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76) 구성과 리듬 - ③ 시간과 공간/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
구성과 리듬
Daum카페/ 시간과 공간
③ 시간과 공간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존재(Being)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 파악된다.
시적 주체는 현실 시간과 공간을 건넘으로써 창조적 존재가 된다.
시의 시공은 자연의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그것과는 달리 주관적 정신적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주관성은 시적 플롯의 생성인(生成因)이자 상상적 시공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적 자동화의 관습들을 넘어서거나 파괴하고,
보다 차이 나는 새로운 현존재(Dasein)를 구현해 나가는 까닭에,
시적 주체는 시간과 공간, 또는 그에 걸맞은 등가물(等價物)들로 이루어진
시적 상황과 이미지와 리듬을 통해 구현된다 할 수 있다.
당연히, 시간과 공간은 화자의 성질과 상황에 따라 무수히 다양하게 펼쳐진다.
회상과 현재, 미래적 전망, 그리고 의식적 표현과 무의식적 분출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시라고 하는 양식의 특징은 주관적이고 순간적이며 우연적인 시간과 공간에 놓여 있다.
시성(詩性)의 핵심은 주관적 현재성, 가상 현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상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상상에 의해 우연, 필연의 구분 없이 뒤섞인 시공이다.
앞에 든 「별」, 「나를 다리다」, 「금정산을 보냈다」 등 비교적 평이하게 읽히는 시도
과거와 미래의 시공, 현실에 놓일 수 없는 시공을 현재화하고 있거니와
이들 시공은 객관화된 물리적 시공이 아니라 심리적 시간, 현재적 순간의 시간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현실, 인과율적인 논리, 원근(遠近), 시각에서도 벗어난다.
시간과 공간의 현존화로 하여, 사망한 어머니도, 지난날 아내의 손길도, 금정산도 지금 여기에 살아나는 것이다.
읽기에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시가 있고,
쉬운 시가 있는 건 시간과 공간의 우연성과 주관성의 강도(强度)에 따르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그 마을에 눈이 내리네
계단을 올라가는 천사
눈이 파란 꼬마가 누나에게 묻네
사랑하면 물어뜯는 거야?
목덜미를 깨무는 아빠는 죽지 않는 거야?
그 마을에 낙엽이 내리네
아무도 쓸지 않는 낙엽이 쌓인 길을 달리는 마차
나란히 앉은 연인은 황금빛 노을로 사라지네
노란 천사가 달리는 마차를 멈추네
호숫가로 가지 말아요
난 당신을 건드리지 않아
연인은 낙엽이 쌓인 하늘로 걸어가네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는 바람을 눈 위에 쌓고
남자는 그녀의 침대를 뒤지네 겁에 질린 하녀는
긍정적인 대답만 하네 감자도 여물고 양비추도
다 자랐는데 남자는 말이 없네
전쟁이 시작되었네 사춘기 꼬마가 침대에
두 손이 묶여 있네 수음하는 아이의 떨리는 눈동자
목사 아빠가 저녁식사를 금지하네
하얗게 질려가는 아이들
새의 목에 십자가를 꽂은 가위, 불이 났어요
아빠, 귀걸이가
필요하지 않아요 난 엄마가 아니예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천국
검은 침묵 속에서 천사가 입을 벌리네
―김혜영,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전문
두루 아시다시피 인류역사상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에 비견될 만한 놀라운 발견―
정신세계의 신대륙으로서의 ‘무의식’을 발견하고 체계적으로 주장한 인물이다.
무의식은 인간의 모든 언행을 사실상 주관하며 그 원천도 리비도, 성충동에 있다고 했다.
이는 에로스(삶의 본능)와 타나토스(죽음 본능)의 샘으로 채워지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에서는
검은 침묵 속의 천사 즉, 무의식 속의 꾸밈없는 자아와 성충동,
현실의 모든 격식에서 벗어난 리비도의 민낯이 꿈속에서처럼 그려지고 있다.
잠재된 콤플렉스의 분출이기도 하다.
눈이 내리고 낙엽이 내리는 마을로 들어가는 마차, 가지 않아야 할 천국,
그곳은 땅 아래 호수일 뿐 아니라 낙엽이 쌓인 하늘 위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의 객관적 위치가 붕괴된 무의식적 장소와 시간 속에서의 성애이다.
성애의 장면은 하녀의 긍정적인 대답, 여문 감자와 익은 양배추, 전쟁,
아이의 수음 등으로 몽타주 되고 저녁 식사를 금지하는 목사의 이미지에서
의식의 현실세계로 비약하기도 한다.
장면은 다시 〈새의 목에 십자가를 꽂은 가위)라는 추(醜)의 미, 그리고 귀걸이도 필요하지 않은 공포 등,
무의식 내지 전의식적 이미지로 중층묘사(multiple description)된다.
프로이트의 심리치료는 억압된 충동이나 기억의 잠재들과 대면하고
이를 건강한 자아의 시점으로 재구성하는 데 그 기본이 있다.
