름을 영원히 해갈하고 무저갱 같은 외로움과 공허를 메워줄 수 있는 유일한 거예요. 그래서 그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랑이 그 우물을 막아서신 거예요. 이 우물물 아니야, 생수가 있단다. 거기에 관심을 가져, 라고 그 우물을 막아서 그 신부를 기다린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절기 때마다 이스라엘에게 무교병을 먹게 하셨는지 아세요? 무교병은 누룩이 들어가 있지 않는 떡을 말하는 거예요. 누룩은 인간 측에서의 노력이나 열심,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게 누룩이에요.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얻어지는 이 세상의 힘으로 절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가르치시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가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아세요? 화목제에요.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는 데에는 반드시 우리의 죄가 되셔서, 우리의 죄가 뭐에요? 누룩. 누룩이 되셔서 떡 속에 들어간, 그래서 우리를 살려낸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하나님과 우리가 회목 되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때만, 화목제 때에만 누룩 들어간 떡을 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누룩은 천국을 완성하시는, 우리의 죄가 되셔서 천국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 측에서의 공로나 노력, 죄와 자기 의 등을 상징하는 이중적인 상징물인 거예요.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누룩을 조심하라 하시는 반면에 천국은 누룩과 같다, 라고 다소 모순이 되는 듯한 인용이 등장을 하는 거예요. 성경은 후자를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불러요. 그것은 자기 자랑과 자기의 배를 위해 내어놓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까지 포함한 인간 측에서의 열심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이에요. 주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왜식이라고 한 마디로 규정을 하세요.
눅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잘 기억하세요.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외식이에요. 외식이 뭐라 그랬죠? 제가 전에 한 번 설명해드렸죠? 밖에 나가서 밥 먹는 거 말고. 겉과 속이 다른 걸 외식이라 그러나요? 그걸 위선이라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가족들을 위해 나가서 열심히 일하는 건 겉과 속이 다르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성실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에게 커피 한 잔 타다주면서 평안하시죠? 이렇게 인사하는 거는 겉과 속이 다른 게 아니에요. 그거는 용서라고 이야기하는 거고 순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겉과 속이 일관성이 있어, 그래서 미운 사람은 무조건 가서 두들겨 패는 거는 그걸 선이라고 하지 않아요.
외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기와 자랑과 배를 위한 모든 종교행위를 모함한 모든 행위, 그걸 외식이라고 해요. ‘나’를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 그걸 외식이라 그래요. 그러한 외식은 반드시 사람들의 눈을 세상으로 돌리게 만들어요.
마 16:6-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7.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 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9.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떡 일곱 개로 사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11.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서로 의논했다, 라는 말이 나오죠? 거기에 쓰인 단어 디아노기조마이, 라는 단어는 논쟁하다, 다투다, 싸우다 이런 뜻이에요. 제자들이 세상의 떡 한 덩이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거예요. 이 이야기의 배경을 잠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칠병이어로 또 사천 명 먹인 거 아시죠? 그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후에, 남자만 사천 명이에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부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또 보여 달라, 라는 요구를 받아요.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도 그랬죠?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이미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으로 오게 될 구원과 영생에 대해 거기 모인 무리들에게 표적을 보이신 거예요. 뿐만 아니라 그 표적의 의미까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어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은 만나가 바로 하늘의 떡인 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라고 말씀해주셨고 이 세상의 떡은 사람들의 배를 잠시 부르게 할 수는 있지만 곧 다시 배가 고프게 되는 것이니 만큼 너희들은 하늘의 떡인 나를 먹어라. 그래야 영원히 굶주리지 않을 수 있어. 그래야 천국의 행복을 맛볼 수 있어, 라고 그렇게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른 화끈한 표적을 구했던 거예요.
그 때 주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요나의 표적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나가 니느웨라는 야만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에요, 그 야만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삼일간 물고기 뱃속에서 갇혀있다 나와서 니느웨가 구원을 받는 그 이야기를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 모든 표적,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했던 모든 기적, 모든 표적이 전부 그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했던 표적이라는 거예요.
