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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할 시간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1장)
노래하는 절기, 성탄
아름다운 노래들로 가득 찬 때를 고른다면 두말할 것 없이 크리스마스 시즌입니다. 남녀노소와 문화적 차이를 넘어 누구나 사랑하고 아끼는 노래들이 성탄 때에 불립니다. 크리스마스가 온 세계의 축제로 자리 잡았고, 연말과 연시라는 축하와 기대의 분위기와 맞물려 있는 탓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대림절을 지나 성탄으로 이어지는 시기가 노래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성서, 특별히 누가복음에서 확인됩니다.
예수 탄생과 관련하여 친숙하게 알려진 대다수 이야기는 누가복음 1-2장에 있는데, 여기에는 놀라우리만치 많은 노래가 등장합니다. 사가랴와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이 노래하고(1:31-33, 35), 엘리사벳(1:42-45)이 송축하고, 마리아(1:46-55)가 찬미하고, 사가랴(1:68-77)가 찬양합니다. 2장에선 하늘의 군대(2:13-14)가 노래하고, 노인 시므온(2:28-32)이 찬가를 부릅니다. 남녀노소를 망라한 인간과 천상의 존재들이 모두 노래하는 셈입니다.
두 어머니의 노래 (1:39-56)
대림절 마지막 주일, 성탄을 바로 눈앞에 둔 오늘, 우리는 아이를 잉태한 두 여인의 노래를 듣습니다. 두 노래 중 하나(46-56절)는 모든 찬가 중의 으뜸으로 여겨지는 마그니피캇(마리아의 찬가)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엘리사벳이 기쁨에 겨워 큰 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42-45절). 여섯 달 전에 엘리사벳은 세례 요한을 수태했고, 마리아는 이제 막 예수를 수태한 상태입니다.
한 여인(엘리사벳)은 잉태할 수 없을 만큼 노쇠한 반면에, 다른 한 여인(마리아)은 아이를 갖기엔 어린 소녀입니다. 잉태를 상상하기 어려운 두 여인이 각각 임신하게 되고 서로 만나 노래한다는 점에서는 닮았습니다. 또한 각각 세례 요한과 예수의 어머니가 되는 두 여인이 수태하는 과정과 의미도 특별합니다. 누가복음은, 1-2장에 걸쳐, 의미심장한 두 수태와 출생 이야기를 극적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들려줍니다.
두 수태 이야기 (1:5-38)
누가복음의 첫 사건은, 천사 가브리엘이 성전에서 분향하고 있는 제사장 사가랴를 찾아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갖게 될 것을 고지하는 일화입니다(1:5-25). 사가랴는 자기와 아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며 증거를 요구합니다(1:18). 그래서 증거가 주어지는데. 아이가 출생할 때까지 사가랴가 말을 못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증거가 필요하지 않지요. 증거란 믿음 없는 이들에게나 소용됩니다.
곧장 마리아의 수태 고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1:26-38). 사가랴를 찾아갔던 천사 가브리엘이 여섯 달 후에(26절) 나사렛의 마리아를 찾아와, 마리아가 잉태하게 되리라고 일러줍니다. 스스로 비천한 여종이라고 밝히고 있는 바대로, 마리아는 사제 가문도 아니고 아이를 가져서도 안 되는 약혼 상태의 소녀입니다. 그런데 잉태를 감당할 수도 없는 소녀에 불과한 마리아가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질 것입니다”(1:38)는 말로 믿음을 보입니다. 앞선 이야기에서의 믿지 못했던 사가랴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성취
믿음을 지닌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고 낳게 됨은 당연합니다. 마리아와 같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실현된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주목해 볼 것은, 사가랴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는 아이(요한)을 잉태하고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믿음 없음이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가랴의 불신을 돌파하며 성취를 향해 나아갑니다. 또한, 믿음이 없다고 해서 스가랴가 버려지지도 않습니다. 그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전 과정을 목도하고, 마침내 약속이 성취되는 때 그의 혀는 풀리고 입이 열려 하나님을 찬양하고(1:64),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언합니다(1:67).
약속하시고, 약속을 유지하며, 약속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오신다는 약속의 드라마 속에서, 마리아, 사가랴, 엘리사벳 등은 각각의 배역을 맡습니다. 누구는 놀라운 믿음을 보이고, 누구는 불신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와 장벽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불신하는 이들까지 아우르며 말입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주역은, 사가랴, 엘리사벳, 마리아, 심지어 예수조차도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만남 (39-42절)
오늘의 본문은, 이제 막 아기를 가진 마리아가 여섯 달 전에 임신한 노파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친족(36절)이라지만, 거리가 멀고(유대와 나사렛) 신분이나 연배로 어울리지 않음에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이유는 천사의 말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증표로, 나이 든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다고 마리아에게 알려주었었지요(1:36-37). 마리아는 하나님이 엘리사벳에게 하신 일을 보고자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생면부지의 어색한 만남이 기쁨으로 가득하게 된 것은, 엘리사벳의 배 속에 있는 아기(요한)가 뛰놀았기 때문입니다(41, 44절).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아기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의 존재를 감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극히 높은 분의 선지자”(1:76)인 요한이 “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1:32)인 예수를 태중에서 알아본 것이지요. 이 장면은 ‘그(요한)가 모태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리라(1:15)’라고 했던 가브리엘 예언의 성취로 읽힙니다.
