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를 들라, 속량이 가까웠으니.
25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장)
징조들 (25절)
가을 내내, 나뭇잎이 물들고 마르고 떨어졌습니다. 낮은 짧아지고 어둠은 깊어졌습니다. 기온은 차가워져, 서리가 내리고 첫눈이 왔습니다. 이 시기에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누구나 보고 경험한 풍경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이런 현상은 보이지 않는 실상을 가리킵니다. 겨울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어떤 보이는 현상이나 사건이 보이지 않는 실체나 의미를 가리킬 때, 그것들을 징조(sign, 표적, 이적)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신앙공동체가 겪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많은 유대인이 이들을 추종했다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21:8). 두 번째, 이들이 로마를 상대로 성전(聖戰)을 벌였는데 얼마 후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수년 간의 유대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21:20). 긴 전쟁은 기근과 굶주림과 전염병을 수반했고(21:11), 예루살렘은 짓밟히고 유대인들은 살육당했습니다(21:23-24).세 번째, 박해가 일어나 교회는 배척당했고 그리스도인들은 붙잡히고 추방되는 등의 고통을 겪었습니다(“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21:12).
종말의 징조인가?
이런 일련의 현상들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어서, 해와 달이 가려지고, 별들이 떨어지며, 지진과 해일이 덮치는 우주적 재앙으로 비유됩니다(25절). 전쟁에 참여한 유대인들은 이 격난들을 두고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징조라고 주장했습니다(8절). 대다수 유대인이 이에 동조하면서 “종말의 징조”라고 여겼습니다. 당시를 살아가던 예수 공동체(교회)들은 이 난리가 정말로 끝의 징조인지를 분별해야 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형식으로 표현됩니다((7절).
그런데 예수께서는 다른 견해를 피력하십니다. 메시아로 자칭하면서 “때가 가까이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난다면, 이는 마지막 시대가 아니라 미혹의 시대가 되었다는 징조입니다(8절). 예루살렘과 성전을 둘러싼 전면적 전쟁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결말이 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20절). 추방당하고 옥에 갇히고 재판에 넘겨지는 등의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13-15절; 12:11-12).
인자가 오시리라 (27절)
하늘과 땅의 기이한 현상이나, 민족들 간의 전쟁, 기근과 재난 등의 경험은 “인자가 오신다”는 진실을 알려주는 징조들입니다.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인자가 오신다”는 말은 묵시문학적 표현(단7:13; 계1:7)으로써, 묵시문학에서 인자는 세상의 모든 불의와 소요를 잠재우고 최후 승리를 완성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확신하게 함으로써 불의와 싸우는 의인들을 격려하고 믿음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을 지닌 문학 양식입니다. 다니엘서(마카비 전쟁)와 요한계시록(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이 대표적인 묵시문학이며, 마태 24-25장, 마가 13장, 누가 21장은 유대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묵시록입니다.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인자가 오신다”는 표현은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말할 때, 교회 전통은 이천 년 전의 성탄 사건을 초림(初臨)으로, 훗날 마지막 날에 있을 인자의 오심을 재림으로 구분합니다. 그리스도 오심을 종말론적 재림으로 규정하는 전통적인 신앙은 전형적인 묵시문학적 이해입니다. 하지만 “재림”이라는 용어는 성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의 오심이 성서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6:18)는 식의 약속은 묵시문학적 ‘오심’과는 다릅니다. 요한복음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이심으로써 다시 오셨으며, 누가복음은 성령의 강림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보기도 합니다.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다”(마28:20)는 말씀에 비추어보면, 지금 여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와 계십니다.
머리를 들라, 속량이 가까웠다 (28절)
복음서들이 가장 강조하는 약속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31절)이자, 인자(그리스도)의 오심(27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모든 약속의 시작이자 성취이며, 이전 세상의 끝이자 새로운 출발입니다. 구약성서도 그리스도의 오심을 약속했고, 신약성서도 주님의 오심을 약속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고,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다시 오시리라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핵심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자의 오심은 미래의 마지막 사건만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이자 현재의 사건이면서 미래의 사건입니다.
