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77) 구성과 리듬 - ④ 리듬/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
구성과 리듬
Daum카페/ 생각에도 리듬이 있어야 한다
④ 리듬
리듬(rhythm)은 음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새소리, 물 흐르는 소리, 파도소리, 종소리 같은 소리에서도 느껴진다.
그뿐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의 순환을 비롯, 발아, 성장, 결실, 소멸이란 생명의 과정,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 죄와 벌, 노력과 고통, 밝음과 어둠 등 삶의 전 과정에서도 인식적인 리듬이 있다.
그래서, 인과응보, 고진감래, 사필귀정 같은 말도 쓰고 있고,
어딘가가 잘못되었거나 어긋나는 지점에서는 리듬이 파괴되었다느니,
리듬을 회복해야 한다느니 하기도 한다.
삶의 과정과 생명의 본질을 탐색하는 시라는 언어 양식에 리듬이 연동됨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순환적이든 파격적이든 생산적이든 파괴적이든.
리듬은 심장의 고동, 호흡, 신체적 운동 등에서도 감지된다.
러시아형식주의자 토마세프스키(Boris Tomashevsky)의 말을 빌면
“실수로 지각할 수 있는 음성 현상들의 전체”이다.
좁게는 시의 언어적 속성이 주기성을 띠고 나타나는 현상―압운, 율격 등을 일컫지만 모든 소리 현상―
활음조와 악음조, 음운 변이와 반복, 대조 등 사람에게 상당한 심리적 효과를 주는
청각현상 모두를 가르키는 말이다.
시 텍스트에 있어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질서와 드러나지 않은 질서를
텍스트의 계기에 맞추어 물리적으로 내면적으로 얽어내는 자질들의 편성이 리듬인 것이다.
소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은 인간에게 안정감과 미적 쾌감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어조, 문맥과 결부되어 정서적 긴장과 이완의 효과를 주기도 한다.
겉으로는 무척 복잡해 보이는 시도 단순한 리듬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미적 쾌감을 받을 수 있고, 인상을 깊게 하며 독특하고 새로운 어조,
새로운 분위기를 체험한다.
그러므로 리듬은 ‘모든 음성 현상’일 뿐 아니라 언어가 머금은 음성과 형태와 의미의 하모니 즉,
문맥적 흐름의 감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리듬은 의미와 이미지와 함께 시적 생명을 형성하고
시가 사회적으로 교통(交通)하게 하는 핵심적 요소가 된다.
텍스트 전 언어적 영역에서 우러나는,
일정한 박자와 소리의 반복 현상을 기반으로 하는 기표와 기의의 하모니가 형성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시 이론에서 리듬(운율, rhythm)은 형식상 운(rhyme)과 율(metre)로 구분되었다.
‘운’은 같거나 비슷한 음의 규칙적인 반복에서 생기는 음악적 효과,
한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음위율(音位律) 즉, 놓이는 위치에 따라
각운, 두운, 요운 등으로 구분되는 압운(押韻)이 대표적이다.
두운은 단어,
어구의 첫 자음(넓은 의미로 어떠한 자음의 반복도 해당하는데 이 경우 자음운이라고 한다)의 반복이고,
요운(腰韻)은 중간 위치 음의 운, 모음운은 강음절의 모음이 반복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각운은 시행 끝 강음절의 모음과 자음이 반복되는 현상으로 대표적인 압운이라 할 수 있다.
‘율’이란 음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인데,
음절수나 음보(音步)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음수율, 음보율 등의 율격(律格)을 이룬다.
우리말에는 이 중 고저, 강약의 율은 발달하지 못하여,
통념상 장단율을 바탕으로 우리 시의 리듬이 형성된다고 보고 있다.