그 요나의 에피소드는요 요나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물에다 빠트리고 물고기의 먹이로 주었다가 회개하는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그를 풀어주신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구원해낼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에피소드인 거예요. 그래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이건 하나님의 벌이야, 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고난, 수난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하고 자기가 물고기 뱃속에 삼일 간 갇혀있었던 그것을 갖다가 스올의 뱃속에 있었다, 음부, 지옥에 있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삼일 간 무덤 속에서 지옥을 경험하시고 난 다음에 부활하셔서 니느웨 사람들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게 된 그 사건을 상징적으로 메라포 하고 있는 거예요. 비유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욘 2:2-3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주께서 나를 깊음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그죠? 요러한 단어들이 바로 그 구속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속사를 힌트하고 있는 거예요. 스올, 수난, 고난 이런 것들이요.
구원은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주어지게 되는 거예요. 신랑이 기다리고 있다가 신부를 덥석 안아버리는 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꾸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을 친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주님의 표적이 담고 있던 그 구원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기적들로 자기들을 만족시켜달라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거예요. 그건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마음 속 깊이 깨달은 사람은 절대 눈에 보이는 기적에 흔들리지 않아요. 아주 무관심하게 돼요. 왜냐하면 자기 속에 깨달아진 복음처럼 큰 기적이 이 세상에 없거든요. 근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고 쫓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믿음이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부복하고 순종하는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그러한 신부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힘과 노력을 보태서 자기들이 원하는 이 세상의 우물물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야망에만 불타고 있었던 거예요. 그 때 주님께서 그들을 피해 도망을 가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근데 그 상화에서 제자들까지 떡 한 덩이를 갖고 다투고 있었던 거예요. 세상의 떡을 가지고. 그러니까 주님이 속이 얼마나 터지셨겠어요? 긴 여행을 떠나야 되는데 제자들 중에서 음식을 준비해온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당시 히브리사람들은 여행을 갈 때 항상 그 여행 기간에 맞는 음식을 준비해가지고 갔단 말입니다. 근데 한 사람만 떡을 준비해갖고 왔어요. 그게 누구인지는 성경이 밝히고 있지 않아요. 누군가가 자기가 먹을 떡 한 개만 달랑 들고 배에 탄 거예요. 칠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 무려 떡이 일곱 광주리가 남아있었습니다. 근데 그 중에 딱 한 개만 들고 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 제자들이 그 사람을 보고 떡 한 개가 뭐냐? 가져오려면 많이 가져오지. 우리는 잊어버려서 그렇다 치고 너는 잊어버리지 않고 떡 한 개는 챙겼잖아. 그러면 우리 숫자대로 챙겼어야 될 거 아냐? 이런 식으로 다툼을 벌였단 말에요. 그때 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강조했겠죠. 내가 왜 니들 꺼 까지 챙겨야 되냐? 그렇게 떡 하나 갖고 다투고 있을 때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희들까지도 떡 갖고 싸우고 있니?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해라. 그랬더니 이 제자들은 거 봐라, 네가 떡 하나밖에 안 가져오니까 우리 주님도 누룩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냐? 이렇게 또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여튼 웬수들은 항상 곁에 있어요. 아무리 설교를 해도 못 알아듣고 말이죠.
주님께서 그렇게 세상의 떡을 두고 걱정을 하고 서로를 향해 책임전가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세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니까, 라고 이야기하신단 말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외식하지 말아라, 란 뜻이라 그랬어요. 외식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같은 말이라고 했으니까. 외식이 뭐라 그랬죠?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힘을 삼아서 그것의 유무로 일희일비하며 사는 것, 그게 많으면 좋아하고 그게 없으면 슬퍼하고 하는 그러한 삶, 그게 외식이란 말에요. 이 세상에서의 자기 배만을 위해 사는 것, 그것을 외식이라 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요즘 마로 쉽게 의역을 하면 너희들의 육신의 배를 위해서 이 세상의 떡이 마치 너희들 인생의 목적인냥 소란 떨지 말아라, 란 뜻이에요. 너희들에게는 진짜 중요한 것이 있는데 왜 그것을 보지 못하고 그 떡을 갖고 떠 싸우고 있어?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어차피 인생의 목적이 자신들의 입신양명과 자기들의 인기와 자기들의 자랑이기 때문에 하늘의 떡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의 떡을 또 만들어보라고 요구를 한 거예요. 그건 이해하겠어요.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을 피해 도망가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 역시 영생의 떡으로 오신, 영원한 생수로 오신, 자기 앞에서 이 세상의 떡 하나를 갖고 여전히 다투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보았어요. 오병이어로 수만 명을 먹이고 칠병이어로 수만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 일곱 광주리가 남았던 걸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에 타서 떡 하나를 보고서 그거 갖고 싸우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이 그 외식, 바리새인들의 누룩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너희들은 죽는 날까지 그 떡 한 덩이로 싸우게 될 거야. 그러니까 그거 조심해,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건 교회에게 경고하는 메시지인 거예요. 그러니까 누룩,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그 왜곡된 구원관을 조심하지 않으면 자꾸 우리는 우리 손에 들린 세상의 떡에 눈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인 거예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 뭐에요? 그들의 교훈이 뭡니까? 그게 외식이며 그게 누룩이니까. 유대주의, 율법주의. 그게 오늘날 어떻게 변질이 됐어요? 기복주의, 신비주의, 성공주의 번영의 신학, 고지론. 이렇게 바뀐 거 아닙니까?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세상의 떡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그들의 목적이 뭐에요? 그거니까, 세상의 번영이니까. 세상의 떡이니까. 그렇잖아요? 주님이 이렇게 경고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건 아니라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외식, 그거 조심해라, 라고 말씀하셨다고요. 근데 조심해라, 고 했더니 그걸 꼭 붙들고 있어요, 어떻게? 교회가?
