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75) 구성과 리듬 - ② 행과 연과 제목/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
구성과 리듬
Daum카페/ 행과 연
② 행과 연과 제목
행과 연과 제목은 시의 구성요소들을 구현하는 특징적인 질료들이다.
이에 더해 차이성이 강조되는 현대시에 이르면 제목의 기능도 중요하다.
언어적 응축성과 개성의 발현 등 특성과 관련하여 현대시에서는
제목의 기능이 더욱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한편, 서사와 극(劇)은 대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등의 기본 구성 과정을 거치게 되고,
교술(敎述), 에세이, 평론 등은 대개 서론, 본론, 결론 등을 기본 구성과정으로 한다.
특정 상황과 사실을 다중화, 일반화하는 체계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대상을 일차적으로 내면화 주관화하는 서정문학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경과나 논리적 경위가 아닌,
내면적 심리적 과정을 표현한다.
때문에 현재적이고 순차적이며, 주관적이다.
그래서 시적 주체의 목소리는 시간(리듬에 의해)과 공간(이미지)이 통합적으로 어우러져
현재의 시점에서 주체적으로 구현한다.
짧은 시 한 편에서 이들을 확인해 보자.
어머니
아직 주무시지 못하신다
아직 세상살이 서툰
아들 빤히 지켜본다
―이상옥, 「별」 전문
단 두 연, 각 연은 각기 짤막한 두 행으로 짜인 단시(短詩)다.
1연은
어머니의 불면을 현재화,
2연은
말없이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시는, 언제나 무시간적인 어머니의 얼굴이다.
밤하늘의 별이 깜빡거리듯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잠들지 못하는 근심과,
자식의 서툰 짓거리를 빤히 알면서도 삭이며 기다려주시는 어머니이다.
주요 언어적 장치를 들자면 3음보 기본보격의 제 1행의 휴지(休止).
첫 행이 단 1음보로 끝남으로써 남게 되는 휴지의 여백이 함축하는 사모의 정,
여기까지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는 독자의 생각은 제목 「별」을 만나면서 변하게 된다.
제목이 불러일으키는 시적 긴장이 시적 장치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이 가상적 현재의 시간에서
행과 연의 리듬과 별의 이미지로 구현되면서 사모의 마음을 더하게 된다.
‘주무시지’, ‘못 하신다’, ‘세상살이’, ‘서툰’의 마찰음 시옷(ㅅ)이 불러일으키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마지막 어절 ‘지켜본다’로 이어지는 음성학적 효과도 설명될 수 있겠다. ‘
지켜보신다’를 시인이 ‘지켜본다’고 한 이유도 ‘지켜봄’의 강도를 순간적으로 강화하고자 함이었을까?
시란 가상현실의 체험과 문제를 의인화한다.
현재의 심정이 그 경험들에 변용의 불을 댕긴다.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경험들을 새롭게 선택하고 배열하여 시적 상황을 연출한다.
아내가 다림질하는 아침,
잠꾸러기가 되어본다
북북, 분무기 소리에 실눈을 뜬다
다리미는 나의 등을 여러 번 지나간다
부도를 맞고 처음 마련한 집에서 쫓겨가던 날
아내는 저렇게 내 등을 어루만지며 울었었다
뒤틀리고 주름진 팔로 수없이
다리미가 지나간다
놓칠 뻔했던 야윈 팔을 붙들고 여기까지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석회질로 굳어가는 뼈마디를 정성스럽게 편 아내는
옷을 훌훌 털어 돌리더니
이번엔 가슴에다 물을 뿜는다
웅크렸던 그늘 속이 더욱 서늘해진다
지나가는 아내의 손길마다 금세 훈훈해진다
기죽지 말라는 것일까
다리미 잡은 아내의 손목을 슬며시 쥐어본다
화들짝 놀라며
어머나! 이이 좀 봐, 주무시다 말고 왜 우시는 거에요?
숨죽이던 다리미가 뜨거운 입김을 토해낸다
―김팔영, 「나를 다리다」
아내로부터의 일상의 사랑에 가슴 저미며 새삼 울먹이는 가장의 내면을 토로하고 있다.
출근 시간을 앞둔 새벽, 아내의 다림질 분무기 소리를 들으며
아내의 손길이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지난날들을 생각한다.
부도를 맞고 살림집까지 잃었을 때도 진심을 다해 데워주던 동반자의 모습이 현재화된다.
다리미의 온도처럼 따뜻한, 아내의 사랑에 있음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다.
처음부터 외적 현실과 기억에 현재적 서정이 교차되다가 그들이 융합되기도 하는 구성이다.