엘리사벳의 노래 (42-45절)
이는 곧 엘리사벳의 성령 충만으로 이어져, 홀연히 엘리사벳은 모든 정황을 이해하게 됩니다.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외쳐 말합니다. ‘복이 있다’고 번역된 동사는 ‘축복하다, 칭송하다’의 뜻을 지닌 “euvloge,w”의 수동태입니다. 엘리사벳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노래 속에 암시됩니다.
첫째, 마리아가 복된 것은 “내 주님의 어머니”(43절)이기 때문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를 마주하고 있다는 기쁨을 표현하는 고백과 찬사는, 엘리사벳 개인의 것이 아니라, 원시교회가 지녔던 고백이며 찬사였습니다. 둘째, “내 주님의 어머니”가 엘리사벳에게 왔다는 것이 엘리사벳의 기쁨입니다(43-44절). 고대하던 아이를 늘그막에 갖게 된 엘리사벳의 기쁨도 크지만, 주님을 잉태한 어린 여인 마리아의 방문에 비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세 번째는, 마리아가 복된 또 하나의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1:38)을 마리아가 믿었다는 사실에 기반합니다(45절). 이런 마리아의 믿음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와 비교될 정도로 독보적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의 모범입니다.
마리아의 찬가 (46-55절)
이어, 저 유명한 노래인 마그니피캇(magnificat, 이 노래의 라틴어 버전 첫 단어)이 마리아의 입을 통해 불립니다(46-55절). 사실, 이 찬가는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가 부른 찬가(사무엘상 2:1-10)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한나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엘리사벳처럼, 석녀였지만 나이 들어 아이를 낳은 여인입니다. 이들 모두는 유력한 남편을 둔 존중받는 여인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늘그막에 태가 열려 자식을 얻은 여인들의 찬미라 할 수 있는 한나의 노래를, 지금 어린 마리아가 부릅니다. 이 점이 새롭습니다. 한나의 노래를 엘리사벳이 부른다면, 이는 이전 일의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천한 소녀인 마리아가 부름으로써, 이 노래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노래가 됩니다.
주님을 찬양하고(46절) 기뻐한다(47절)는 환성에 이어, ‘복이 있다(makaria)’는 복의 선언이 다시 등장합니다(48절). 마리아는 “모든 사람이 나를 복되다고 말할 것이다”고 말함으로써, 스스로가 복된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마리아가 말하는 자신의 복은 ‘주님이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는 데에 기인합니다(48절). 자기(마리아)처럼 비천한 사람이 ‘주님의 어머니’(45절)로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 발언입니다.
일세기의 그리스-로마 문명 가운데 살던 사람들에게, 처녀가 신의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매우 상식적인 일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그다지 놀라울 게 없는 일이었다는 얘기지요. 정작 그들이 이해 못 할 점은, 마리아처럼 비천한 여인이 고결한 신의 아들을 잉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일은 불가능하며 일어나서도 안 되는 충격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에 언급되는 바,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큰일”(49절)이란 비천한 마리아가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비천한 이를 돌보신다는 증거입니다.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은 모두에게로 확장되어, 두려워하는 자(50절)와 비천한 자(52절)와 주리는 자(53절)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천명됩니다.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이나, 나그네 아브라함을 택하신 일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54-55절). 동시에, 이 일은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와 부자들에게는 추락의 경험이 될 것입니다(51-53절). “부자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라고 하신 말씀(18:25)이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6:19-31), 삭개오의 일화(19:1-10) 등이 이를 방증합니다. 성서 신학자 Jensen이 “누가복음 전체는 이 노래에 대한 주석이다”(“Preaching Luke’s Gospel”, p.25)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지금은 설명하고, 권고하고, 가르칠 시간이 아니라 노래할 시간입니다. 마리아는 장차 하나님이 행하실 장래의 일들을, 이미 이루어진 과거의 일인 것처럼, 과거시제로 노래합니다. 반드시 그 미래가 성취되리라는 확신을 표현하는 문학적 방식으로서, 전쟁에 나서는 이들이 싸우기도 전에 “우리는 승리했다”고 노래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인간의 믿음과 불신, 복종과 불순종에 구애되지 않고 하나님이 이미 그분의 큰일을 시작하셨으니,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믿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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