그런 사람들은요 경건한 종교행위까지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해요. 그러니까 그들의 삶 속에서 나오는 경건의 행위는 역시 외식인 거예요. 주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을 뭐라고 저주하셨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그랬다고요. 그러니까 자기를 위해, 나의 유익과 나의 번영과 나의 질병치유, 내 자식들의 번영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놓는 뭐 새벽기도, 백일기도, 천일기도, 헌금, 봉사, 구제 다 뭐에요? 외식이에요. 뱀들이에요. 독사의 새끼들인 거예요. 여러분 예배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뱀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상상해보세요. 근데 그런 경우가 왕왕 있지 않아요? 심각한 거죠.
딤전 6:3-5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진짜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뜻이에요]
4.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경건조차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투자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요렇게 내가 경건을 투자하면 하나님이 더 많은 이 세상의 것으로, 이 세상의 보물로 나를 채워주겠지, 라는 고런 심보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까지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악당들이. 그래서 제가 겉으로 드러난 경건의 모습과 도덕적 윤리적 삶의 양으로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을 드린 거예요. 신앙인들 중에 죽는 날까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하나도 나타내지 못하고 죽는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그의 환경과 성품상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숙한 삶을 많이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닌 거예요. 그런 경건한 삶도 자기 유익의 재로로 사용되는 경건이 있다니까요. 신앙의 핵심은 자기부인이지 내가 얼마만큼 많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느냐, 가 아닌 거예요. 내가 얼마만큼 그분 앞에서 무력한 자로, Nothingness, 하벨로 자리하느냐? 그것이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경건을 내어놓는 자들의 열심이 교회 안에 뭘 만든다고 그래요? 다툼 교만 변론 언쟁 투기 분쟁 훼방 이런 걸 낳는대요. 그래서 예배당 안에 그렇게 다툼이 많은 거예요. 분쟁이 많고 훼방이 많은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불신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성도인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어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그거를 잘라내는 거예요. 그게 신앙생활인 거예요. 나만을 위해 살던 이 육신의 껍데기, 그 집착 중독을 하나하나 끊어내는 거. 그리고 결국은 이 옛 몸뚱아리를 부인하고 기각해버리는 게 신앙의 핵심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유익을 위해 그런 것들을 자꾸 포장을 하고 그러다 보면 여기에서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차피 그 경건도 나의 자랑과 나의 인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그 경건으로 다른 이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 많이 아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 비수로 꽂혀지는 거예요.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는 게 다른 사람 가슴에 비수로 꽂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는 거예요.
마 23:2-5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뭐에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인기 얻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를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 그래요. 그게 외식인 거예요. 주님이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그러면서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바리새인들이 진짜 행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에요. 열심히 행했어요. 그것도 목숨 걸고 행했어요.
