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582) 육화된 마음 - ③ 고독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고독해지는 것/ 철학박사 강신주
육화된 마음
Daum카페/ [정현종] 섬 [육화된 마음 - 메를로 퐁티와 정현종]
③ 고독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고독해지는 것
메를로 퐁티는 투명하다고 생각된 우리 의식이 얼마나 불투명한 것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지
잘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메를로 퐁티는 우리가 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합니다.
남자로서 혹은 여자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 능력들,
그리고 특정한 역사적 시공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지게 된 주름들로 인해서
우리 각자는 서로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타자와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일이 아닙니까? 이런 자연적 능력의 차이와 역사적 주름의 고유성 때문에
우리가 서로 고립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메를로 퐁티는 타자로 건너가려는 우리의 소망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앞의 인용문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나는 만들어졌지만 파괴될 수도 있는 함몰이자 주름이다.”
만들어진 주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고립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주름들은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타자와 만나는 새로운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주름을 만들도록 강제할 것이고,
당연히 기존의 주름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함축하지요.
그렇다면 이제 고독과 의사소통은 사실 동일한 현상의 두 가지 계기에 불과하다는
메를로 퐁티의 다음 이야기를 읽어 볼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고독과 의사소통은 양자택일의 두 형이 아니라, 유일한 한 가지 현상의 두 가지 계기들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타자는 나에 대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사실 최초로 주어지는 것은 타자를 향한 나의 경험의 긴장이다.
그 타자의 실존이 나의 삶의 지평에서 확증되지 않을지라도,
심지어 내가 그에 대해 갖는 인식이 불완전할지라도 말이다.
―《자각의 현상학》
메를로 퐁티는 나에게 최초로 주어진 것은 바로 ‘타자를 향한 나의 경험의 긴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타자에게 매혹되었을 때, 우리는 그에게 말을 건네고자 하는 압박감을 느낍니다.
지금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영영 그를 다시 만날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지요.
이 경우 우리에게는 두 가지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차가운 냉대를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를 당한다면 우리는 고독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며,
다행히 후자의 경우에 처하면 우리는 타인과의 의사소통이라는 행복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와 나와의 마주침,
그리고 그로부터 생기는 나의 경험의 긴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는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이지요.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게 시작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고독에 빠지는 겁니다.
내 마음을 그 혹은 그녀에게 주었는데도 그가 이것을 거부할 때
나는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은 고독을 느낍니다.
결국 고독이란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그와의 사랑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정현종은 어떤 타자에게로 건너가기보다는 그와 자신 사이에 놓여 있는 섬으로 건너가고 싶다는
세함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타자에 이르려는 자신의 사랑이 필연적으로 타자로 하여금
자신를 사랑하도록 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시인이 알았기 때문이지요.
시인은 사랑에 빠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단지 타자에게 수줍게 손을 내밀거나
말을 건네는 것뿐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시인에게 ‘섬’이란 떨리는 말을 건네는 것을 의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수줍은 나의 말을 받아 준다면 행복해지겠지만,
그렇지 않고 응답이 없거나 무시당한다면 우리는 고독에 빠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인에 이르려는 욕망을 모두 포기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말이지요.
그 섬에 도착한 사람이 어쩌면 나 혼자뿐일지라도 말입니다.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강신주, 도서출판 동녘, 2019.)’에서 옮겨 적음. (2024.11. 9.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582) 육화된 마음 - ③ 고독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고독해지는 것/ 철학박사 강신주|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