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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누가복음 3장)
독사의 자식들아 (7절)
대림절은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순례의 절기입니다.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나시는 예수에게로 나아가라는 부름을 듣는 시간이요, 그분에게로 모여드는 응답의 때입니다. 성탄절에 즈음하여, 방문하듯 교회에 오던 이들이 많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신앙과 관계없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러 교회로 모였습니다. 어른들도 교회의 크리스마스 풍경에 관심을 보이며 특별한 시즌으로 기념했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그렇게 오는 이들을 환영하고 함께 기뻐했습니다.
성탄절의 한 풍습은 세례식입니다. 많은 이들이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는 가능한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게 하려고 초대하고 권면하며 유도했습니다. 그런 기억으로 보자면, 세례를 받기 위해 온 사람들을 ‘독사의 자식들’(7절)이라 부르며 야멸차게 꾸짖는 요한의 행태가 당혹스럽습니다. 세례받으라고 권유하고 세례자들을 격려해도 모자랄 판국에, 이렇게 모멸감을 주며 찬물을 끼얹다니요. 어쨌든 이 장면이 증명하는 사실은,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요한이 흔쾌히 세례를 허락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장차 올 진노를 피하러 왔느냐? (7절)
세례 요한으로부터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비난을 받는 그들은 “무리”입니다. 무리는 요한에게 마음이 끌려 모여든 사람들로서, 그들은 요한의 적대자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요한의 제자도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말에 호감을 지니고 찾아오긴 했으나, 말씀을 듣고 따라나서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주변에도 그런 무리는 언제나 많았지요. 그들은 세례의 취지에 동의하고 세례가 필요하다고 여기고 요한에게 왔지만, 요한은 그들을 거절합니다.
요한이 보기에, 무리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이유는 ‘다가올 진노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심판을 모면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려는 이들을 향해,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 호통합니다. 뱀과 같은 파충류는 위험을 피하는 본능을 따라 행동하는 특징을 지닙니다. 심판과 진노를 피할 수 있는 면죄부나 보험쯤으로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이들을 독사에 비유한 셈입니다. 생각해 보면, 세례 요한 때의 무리만이 아닙니다. 유사한 목적으로 피난처 삼아 교회에 모여들고 신앙을 갖는 이들은 언제나 꾸준히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8절)
요한에게 오는 무리는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8절)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사는 유대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영원히 축복하셨으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신들의 위상은 구원의 보증서와 같다고 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세례가 “다가올 진노를 피하는”(7절) 보증서가 되리라는 믿음과 같은 류의 믿음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보증서에 추가하여, 세례를 또 하나의 보증서로 지니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요한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보증서가 아무 효험도 없으리라고 단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8절)는 말로, 요한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의지하는 신앙을 비웃습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아브라함이라는 사실을 내세우지만, 도끼는 그 뿌리를 쳐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가 무엇인가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무리의 기대는 애당초 틀렸습니다. 세례가 거룩한 성사인 것은 틀림없지만, 사람이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이지, 어떤 성사나 공로나 헌신 등 어떤 것도 구원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8절)
세례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 알려집니다(3절). 회개(메타노이아)는 “마음(중심)의 변화”라는 뜻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중심이며 뿌리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새 옷을 입는 경우와는 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표시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세례처럼, 회개는 외적으로 확인되는 증거가 아닙니다. 다만, 좋은 나무(뿌리)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듯이, 중심의 변화는 자연스레 외면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열매는 의도해서 만들어지는 가공(加工)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히 수반되는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것은, 혈통적 자격(유대인)을 취득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다운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세례받음 역시 어떤 자격을 획득함이 아니라, 회개의 삶을 시작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중요하게 거론됩니다(8, 9절). “자식”, “자손”, “열매”는 보이지 않은 뿌리와 연결되어 존재하는 보이는 결과 현상입니다. 세례요한이 전파한 것이 “회개의 세례”(3:3)라는 점에서, 세례받은 자의 열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8절)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세례를 받았음에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도끼에 찍혀 불 속에 던지게 될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도끼가 뿌리에 놓였다는 사실입니다. 열매 없는 가지를 쳐내는(요15:2) 도끼가 아니라, 뿌리를 잘라낼 도끼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달리 말하면, 아브라함의 혈통이나 세례 의식에 뿌리를 둔 어떤 기대도 소용없으리라는 경고입니다(9절).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0, 12, 14절)
요한의 말을 들은 이들은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의미입니다. 먼저 무리에게는, 두 벌 옷이 있다면 그중 한 벌을 없는 자에게 나눠 주라는 지침이 내려집니다(11절). 두 벌 옷은 여분의 옷이 아닙니다. 가난하더라도 유대인들에게는 두 벌 옷은 필수입니다. 하나는 일상의 옷이요, 다른 하나는 안식일에 입는 옷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따로 간직한 옷마저도 헐벗은 이에게 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두 벌 옷”을 지녀서는 안된다고 명령하셨지요.