여러분 바리새인들은요 남의 집에 가면 밥도 안 먹었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내놓은 식량이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안 내고 한 밥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이 가져간 식량 있죠? 십일조 뗀 식량. 그걸로 자기들끼리 밥 해먹었다니까요. 하나님 앞에 죄 안 지을라고. 안식일 날 적군이 칼 갖고 쫓아오면요 뛰지 않았어요. 안식일 지킬라고. 목숨 걸고 지킨 거잖아요. 근데 주님이 뭐라 그래요? 저희들은 아무것도 안 했대요. 그 말은 뭐에요? 자기를 위해 한 모든 종교행위는 하나님 앞에 하나도 카운트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거 본받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종교행위?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카운트 안 된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우리는 내 손 안에 있는 떡에 눈이 가게 되는 거고 그 떡이 부족할 때 불안해지고 그 떡이 많을 때 교만해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반복해서 죽자, 힘 빼자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신앙의 핵심이라니까요. 그게 목적이라니까요. 우리 성도의 인생의 이유이며 신앙생활의 본질인 거예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세상의 떡을 쫓아서, 세상의 우물물을 쫓아서 야곱의 우물가로 향하고 있던 그런 자들이에요. 그런데 그곳에 우리의 참 신랑이신 언약의 후손 예수가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우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는 우리에게 하늘의 생수를 쏟아부으시고 하늘의 떡인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먹이신 것입니다. 뚫고 들어와서. 그래서 우리는 작은 예수들이 된 거고 영생의 물을 마신 이들이 된 거예요. 그 은혜를 우리 인생 속에서 옛 몸뚱아리를 입고 하나, 하나 벗겨가며 실지로 경험하는 거예요. 그게 인생이에요, 그게 신앙생활인 거예요, 그게. 거기에 우리가 보탤 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도 거기에는 소용이 없어요.
근데 그 신랑이 리브가와 라헬과 십보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를 이 세상 아비 집에서 이끌어내서 약속의 땅으로 끌고 가세요. 그 길에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조금씩 드러나는 거예요. 왜? 거기로 가면서 내가 살던 터전과 옛 자아가 기각이 되면서 내 안에 있는 예수가 조금씩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딴 길로 갈 수도 없어요. 세상의 누룩을 버리고 선한 목자이시며 선한 신랑이신 당신의 뒤를 순종으로 쫓아오라고 우리의 코를 딱 꿰어서 우리를 끌고 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그 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힘을 빼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걸음을 옮기는 거예요. 그리로 가는 길에 주님이 사랑하라, 하시면 사랑도 해보고 용서하라, 하시면 용서하면서, 참아라, 하시면 참으면서 섬기라, 하면 섬기면서 가보는 거예요.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어요. 더딜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주님이 이끄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도망을 가고 싶을 때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신랑은 당신의 목숨을 주고 우리를 샀기 때문에 절대 우리를 포기 못해요. 끝까지 우리를 쫓아오셔서 우리를 끌고 다시 제 길로 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길로 갈 수도 없어요.
우물가에 선 언약의 후손에 의해서 언약 속으로 들어오게 된 라헬과 레아를 보세요. 그들이 금방 언약 적 삶을 내놓지 못했어요. 그들이 자식 낳기 경쟁한 거 아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끌고 언약의 땅,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귀한 하나님 백성으로써의 레아와 라헬을 만들어 가시면서. 그게 성도의 삶인 것이며 구원의 여정인 거예요.
신앙의 본질은 내가 누구인가를 깊이 자각하고 깨달아서 나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 자리를 찾는 거예요.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내 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분 앞에서 나는 피조물에 불과한 나약하고 불가능하고 무력한 존재일 뿐이구나! 를 알고 내려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어떠한 존재로 나를 만드셨으며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는지 올바로 인식하고 그분 앞에 순종하는 자로 서면,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그 구원의 완성지점을 향해서 한시적으로 쓰이는 무대장치일 뿐이에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그 무대장치에 올인 해버리시면 안 돼요. 그 무대장치에 자꾸 금칠하려고 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마귀는요 아무 교묘한 방법으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줘요. 세상의 우물물도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교묘하게 희망과 기대를 심어줘요.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을 불멸과 영생의 땅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어요. 잘 들으셔야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우리가 좀 전에 찾아서 읽었던 마태복음 16장에 바리새인들의 누룩 이야기 바로 앞에 이런 구절들이 붙어있어요. 연결해서 한번 보세요.
마 16:1-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너희들이 예견하는 게 진짜로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너희들은 진짜, 보이지 않는 그 세계는 전혀 예견할 수 없구나? 예견하지 못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미 경험하고 계시는 것처럼 인간들이 예측하고 예견하는 것들이 하나, 하나 들어맞아가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미래 학자들이 몇 년 전에, 한 십 수 년 전에 예견한 것들이 지금 90% 이상 현실로 드러났어요. 화상전화, 인터넷, 인공장기. 이런 것들,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거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나 핸드폰 하나만 갖고 있으면 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얼굴을 보면서 통화를 할 수가 있어요. 이제는 휴대폰 하나만 갖고 있으면 은행 거래를 전 세계 어디를 돌아다녀서 할 수 있는 시대가 곧 온다, 그래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이 시대는 빨리 흘러가고 있어요. 엘빈 토플러 같은 미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이런 사람들이 예견해놓은 것들이 90%이상 적중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건 단지 공상과학 만화나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것들이 아니에요.
