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박물관으로 갑니다. 여기서 백제 금동대향로와 서산 마애삼존불 모형만 제대로 보고
나와도 본전 빼는 겁니다. 아니다. 관람료가 없으니 그런 말 하고 말고가 없지.
좀쓰럽게 그런 얘기 빼고 우아하게...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홀이 나오고 가운데 커다란 수조가 보입니다.
저렇게 둥그런 물확은 흔치 않지요.
잘 보이진 않지만 왼쪽이 북쪽으로 부소산성과 왕궁이 있고 가운데 길을 따라
윗쪽 동으로 금성산성과 정림사가 있습니다. 자로 잰듯한 계획도시지요.
1만여 가구가 거주했다니 웅진(공주)에서 보다 넓은 곳으로 도읍을 옮길 필요가 있었겠습니다.
표시된 곳이 모두 산성입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사비는 북. 서, 남으로 금강이 휘돌아가 자연스레 해자를
만들고, 동쪽으로는 나성(노란줄)을 쌓아 넓은 지역을 자연스레 방어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로써 조건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더구나 부소산성은 평시에 왕궁의 후원으로
비상시는 산성으로 배수진을 칠 수 있었으니 요지에 틀림 없습니다.
동진엔 동물 모양의 물병이 유행했었답니다.
새를 닮은 물병으로 중국과 교류가 왕성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생식기는 자손이 번창하기를 기원해서 만들곤 하는데 토우에 이런게 많습니다.
부여 군수리에서 아래 호자라 불리는 토기와 같이 출토되었습니다.
귀여운 강아지가 하품하는듯한 이 토기는 무슨 용도로 쓰였을까요?
눈치 빠른 분들은 벌써 미소짓고 계실 겁니다.
아무렇지 않게 낙서처럼 그려진 그림도 획이 현대적입니다.
자, 이제 금동대향로를 보실까요?
처음에 붙여진 이름은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향로였답니다.
마치 불상 이름짓듯이 재료와 형태 총망라해서 이름을 지어놓았던 것이지요.
중국의 박산향로를 본 떠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크기와 화려함이 비교되지 않고
백제만의 특징이 가미되었다 합니다.
왼쪽은 산수봉황무늬 벽돌인데 가운데 상단의 봉황과 산수 형태가 대향로 뚜껑의 봉황과
산수 형태가 서로 닮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른 쪽은 용무늬 벽돌인데
이 전돌에 새겨진 부조형태의 용이 받침에서 생명을 가지고 입체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이 백제 전돌의 무늬만 보더라도 대향로에 바로 백제적 요소가 가미된 증거라 할 수
있겠지요.
이 대향로는 받침, 몸체, 뚜껑 3개의 부분으로 분리 되게 만들었는데, 용접 부분이 4군데
박에 되지 않고 거의 통째로 주조했다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도금을 한 금동아말감 기법은 유럽에서는 중세에나 볼 수 있는 도금기법이라니
백제 문화의 우월성과 찬란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최초로 우리 손으로 발굴해낸 무령왕릉 이후 '백제문화에 대한 우리
고고학계의 최대 성과로 꼽힐 정도로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라고 표현을 할 정도입니다.
위 대향로 전체 사진에 빨간 점으로 표시된 부분을 확대하면 이렇게 보이는데 이게 뭘까요?
코끼리를 탄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코끼리 소조상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게 뭘 뜻하는 걸까요?
코끼리를 가축으로 이용하는 나라를 백제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지요.
그만큼 교류가 활발했었다는 겁니다.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라 해도 손색없지요.
전돌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여성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합니다.
앞서 소개했던 왕흥사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 사진과 왕흥이 새겨진 기와입니다.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 중인 칠지도. 검에 새겨진 글씨의 해석으로
백제왕이 왜왕에 '헌납'하였다 해석하고 다른 한쪽에선 '하사'하였다 해석하는 말도 많은 칠지도.
그러나 '명문의 서체가 고예(古隸) 서체이고 음각된 글씨에 금으로 채운 상감기법은
이런 논쟁이 무의미함을 일깨워줍니다.'
'아직기와 왕인 박사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준 것이 4세기말 근초고왕 때인 것으로
보면 왜는 이즈음 문자문맹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명문의 글씨 미학으로만 봐도
'하사니 바쳤느니 하는 논의 자체가 무색해진다'. 백제와 왜의 문화수준이 극과 극인데
무슨 헌상이니 헌납이니 하냔 말이다.