주님의 오심으로 모든 것은 끝을 맞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오심으로 모든 것은 새 시작을 맞습니다. 끝이기에 종말이지만, 새 시작을 위한 종말이기도 합니다. 끝이라는 차원에서 심판이요, 시작의 차원에서는 구원입니다. 심판으로 맞는 이들에게는 두려운 일이며, 구원으로 맞는 이들에게는 기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징조들 속에서 ‘오시는 인자’를 예감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머리를 들라, 속량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속량(redemption)은 몸값을 지불하고 묶인 이를 해방해 주는 일로서, 구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 (29-30절)
구약성서에서는 예언자들이 징조를 봅니다(사13:9-10; 겔32:7-8; 욜2:30-31). 같은 징조가 신약성서에도 등장하고, 일식과 월식 유성 등의 하늘의 흔들림, 기근, 전쟁, 지진, 해일 등의 땅의 혼란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징조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우리 시대에도 부단히 목격됩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기후 변화’ 현상도 분명히 징조입니다. 말하자면, 징조는 마지막 때에 집중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수없이 반복된다는 얘기지요. 이것들이 끝과 시작을 가리키는 종말의 징조들이라면, 주님의 오심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종말론적 사건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지목하여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무에 싹이 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지만, 이 평범함은 여름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징조가 됩니다. 징조란 어떤 거대하고 특별한 현상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싹이 트는 평범한 사건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겐 여름(카이츠) 혹은 끝(케츠)이 가까이 왔다는 징조로 알려집니다. 달리 말하면, 특별하고 거대한 현상에만이 아니라, 일상 가운데 진리가 담기고 평범한 사건이 비범한 메시지를 품는다는 얘기입니다.
보라(29절), 알라(31절)
징조가 나타나는 때는 따로 없습니다. 잠들어 있는 이에게는 어떤 것도 징조가 아니겠지만, 깨어 있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징조입니다. 봄과 앎(깨달음), 깨어 있는 사람의 표식입니다. 본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현상을 감지하는 행위입니다. 반면에, 깨달음이란 아직 당도하지 않은,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인지하는 행위입니다. 보지 않고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고, 깨달음이 없다면 본다는 일이 헛됩니다.
징조가 없이 들이닥치는 사건이나 변화는 없습니다. 주님의 오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징조에 어두운 이들에게는 주님의 오심이 뜻밖의 사건이 됩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오심은 무서워하고 기절할 일(26절), 즉 덫과 같이 임하는(34절) 심판일 것입니다. 하지만 알려진 덫은 덫이 아닙니다.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만, 깊은 구덩이는 덫이 됩니다.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오심이 덫과 같은 낭패의 시간이겠지만,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오심이 구원의 때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그들에게 약속된 때이며, 그들이 기다려왔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34-35절)
주님의 오심이, 보고 깨닫는 이에게는 희망이며 섭리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당혹함이며 절망입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독수리는 눈을 뜨지만, 올빼미는 시력을 잃습니다. 아침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누구에게나 그 아침이 희망으로 밝아오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그 아침이 밤처럼 덮쳐올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모든 생명에게 축복된 순간이지만, 기다리지 않던 이들에게는 두려운 때가 될 것입니다.
“스스로 조심하라”(34절)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탕(먹음), 술 취함(마심), 생활(세상살이)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집니다. 염려는 기본적으로 두려움에 기인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방탕과 술 취함은 두려움을 잊어보려는 방편의 선택지입니다. 그러니 방탕함과 술 취함과 염려함 모두 두려움을 토양으로 삼아 자라난 양태입니다. 두려움이 생겨나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함에서 오는 결과이니, 그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으려고 애쓸수록 더 염려하게 되지요. 두려움이 신뢰로 바뀌어야 하고, 이는 봄과 깨달음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36절)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36절)는 명령도 주어집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행위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풍파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소한 일상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함으로써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섭리를 알게 됩니다. 작은 촛불 하나 켬으로써 큰 빛이 감지되는 것처럼, 기도는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주님의 오심을 깨닫고 그분 앞에 서는(36절) 경험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언제나 깨어 있는 일이 됩니다. 지금 여기를 꿰뚫어 보고 있는 상태를 깨어 있음이라고 합니다. 주님을 의식하는(기도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 서 있으며, 모든 현실을 꿰뚫어 보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일상을 평범하게 살면서도 마음이 둔해지지 않습니다. 또한 주님의 날이 뜻밖에 덫처럼 들이닥치는 일도 없습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까운 시간, 대림절의 시작입니다. 보고 있습니까? 깨닫고 있습니까?
https://www.youtube.com/live/Mg2RJpDOv9o?si=dTi6wLMCMYlg7gv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