최근에 제가 읽은 책 중에 특이점이 온다. The Singularity is near 란 책이 있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걸출한 미래학자가 쓴 책이에요. 몇 사람에게는 제가 사서 나눠줬는데 그 커즈와일, 그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사람은요 13개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고요 토마스 에디슨의 적자라는 평을 들을 만큼 무수한 발명품을 만들어낸 사람이에요. 그리고 과학기술을 근거로 해서 정확한 미래 예견으로 월 스트리트 저널이나 포브스 PBS 같은 그런 언론기관으로부터 미국을 만든 열여섯 명의 혁신가들 중에 한 사람으로 뽑혔어요. 그리고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천재, 궁극의 사고기계, 하여튼 사고를 하는 모든 존재들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이란 뜻이에요, 그런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이에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제 3의 물결의 그 엘빈 토플러가 가장 신뢰하고 칭찬하는 미래학자이기도 해요. 그가 그 Singularity is near 라는 책에서 주장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제 3,40년 후면 인간이 죽음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의 과학기술의 수준과 발전 속도를 감안해서 볼 때 The Singularity, 특이점이라 그러죠? 그 Singularity, 기술 변화의 속도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지게 되는 그 어떤 지점을 Singularity 라고 하거든요. 그 지점이 오게 되기 때문에 이제 그 지점이 지나가게 되면 인간은 이제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로와질 그 날이 온다는 거예요. 그러한 그의 주장은 허무맹랑한 그런 주장이 아니에요. 그의 주장은 수학 가속의 법칙, 아시죠? 수학 가속의 법칙에 근거한 아주 과학적인 거예요. 무어의 법칙을 조금 확대 해석한 거예요. 그런 특이점, Singularity가 지나고 과학기술 수준이 상상할 수 없이 깊어지고 그 진보 속도가 빨라지게 되면 이제 인간들은요 인간의 뇌를 기계에 업로드 하는 방식으로 뇌 패턴을 보존하고 전승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래요. 지금도 거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단 말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육신에 무슨 사고가 생기면 그 인간의 뇌를 기계에 업로드 해서 다른 기계적인 몸으로 환생할 수도 있고 심지어 수십억 개의 보이지 않는 나노 로봇을 인간의 몸속에 집어넣어서 인간의 생물학적 노화를 막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럼 그게 사람이에요? 로봇트에요? 그게 헷갈리는 시대가 온단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튜링 테스x,, 엘런 튜링이 만든 그 튜링 테스트라는 거 아시죠? 로봇의 지능을 검사하는 거. 그 튜링 테스트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인식과 판단과 추론과 문제해결 능력,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AI 인공지능이 등장을 해서 인간의 지능과 결합을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온다, 라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는 폭발적으로 더 빨라지게 될 거고 그 때부터 인간의 죽음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 되는 거고 기술과 정보의 가격대 성능비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을 할 것이기 때문에 모든 기술들이 아주 싸져서 빈부의 격차까지도 없애주는 아주 살기 좋고 행복한 지상낙원이 도래할 거라는 거예요. 그렇게 될까요? 과연 그러하니라. 그게 가시적으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게 진짜 좋은 세상입니까? 주님은 그랬어요. 과연 그러하니라. 너희들이 예견하는 거?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복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왜 빈부의 격차가 이렇게 심하게 나죠? 돈 있는 사람들이 기술과 정보를 먼저 선점하고 독점하기 때문에. 근데 그게 너무나 싸지고 보편적이 되어지면 빈부의 격차도 없어진다는 거예요. 레이 커즈와일이 하나 놓친 게 있는데 인간의 죄 성이라는 거예요. 죄인 된 인간들은 절대 그러한 상황이 와도 자기를 이 세상 꼭대기에 높여놓고 싶어 하지 다른 이들과 절대 나누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뇌가 사이보그처럼 컴퓨터의 지능과 결함을 해서 무엇이든지 척척 풀어내는 그런 지능이 되는 거. 여러분 좋으십니까? 우리의 몸이 수십억 개의 나노 로봇으로 가득 차서 생물학 적인 나와 기계적인 나가 결합이 되어서 인간도 아니고 로봇도 아닌 사이보그가 되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거. 그게 행복하세요? 그 때가 되면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몸을 선택하여 취할 수도 있게 된다고 그래요 왜? 