3,4조라느니, 7,5조라느니 하는 자수율이나,
3음보니 4음보(또는 2음보)니 하는 음보율 등 주로 율격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음보율로 따져서 3음보와 4음보가 우리 시행을 이루는 기본 율격이고
3음보가 대체로 서민계층의 세계관과 감성을,
4음보는 귀족계층 세계관과 감성을 표현한다고도 판단된다.
음보란 foot의 역어(譯語)로 음절이 모여 행을 이루는 단위이며,
휴지에 의해서 구분되는 문법적 단위 또는 율격적 단위이다.
전통 운율론이 비교적 정형적이고 섬세한 체계를 이룬 것은
시가 청각 중심으로 소통되던 근대 이전의 시에서는 그만큼 음악성이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시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음수율, 음성률, 음보율, 음위율 따위 외형률(外形律)보다는
내재율(內在律) 즉, 의미적 맥락과 내적 호흡에 의한 율격이 그 중심이 되고 있다.
아파트 늙은 벚나무가 조는 사이
오 작은 새! 콩콩콩 콩알이라 놀리지 않기
오 애기동백! 웅크린 등 어깨 툭툭 치지 않기
저 시소! 쩍 벌린 두 팔 발로 차지 않기
저 민들레! 새소리 떠난 허공에게 밀어 넣지 않기
저 아가! 아장아장 똘랑똘랑 또딱또딱 눈짓 발짓
아하하하하 누구라도 콩콩콩 따라하기
매일매일 연습하기
―김예강, 「아파트 늙은 벚나무 조는 사이」
아파트 늙은 벚나무가 조는 한가로운 시간,
작은 콩새 날아다니고, 애기동백 조금씩 자라날 채비를 하고, 시소는 두 팔 벌려 아이들 기다리고,
민들레는 새소리 듣고 있다. 이 때 아장아장 걷는 아기,
호기심 어린 눈짓 발짓으로 늙고 작고 새로 피어나는 생명들을 따라 하는,
시인의 모성적이고 긍정적인 시야기 엿보이는 정황이다.
하지만 거듭 읽다 보면 이 시의 역동성을 북돋우는 건 리듬―
아파트, 오 작은 새! 오 애기동백! 저 시소! 저 민들레! 저 아가! 아하하하하,
매일매일 등 첫머리의 강세(强勢)와 아장아장 똘랑똘랑 또딱또딱, 아하하하하, 콩콩콩의 의성어와 의태어들
그 외의 리듬적 요소가 아닌가 한다.
일견 사실적인 정황들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지 않고,
시적 응축력을 갖게 하는 힘은 무엇보다 두운(頭韻) 비슷한 효과를 내는 행 머리의 강세에 있다 할 수 있다.
읽기에 따라서는 운(韻)의 가능성을 엿볼 만도 한 것이다.
3음보를 기본으로, 둘째 행부터는 한 행의 음보를 2중으로 배치,
음보에 변화를 주어 리듬의 역동성을 조절하기도 하고 있다.
「아파트 늙은 벚나무가 조는 사이」 같은 시는
언어의 압운적 가능성을 볼 수도 있는 예가 될 수 있지만
우리 시에는 좁은 의미에서의 운율이 지니는 규칙적인 강세 패턴, 운은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대시의 운율은 통사구조나 음성상징, 특정 음운 등에 의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 시의 운율은 율격, 그 중에서도 음보를 중심으로 생성된다는 것이다.
어휘와 구분에 휴지(休止)를 주거나 박자를 느슨하게도 빨라지게도,
음절수를 가감하기도 하고 음보를 첨가, 생략, 변형하기도 하며 음절, 단어, 구 등을 삽입, 생략하기도 한다.
산문시에는 연구분 행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 형태면에서 자유시와 다르다.
문장의 연결이 행과 연이 아닌 단락, 문단에 의존된다.
따라서 산문 시의 리듬은 정형시나 자유시에 시에 비해 규칙성이 훨씬 약하다.
여기서는 자유시의 운율을 살펴보자.