세리들에게는 “부가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명합니다(13절). 당시 납세제도를 보자면, 세리장은 로마가 부과한 한 지역의 세금 전체를 자신이 먼저 대납하고 나서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둘 권리를 얻습니다. 그리고 세리들을 고용해서 세금을 거두면서 이윤을 취합니다. 그가 가진 권리엔 속임과 착취도 포함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과된 것만 거두라는 말은 세리를 그만두라는 말보다도 비상식적입니다.
직업군인들에게(14절)도 열매를 맺는 삶이 제시됩니다. 국가로부터 매우 적은 급료만 받는 용병들은 강탈과 협박으로 자신의 몫을 더 채우도록 허용됩니다. 그런 그들에게 속이지 말고 강탈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 일반화된 시스템에 저항하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차라리 세리나 용병의 직업을 그만두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세리나 용병 따위의 일을 집어치우라고 말하지 않고, 그 일을 소명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에는 만족하라(족한 줄로 알라, 14절)는 공통된 단서가 붙습니다. 한 벌 옷에, 부과된 것에, 적은 급료에 만족하라는 말입니다. 만족은 있는 것만으로 부족하지 않다는 깨달음이고, 이는 곧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는 뿌리에서 생겨나는 열매입니다. 백 벌의 옷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 벌의 옷으로도 넉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두 부류 사람은 다른 뿌리에 속한 사람이요, 당연히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다(16절)
누가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심중에 생각했다”(15절)고 밝히는 유일한 복음서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라고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여겼으며, 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파하는 최초의 교회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여기는 무리에게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있다”고 말함으로써, 본인은 그리스도가 아님을 확언합니다.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증언합니다. ① 그분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다, ②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③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16절). 그리스도이신 예수와 세례요한은 세례를 베푼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세례의 차이에서 예수와 세례 요한은 명백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16-17절)
회개의 세례를 주는 요한의 세례는 물의 세례입니다. 하지만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바람, 프뉴마)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알려집니다(16절). 실제로 누가 문서에 속하는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사건에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가 등장함으로써, 바람과 불의 세례라는 은유는 실상이 됩니다.
불은 태우고 바람은 날려 보냅니다. 불 속에서 불순물은 태워지고, 순전한 것들이 남게 되지요. 바람도 그러합니다. 키질을 하면 쭉정이들은 바람에 날려갑니다. 그리고 알곡들이 남습니다. 불순물은 태워지고 쭉정이는 날려가니, 쭉정이들에게 불과 바람(성령)이란 심판입니다. 그러나 불과 바람에 의해서 순전한 것들과 알곡들은 온전하게 보존됩니다. 따라서 알곡에게 불과 바람은 구원입니다. 불과 바람은 누구에겐 심판이요, 누구에겐 구원입니다. 심판과 구원을 가르는 기준이 회개입니다.
좋은 소식(18절)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다”는 메시지는 오늘 우리가 듣는 좋은(기쁜)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듣는 우리는,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현상을 넘어, 참되고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18절) 이유는, 누구에게나 회개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불은 심판의 도구에 한정되지 않고, 새 창조의 능력입니다. 불은 존재의 소멸을 넘어 새 존재로 태어나게 하는 능력입니다. 돌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은 얼마든지 쭉정이를 알곡으로 바꾸십니다. 그렇기에 쭉정이에게조차 기쁜 소식입니다. 지금은 요한이 요단강에 머무르며 회개의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https://www.youtube.com/live/y8hyMhReeJI?si=269ZQ2Y5olrUC9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