시인은 무의식에 억압돼 있던 잠재 기억들을 시라는 언어로 드러냄으로써 승화하고자 한다.
〈의심하지 않는 천국〉이란 ‘죄 없는 불륜’이란 의미를 갖는 모순어법일까,
검은 침묵 속에서 입을 벌리는 천사를 통해 의미를 유추해 볼 때,
그것은 타락을 바라보는 윤리의 놀라움일 수도 있고, 천사마저 관능의 세계로 빠져드는,
프로이트의 성 본능 예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모더니즘 시의 성향은 세련되고 절제되는 것이 아니라, 과장되고 무질서하다.
현대문명과 지식인의 불안을 그린 영국의 앨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우리 시대의 주요특징으로 ‘전례 없는 속물 주위’를 들었거니와 목덜미를 깨무는 반어적인 사랑 또는 싸움,
그것은 원시적 관능미와 속물주의의 언어라 할 것이다.
모더니즘 시 중에는 행과 연의 구분에 별 의미가 없고 그렇다고 무의식적이지도 않는 유미주의적인 시,
형태주의적인 시도 있다.
시 정신의 미적인 구현 방법에 따라 시를 형태적으로 2대별 한다면
‘이미지의 시’와 ‘리듬의 시’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의 시’는 다시 ㉮고착 이미지의 시―물리적으로 고정된 이미지를 추구하는 형태주의 시,
㉯비유적 이미지의 시―의미를 구현하기 위한 이미지의 시 등으로 나눌 수 있고,
‘리듬의 시’는 다시 ㉮리듬 시―외형률, 내재율 등 리듬에 의한 시,
㉯음향시―활음조(euphony)와 악음조(cacophony)를 이용하는 시(대표적으로는 미래파의 시)로 나눌 수 있다.
활음조란 유쾌하고 듣기 좋은 소리라면 악음조는 거칠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이다.
이들은 물론 서로 연동되고 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月
火
水
木
金
土
하나 둘
하나 둘
일요일로 나가는 「엇둘」 소리
자연의 학대(虐待)에서
너를 놓아라
역사의 여백(餘白)
영혼의 위생「데이」
―김기림, 「일요행진곡」 1부 일부
형태주의(formalism)적 유희성을 보이는 시이다.
자동화된 언어 습관에 대해 새로운 언어배열로 시각적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
월, 화, 수, 목, 금, 토 등 각 요일과 구령 등의 언어배열은 미적인 효과를 위한 심미적 배열이다.
시각, 청각을 이용한 행진의 느낌과,
인용 부분의 주지―명랑하고, 희망적인 해방감이 환유적 어휘들과 시각적 리듬의 도움으로 구체화 된다.
문명사회의 일상이란 자연을 학대하는 일,
그 역사에서 벗어나 영혼의 치유를 맞는 일요일 예찬의 비유적 의미도 결부된다.
앞 연의 고착 이미지와 뒤 연의 비유적 이미지, 앞부분의 음향과 뒷부분의 리듬이 결부된 형태이다.
여기에 시간, 공간의 개념은 무의미하다.
유미적(唯美的) 시공은 일상의 시공에서 벗어난 주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향할 뿐이다.
하이데거는 『글쓰기의 기본』에서
존재의 역사란 결코 흘러가버리지 않고 언제나 여기 있는 것이라 하였거니와
현존재란 주체가 수용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
이는 주위를 둘러싼 세계에 이미 참여하고 관계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 과정,
가능성의 예견이다.
이를 탐색하는 시의 언어란 언제나 새로운 현실이며
우리를 격식과 규범에서 해방시키는 창조적 파괴 행위이다.
이는 끝까지 완전하게 이름 짓거나 규정할 수 없는, 미결정신, 차연,
그리고 기존의 확고한 지식과 규범에 의해 억압받아왔던
‘부수적인 양식’들의 지엽적이고 우연적이며 부적격한 것들에 대한 차이 나는 시공의 세계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드러나는 규칙성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규칙, 혹은 잠재적인 질서까지 지니고 살아 있다.
시의 차이 나는 시공은 조각조각 파편으로 현존하되 조각조각만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마음이 조각조각 걷잡을 수 없는 것이긴 해도,
현실적으로 부분 부분 따로 떨어져서 움직이지는 않는 거와 마찬가지다.
어떤 편견도 나름의 연계성 속에서 존재하며 틀로써 사회화하고,
그 틀 이상의 질서마저 복합적으로 수용하는 생명체이다.
시의 구성―그것을 특정의 논리, 미적 감각, 한때의 서정으로 다 언어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특징은 행과 연이라는 형태와 주관적 시간과 공간이라는 내적 특성에 의해 구성된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형태로 현현하며 내면과 외면,
관념과 구체라는 극점 사이를 무한히 유영하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내적 요소들을 섬세하게 연결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맥락이 통하게 하는 역할이
이미지와 리듬의 주된 일이라 할 것이다.
< ‘차이 나는 시 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4. 8.1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76) 구성과 리듬 - ③ 시간과 공간/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