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 추억
유태용
요 며칠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나뭇가지 끝에 애처롭게 달려있던 나뭇잎도 떨어진 걸 보니 겨울이 우리를 찾아온 게 분명하다. 이맘때면 집집마다 김장한다고 시끄러울 텐데 올해는 조용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시골에 사는 형수가 김장했으니 김치 가져가라고 연락이 왔는데 올해는 아무런 소식이 아직 없다. 지금은 형님 내외분만 있으니 옛날 같은 김장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김장은 한 해 농사라고 했다. 모두가 어려웠던 때라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김장해 긴긴 겨울을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김장 김치만 있으면 다른 반찬이 없어도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울 뿐 아니라 김치를 먹어야 밥을 먹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은 밥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치와 밥은 환상적인 조합이다.
김장하기 며칠 전부터 어머니는 하나하나 준비를 했다. 처음은 시장에서 알이 꽉 차고 배춧잎이 싱싱한 배추를 사는 일이다. 식구가 대식구라서 다른 집 보다 배추의 양이 많다. 배추 200포기를 리어카에 싣고 와서 집 마당에 쌓아 놓으면 웬 산이 솟아 있을 정도로 높아 보였다. 무,파, 그 외 여러 가지 채소도 함께였다.
그다음은 양념 재료를 준비하는데 동네 방앗간에서 빻은 고춧가루는 그 빛깔이 너무 선명하여 물감으로 염색한 것 같았다. 마늘은 단골 아줌마한테 미리 부탁하여 씨알 굵은 것으로 몇 접을 사서 우리한테 까라고 했다. 마늘이 매운 것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식구가 많은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그 많던 마늘을 몇 시간 만에 다 깠다.
어머니는 우리가 학교 가지 않는 일요일을 택하여 김장 날을 잡았다. 며칠 전부터 숨을 죽였던 배추를 꺼내 물로 씻어 소금기를 빼내는 작업이다. 형님과 나는 물지게로 물을 길어 날라야 했다. 우리 동네는 수도시설이 돼 있지 않아서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식수로 먹을 때는 다섯 지게 정도면 커다란 물단지가 가득 차서 일주일 정도는 너끈히 먹을 수 있었다.
형님이 두 번 물을 길어 오면 나는 한 번꼴로 물을 길어 날랐다. 초등학교 시절인데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신기했다. 처음에는 식수 정도 양이면 배추를 다 씻지 않을까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배추를 한 번만 씻는 게 아니고 몇 번을 헹궈 내는데 물 길어가는 형님도 지치고 나도 지쳤다. 어머니가 “힘들면 쉬어 가면서 해라. 김치 담글 때는 쉬엄쉬엄하는 거란다.”하고 말을 한다.
다 씻은 배추를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 놓으니 뻣뻣하던 배춧잎이 시계추처럼 헤벌려졌다. 어머니는 큰 솥에다 찹쌀과 밀가루를 섞어서 죽처럼 만들어 식힌다. 미리 준비했던 고춧가루, 마늘, 생강, 멸치젓 등을 넣고 같이 섞는다. 붉은 용암 같은 모양이다. 어머니가 손가락으로 맛을 보면서 “간이 맞는구나” 한다.
어머니가 소금기가 빠진 배추를 한 포기 들고 시범을 보인다. 배춧잎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양념을 정성스럽게 바른다. 누님, 형님, 나도 어머니 따라 양념을 바르는데 어떤 배추에는 양념이 많이 발리고 어떤 배추는 양념이 발리지 않아 배추가 밭으로 찾아갈 것 같았다. 태산같이 높이 쌓여 있던 배추도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었다.
몇십 년 연례행사를 치러선지 어머니는 양념과 배추를 정확히 맞췄다. 어린 우리 눈에는 신기하게만 보였다. 김장하기 며칠 전부터 마당 가에 파둔 구덩이에 커다란 김칫단지를 파묻었다. 양념이 끝난 배추를 한 양동이씩 담아서 단지로 옮겼다. 김치 단지가 배가 불룩 한 게 내 눈에는 내가 들어가도 될 정도로 컸었는데도 김치는 한량없이 들어갔다.
김칫독에 어느 정도 김치를 채우신 어머니가 남은 배추와 껍질 들을 빨랫줄에 너신다. 햇빛에 잘 말려서 오래 저장하면 긴긴 겨울 좋은 반찬이 된다고 한다. 동네 애들과 놀다 온 동생들도 전부 모이면 오늘 하루 김장하는데 열심히들 어머니를 도왔다고 언제 삶았는지 모르는 돼지고기와 갓 담은 김장 김치와 하얀 쌀밥을 저녁 식탁에 올렸다. 물을 길어 나르느라 힘이 빠졌던 나와 형님은 머리를 식탁에 박고 옆도 보지 않고 연신 숟가락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장이 끝난 한 달간은 김치가 유일한 반찬이다. 다른 반찬이 없어도 밥은 꿀맛이었다. 지금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는 것도 어머니가 맛있게 담아준 김장 김치 덕분이 아닌지 생각이 든다.
11월 22일은 ‘김치의 날’이란다. 대한민국 법정기념일 중 유일하게 음식이 주인공인 날이다. 우리 민족의 밥상에서 김치가 가진 위상과 의미는 그만큼 큰 것 같다. 11월 22일이란 날짜에는 배추, 무, 마늘 등 김치 재료 하나하나(11)가 모여 면역증진, 장내 환경 개선, 비만. 노화 방지 등 22가지 이상의 건강 기능적 효능을 갖는다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최저기온이 섭씨 0도 이하인 날이 지속되거나 하루 평균 기온이 4도 이하를 유지할 때가 김장 최적기다. 11월 중반부터 12월 중순까지 전국에서 김장 김치를 담그는 이유다.
그러나 코로나를 계기로 김치를 담가 먹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경향이다. 코로나로 사람들 모이는 것을 금지하니 가뜩이나 김치 담그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껴오던 젊은이들은 집에서 김치를 담그지 않고 온라인이나 마트 등에서 사 먹는 것을 더 선호한다.
시대가 변했다. 유행도 변했다. 우리가 자라던 때를 따라오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신선한 채소가 부족했던 겨울을 나기 위해 조상들이 고안해낸 김장 풍습인 만큼, 채소를 사시사철 구할 수 있는 요즘에 구태여 김장을 해야 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다. 겨우내 먹을 김치를 마련하기 위한 김장은 더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김장이 하나의 축제로 문화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찬바람 불어올 때쯤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온 가족이 하루 모여 놀이하듯 배추 서너 포기쯤 김치를 담근다. 돼지고기 삶고 굴도 마련해 보쌈도 해 먹고 손자 손녀들과 즐거움을 공유하는 축제가 되었으면 한다.
※ 제대로 된 김장 김치 맛을 보려면 배추는 5번 죽는다
첫 번째 : 땅에서 배추가 뽑힐 때
두 번째 : 부엌칼에 의해 통배추의 배가 허옇게 갈릴 때
세 번째 : 소금에 절여질 때
네 번째 :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될 때
다섯 번째 : 장독에 담기고 그늘진 땅에 묻힐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