짧지 않은 단연의 시이지만 그중에서도 짧은 행, ‘잠꾸러기가 되어본다’ ‘다리미가 지나간다’,
‘기죽지 말라는 것일까’, ‘화들짝 놀라며’ 등은 다른 행들에 비해 음보 수를 줄임으로써
휴지(休止)를 통한 이미지 전환의 효과를 얻고 있다.
이와 같이 내재율을 이용하는 자유시의 행과 연 배치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이에 비해 산문시에는 행의 구분이 없다.
서정과 서사의 교차, 환상이나 상상과 현실 또는 서정의 교차 구성은
오늘날 우리 시의 주요 구성 방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문의 길이와 호흡, 반복과 열거와 음운현상 등은 리듬을 주도한다.
연 구분이 있어 보이는 시도 있으나,
그건 연 구분이라기보다 산문의 단락(paragraph) 구분이라 보아야 한다.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먼 서역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뭘 쥐어 보낼까 궁리하다가 나는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녀석의 가슴 주머니에 무언가 뭉클한 것을 쥐어 보냈다. 이건 아무데서나 꺼내 보지 말고 누구에게나 쉽게 내보이지도 말고 이런 걸 가슴에 품었다고 함부로 말하지도 말고 네가 다만 잘 간직하고 있다가 모국이 그립고 고향 생각이 나고 네 어미가 보고프면 그리고 혹여 이 아비 안부도 궁금하거든 이걸 가만히 꺼내놓고 거기에 절도 하고 입도 맞추고 자분자분 안부도 묻고 따스하고 고요해질 때까지 눈도 맞추라고 일렀다 서역의 바람이 드세거든 그 골짝 어딘가에 몸을 녹이고 서역의 햇볕이 뜨겁거든 그 그늘에 들어 흥얼흥얼 낮잠이라도 한숨 자두라고 일렀다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도통 우러러볼 고지가 없거든 이걸 저만치 꺼내놓고 그윽하고 넉넉해질 때까지 바라보기도 하라고 일렀다 그 놈의 품은 원체 넓고도 깊으니 황망한 서역이 배고파 외로워 울거든 그걸 조금 떼어 나누어줘도 괜찮다고 일렀다. 그렇게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살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때는 무엇보다 먼저 그것부터 잘 모시고 와야 한다고 일렀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네가 바로 그것이라고 일렀다 이아비의 어미의 그것이라고 일렀다
―최영철, 「금정산을 보냈다」 전문
한 단락의 산문시 「금정산을 보냈다」는 과거형으로 쓰였지만,
역시 현재적 순간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한 단락의 산문과 변형 사설조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들이 오랜 기간을 예정하고 중동으로 떠날 가슴 주머니에 금정산을 쥐어 보냈다는 가상적 현재의 정황이다.
쥘 수도 만질 수도 없고 가슴 호주머니에 꽂을 수는 더욱 없는 금정산―
그것을 이별의 정표로 삼는 남다름(과장)이 이 글을 시이게 하는 출발점이다.
상상과 서정, 비현실과 현실이 교차, 통합되면서 호주머니에 산을 넣어주는 말 한 되는 상황을 실재화 한다.
금정산은 부산 사람들이 으레 찾는 산, 찾지 않아도 가까이 느끼고 사는 산이다.
시인은 가족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 되어온 금정산을 아들의 가슴에 담아준다.
금정산의 주관화, 무시간화, 인격화, 신성화이다.
너른 품의 자연이기도 하고, 가족이자 벗이며 마음의 양식(糧食)이기도 하다.
나아가 어떤 파국적 상황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힘이
이 산문을 시가 되게 하는 힘이다.
현대시란 비(非) 인과적이고 이질적인 체험의 산물이고 행과 연과 단락은
그것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배열의 질료들이라 할 수 있다.
화자의 말을 전하기 위한 환등기(幻燈機)요, 주제 음악이 셈이다.
「금정산을 보냈다」는 한 단락의 산문시로,
말하는 듯, 설명하는 듯한 사설조의 천연스런 리듬으로 금정산의 인간화에 이르고 있다 할 것이다.
행과 연과 단락의 구성에 모범답안은 없다.
시인에게는 첫 행 쓰기가 제일 힘들다고 한다.
시간이나 공간의 배경, 또는 주제를 암시할 수 있는, 첫 계기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어떤 행이든 중요하지 않고 공이 들지 않는 행은 없다.
한 음절, 한 단어 리듬과 이미지 형성에 중요하게 기능하지 않는 것이 없다.
낱낱의 음운, 음성, 형태, 의미가 시 전체의 의미 구현, 미적 체험을 떠받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차이 나는 시 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4. 8.15.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75) 구성과 리듬 - ② 행과 연과 제목/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