이름 모를 이름들이 무릎을 붙여 앉은 마을에
짧은 해 바삐 지나가다 떨군 햇빛 이삭
한가로이 줍고 있는 길모퉁이 노인 몇 분
집집마다 쌓아올린 장작더미에
엄동설한 시린 손을 묻어 놓고
논두렁 밭두렁 무성하게 피던 이야기가
어느 집 아랫목에 모여 앉는 시간
하늘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숲에서 쫓겨난 바람 맨발로 달려와서
이집 저집 급하게 대문 흔드는 바람에
불침번 서던 감나무 깜짝 놀라 졸음을 털고
낯선 집 마당가에 늦도록 나부끼던
하얀 빨래 하나가 춥다
―최옥, 「겨울 인상」
전반적으로 4음보를 기본 율격으로 하는 시이다.
같은 4음보격이라 해도 음절 수, 어절 수가 달라서 때로는 다닥다닥 붙여 읽고 때로는 평온하게,
좀 느슨하게 읽어야 이 시의 ‘산동네 겨울 인상’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역량이 돋보이는 점은 의성어 의태어 외에 대부분 시어들이
시골 마을 겨울의 춥지만 따뜻한 풍경을 인상적으로 그려내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둘째 연의 1,2행 그리고 마지막 연 마지막 행은 4음보가 아닌 3음보로,
시야의 변환, 이미지와 문맥의 변환을 가져온다.
그 결과 끝 행의 끝 음보 ‘춥다’ 두 음절은 전체의 의미, 겨울을 오순도순 견뎌내는 인정들,
삶의 생가가 그치지는 않는 가운데 날씨는 추운 정황을 성공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시의 리듬은 이렇게 무수히 다양하고 미묘한 것이기에 그 논리를 딱 떨어지게 제시하기는 어렵다.
의미나 정서에 연계되면서 그들의 역동성을 불러일으켜 감동의 소통을 돕는 주요 요소이다.
고요한 내 영혼의 연못에
돌팔매가 날아든다
맑은 거울 같은 수면이
파열음을 내며 산산 바스러져 술렁인다
찰나의 공황
눈을 내리감고 숨결도 잠잠히 서서히
가라앉듯 가라앉듯
기 다 린 다
심연으로 잠적했던 중량감이
슬며시 무중력 상태로 떠오를 무렵
일렁이던 수면이 살금살금
물무늬를 지우며 고요해진다
―임성숙, 「명상」 전문
명상에 이르는 과정을 다양한 리듬으로 이끌고 있다.
1연을 보면,
1,2,3행이 3음보―2음보―3음보로 이어지다 마지막 4행에서
〈파열음을 내며/ 산산 바스라져/ 술렁인다〉로 하나의 음보에 유난히 많은 음절, 어절을 중첩하여,
내면의 갈등과 초조감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연은
한 행 2음보에 여백의 긴 휴지를 두어 일순간 텅 비는듯한 심리상태를 나타내었고,
셋째 연은
3음보격 둘을 1행에는 4음보, 2행에는 2음보로 배치, 행간 걸침을 함으로써
시간의 경과와 명상에 잠기는 과정을,
넷째 연 〈기/다/린/다〉―
이는 한 음절 한 음보라는 독특한 율격으로 명상에 이르는 내면을 연출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리듬이 독자로 하여금 진정어린 명상의 체험으로 이끌어내는 기능을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가 소리, 모양, 의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시의 언어에 있어 모양은 이미지에서,
소리는 리듬에서, 의미는 언어의 전 자질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모두 포에지, 표현 이전의 정신상태를 구현하는 요소들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리듬은 이 셋이 모두 어우러져 연출하는 파동, 문맥의 진동이라 할 것이다.
< ‘차이 나는 시 쓰기, 차유의 시론(신진, 시문학사, 2019.)’에서 옮겨 적음. (2024. 8.29.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77) 구성과 리듬 - ④ 리듬/ 문학박사, 동아대 명예교수 신진|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