기계에 업로드 된 나, 뇌가 다른 몸을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그 몸에다가 너무 돈 들이지 마세요. 나중에 저 김종국이나 비 같은 몸을 싼값에 살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게 ‘나’입니까? 여러분?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그렇게 치부해버리시면 안 돼요. 그런 시대가 여러분이 살아계신 인생 동안에 도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들이 뭐 수 천 년을 살게 되고 또 엄청난 지능을 소유하게 되고 또 어마어마한 힘을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전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이야기해요. 그렇게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 영생불사하게 되어서 일어나면 좀비처럼 다른 사람들의 피를 뽑아 나의 인기와 자랑을 위해 살게 되는, 그러한 나라가 뭐에요? 지옥인 거예요. 이 웬수들은 죽지도 않아. 근데 그 죄성을 끝까지 소유하고 있으면서 남들을 밟고 올라서야 돼요. 거기에다가 하나님이 불만 살짝 보태는 것을 지옥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옥은 죄인들이 스스로 지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지 하나님이 처넣는 게 아니에요. 그러한 삶, 그거는 궁극적인 하나의 결국이지만 지금 그 삶과 방불한 삶을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지옥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자로 대우해주기 위해서 로봇트로 안 만들고 인간으로 만들었더니 인간들 스스로가 영생불사의 로봇이 되고 싶어 해요. 스스로 지옥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는 거예요, 지들끼리. 주님은 말씀하세요. 그건 세상의 우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너희들이 원하는 거, 영원히 살게 되고 놀라운 지능을 갖게 되고 엄청난 몸짱, 얼짱이 돼서 가난도 없는 그런 곳에 그래, 살고 싶으면 살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살아봐라, 라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천국인지. 사단은 끊임없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안들을 세상에, 역사 속에 던졌어요. 공산주의가 칼 막스에 의해서 이 세상에 던져졌을 때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과연 그러하니라, 열광했습니다. 지상낙원이 올 거라고 열광했어요. 그렇게만 하면 지상낙원이 올 거야. 모든 이들이 동일하게 일하고 동일하게 나눠 갖는데 왜 지상낙원이 안 와? 와야지. 공산주의자들이 놓친 게 뭐에요? 인간들의 죄 성입니다. 인간들은 자기의 유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절대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자기의 자랑과 인기를 위해 또 다른 계급을 만들어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과연 그러 하니라’에서 일억 명의 무고한 자들의 희생을 내고 역사 뒤로 사라져가고 있는 거예요. 일억 명. 지상낙원이 아니라 일억 명이 죽었어요. 세상의 우물이 만들어내는 것은 그런 거예요.
주님이 그걸 막아서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원하는 게 이거야? 영원히 살고 싶어? 병 낫고 싶니? 강해지고 싶어? 더 높아지고 싶어? 그렇게 살게 해줄게. 그러나 거기가 지옥이란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렇게 영생불사의 꿈을 꾸는 자들의 삶 속에서 죽음을 준비하라는 거예요. 다른 세상을 준비하라, 라는 거예요. 그걸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전부 강해지기 원하고 전부 이뻐지기 원하고 잘 생겨지기 원하고 강한 힘을 갖기 원하는데 너희들은 거기에서 내려와서 다른 세상을 준비하라는 거예요. 세상의 우물물이 아닌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생명수!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들의 가슴속에 뻥 뚫린, 무저갱 같은 공허와 심심함과 무료함 외로움 채울 수 없어요.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아셔야 돼요. 예수를 배우셔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만 평안과 안식과 기쁨과 행복이 주어질 수 있어요. 세상이 아무리 바리새인들의 누룩으로 여러분을 미혹한다할 지라도 거기에 속지 마십쇼. 오히려 그러한 때에 더욱 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들고 우리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신랑을 쫓아서 그 영생불사를 쫓는 세상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되는 거예요. 힘들 거예요. 외로울 것입니다. 나그네의 길이고 이방인의 길이니까. 그래도 가야 되는 거예요. 세상의 우물가에서 그 우물물을 부정하시고 하늘의 우물물을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우리의 신랑이 주시는 진짜 생수를 마시십쇼.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