- 경향신문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 2013.11.15
(왜 사진 부분을 따로 찍지 못해 합성했습니다. 죄송)
또한 <당염립본왕희도>라는 이름의 6세기 경 각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서
백제국과 왜국 사신의 복식을 보면 백제 사신은 관복을 제대로 갖추어 입은 반면
왜국은 맨발에 배가 드러나도록 보자기 같은 망또를 두르고 매듭을 한 모습입니다.
6세기에 제작되긴 했지만 3세기 복식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래도 헌상일까요?
잘 안보이지만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을 비롯해 40개 성을 빼았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연표를 보면 551년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 연합군은 (나제동맹 433-553)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권역을 확보하고 상류지역은 신라가 하류지역은 백제가 분할
점령하게 됩니다. 땅값 비싼 곳은 모조리 백제가 차지하게 된 것이지요.
이에 불만을 품은 신라가 고구려와 동맹을 '몰래' 맺고 (552) 한강 하류지역을 빼았습니다.
말하자면 나제동맹을 파기한 것이고 개인적으로 본다면 배반 당한 것이지요.
554년 이에 대한 보복전으로 관산성전투를 벌이지만, 이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무참히 참수되고 패합니다. 정의는 우리에게 있다라고 생각하고 벌인 싸움에 패하면
그 울분은 뼈에 사무치게 됩니다.
642년 의자왕의 대야성전투는 이 관산성전투에 대한 설욕전 성격이 강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대신라전에서 승리한 도취감과 자만에 빠져 백제를 멸망케 만든 잘못을
비껴나갈 순 없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오때문에 마치 주색잡기에 빠진 방탕한 왕처럼 그려져서도 안될 겁니다.
이런 식의 백제 멸망사에 이의 제기하는 분들도 여러 분 계시더군요.
다음 익산 편에서 한번 종합해보도록 하지요.
금동대향로 전시실을 나오니 백제불교문화전시관이 나옵니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입니다. 답사기는 <산신령과 두 마누라 :
http://blog.daum.net/fotomani/69978 >에 있습니다.
볼륨감 있는 얼굴 윤곽때문에 보는 각도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얼굴 표정이 조금씩
달라 보입니다. 그게 매력이지요.
전엔 인위적으로 그렇게 변화하는 조명을 설치해 움직이지 않고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 아마 관람객의 건강을 고려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리저리 돌며 볼 수밖에 없지만 조명의 각도는 어찌해 볼 방법이 없군요.
부소산성, 정림사지, 국립 부여박물관에서 머리와 눈은 너무 과식을 했지만
배는 걸어 다니느라 이제 아침에 먹은 순대국도 흔적이 없어졌으니 배도 만족시켜줘야지요?
연잎밥정식을 먹으려 했으나 음식점이 부소산성 쪽에 있어 다시 되돌아가기 싫어
그냥 시장의 시골통닭집으로. 오늘은 <시골>로 돕니다. 시골순대, 시골통닭.
그런데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맛이나 있을까?
그건 기우였습니다. 백종원이 다녀간 곳인데 사람이 없겠습니까?
유명세 때문인지 시장통닭치고는 다소 비싼 가격입니다.
대신 떡이 들어간 삼계탕 국물도 쫌 나오고, 오이무침과 모래집이 나옵니다.
'날 잡아잡수'라는 것처럼 두손 들고 다리를 짜악 벌린 통닭과 함께.
우선 알록달록한 소금을 찍어 똥집을 하나, 역시 모래집보다는 똥집이라 해야 맛이 더 나네요.
육즙, 육즙하는데 전 거기에 좀 거부감이 있습니다. 하여간 윤기 흐르는 속살.
여기 통닭은 껍질이 죽여줍니다. 살짝 전분기가 느껴지는 짭짤하고 바삭한 껍데기
덕분에 반병만 하려던 쏘주를 끝까지 비웁니다.
이리저리 바지런하게 다녔습니다. 거인이 본다면 그릇 속에서 개미새끼가
더듬이를 휘저으며 빨빨거리고 벗어나려 애쓰는 모양으로 보일 겁니다.
부여나들이는 이제 끝났습니다. 서천 친구네에서 또 한번 신세질까 하다가
사우나나 하고 서울로 올라가야겠습니다. 근처엔 큰 사우나가 없고
다 쬐깐한 목간통 뿐이라네요. 결국 다시 부소산성 쪽으로 갑니다.
다음엔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을 찾아가 볼까요?
닥다리로 가는 길
http://blog.daum.net/fotomani
첫댓글 지도를 보니
정말 바지런히 빨빨거리고 요리조리 다니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