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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누가복음 4장)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절)
가버나움을 비롯한 갈릴리의 도시에서 유명해진(4:14-15)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4:16-21),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에 감동하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합니다(22절).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반응이 나사렛 사람들의 감격과 기대를 보여줍니다.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가복음에서의 이 대목은, 아버지 요셉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경우와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목수의 아들이라 부르는 마태복음은 물론, 특히 마리아의 아들로 칭하는 마가복음의 언사는 모멸적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와는 상반된 나사렛 사람들의 응답을 보여줍니다.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다”(21절)는 반응과 함께,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칭함으로써 예수에 대한 호감을 표시합니다.
예수의 고향 나사렛은 갈릴리 남서쪽 변방 산지의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의 고향이라는 사실과의 연관을 제외하면, 나사렛은 성서에서 한 번도 지명이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습니다. 경건한 사람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단정할 정도이지요(요1:46). 나사렛처럼 변변치 못한 지역일수록, 자신들의 낮은 자존감을 높여줄 인물의 출현을 더 간절히 고대합니다. 나사렛 사람들로서는, 예수와 같은 인물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에 흥분을 감출 수 없겠습니다. 업신여김을 받아온 나사렛의 수치를 씻어주고 숙원을 풀어줄 메시아와 같은 인물이라는 기대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 즉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고 확인합니다.
속담 : 의사야, 너 자신을 고쳐라 (23절)
예수께서는 자기를 반기는 나사렛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아시고, 속담 하나를 인용하여 그들의 속내를 표현하십니다. “의사야, 너 자신을 고쳐라”라는 속담은 ‘밥을 지으면 가족부터 먹인다’, ‘우리 논에 물을 먼저 댄다’라는 격언과 상응합니다. 예수처럼 많은 이들에게 인정과 칭송을 받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자기 가족과 고향부터 챙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 지역, 동네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내 지역 출신의 누군가가 큰 성공을 거두면 그로 인한 수혜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향(同鄕) 출신의 유망(有望)한 인물이 나타나면 지역민들은 그에게 열광을 보내며 힘을 모아주고, 고향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업은 사람은 더 큰 도전에 나설 수 있습니다. 정치인이든, 지도자이든, 자신의 출신지에 공을 들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네 고향 여기서 행하라” (23절)
나사렛에 오기 전에 예수께서는 갈릴리 여러 곳(가버나움을 비롯한)에서 가르치셨고, 예수의 능력 있는 활동은 갈릴리 전역에 두루 알려져, 칭찬을 받았던 터입니다(4:14-15). 그 평판 자자한 예수(유대 사회에서 예수는 흔한 이름)가 자신들의 고향 출신임을 알게 된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가 우선 고향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의 놀라운 일들은 나사렛에서 먼저 행해졌어야 한다는 것이 나사렛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능력)을 고향 나사렛에서도 행해야 한다”는 나사렛 사람들의 말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습니다. 나사렛 출신인 예수가 고향이 아닌 갈릴리의 다른 도시들(특히 가버나움, 23절)에서 활동을 시작하고(4:15) 뒤늦게야 고향에 모습을 나타낸 데에 대한 못마땅함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 요구는 ‘고향부터 챙기라’는 뼈 있는 비난에 머물지 않고, 예수를 향한 기대와 지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앞으로의 성공을 위해 서로 잘해보자는 호의이며 연대의 제안인 셈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다” (24절)
그런데 예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는 고향 사람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대변하는 지도자나 대표자가 아니라, 예언자(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사람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대언자로 삽니다. 그렇기에 예언자는 고향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예언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못 받는 것은 숙명”이라는 진실이 상기됩니다(24절).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은, ‘어릴 적부터의 이력을 자세히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는 어렵다’는 뜻으로도 해석됩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서의 나사렛 일화에서는 그렇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다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2:52)고 예수의 유년기를 묘사하는 누가복음의 맥락에서 보자면, 예수의 어린 시절과 내력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다.
시돈의 사렙다 과부, 시리아 사람 나아만 (26-27절)
예수께서는 대표적인 두 예언자를 언급하면서 나사렛 사람들과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오랜 기근이 있었던 엘리야 시대에 유대인 과부가 아닌 이방인 과부가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얘기(25-26절, 왕상17:8-16)는, 자기 백성보다 이방인을 챙기신 하나님의 예입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던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를 통해 나병을 고침받았다(27절, 왕하5:1-27)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원수를 하나님이 치유하신 사례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유대인들로부터 터부시되어 왔습니다. 만약 성서를 다시 편집할 수 있다면, 유대인들은 이 두 이야기를 반드시 삭제하고 싶었을 터입니다. 이 뜬금없는 작태를 저지른 이들이 가장 전설적이고 위대한 예언자로 추앙받는 엘리야와 엘리사라는 사실도, 유대인에게는 내내 불편했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소환한 이유는 불 보듯 뻔합니다. ‘고향부터 챙겨야 한다’라고 말하는 나사렛 사람들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의 의중을 알게 된 나사렛 사람들은 크게 분노합니다(28절).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
유대인의 종교적 신념은 성서에서 생겨났습니다.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망한다는 율법(성경)의 가르침에 의거, 거룩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신념이 그러했습니다. ‘우리에게 먼저 능력을 행하라’는 나사렛 사람들의 특권 주장은 이 신념에 근거합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과 같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이 받을 은혜를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서의 예는 팔이 안으로 굽어야 한다는 당연한 확신을 사정없이 반박합니다.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굳게 믿는 이들의 신념을 뒤흔드는 것은, 이단 교설이나 거짓 가르침이 아니라, 다름 아닌 성서 그 자체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차별 없이 하나님의 자비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회당에 모인 나사렛 사람들이 잔뜩 화가 난 이유입니다.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습니다(29절). 특권을 내려놓고 진리를 인정하는 대신, 진리에 등을 돌리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특권을 당연시하고 보편적인 자비의 진리를 거절하는 상황은 교회 안에서도 종종 벌어져 왔습니다.
산 위 벼랑에서 밀쳐 떨어뜨리다 (29절)
나사렛이 예수를 배척했다는 언급은 공관복음서 모두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유독 누가복음은 배척에서 그치지 않고,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 했다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기록합니다. 동네 밖으로 데려가 벼랑에서 밀어 바위 위에 떨어뜨리는 처분은, 돌로 쳐서 죽임과 같은 유대 방식의 공개 처형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모독한 이들에게 내려지는 처벌로서, 집사 스데반이 이런 방식으로 죽임을 당합니다(행7:54-60). 로마의 공개 처형은 십자가형이었지요. 공개 처형이라는 점에서 나사렛 사람들이 집행하려 한 형과 십자가형은 연결됩니다. 나사렛만 산 위 동네가 아니라, 예루살렘도 산 위의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사렛은 산 위에서 예수를 죽이려고 했고, 예루살렘은 산 위에서 예수를 죽입니다.
나사렛이 그랬던 것처럼, 예루살렘도 처음엔 예수에게 환호를 보냈다가(19:28-40) 끝내는 죽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라’는 나사렛의 요구를 거절하신 것이 배척의 이유였고,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19:38)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신 것이 죽음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배척당하시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나사렛 사건은, 예수의 사역과 수난과 죽음의 이야기인 누가복음 전체를 보여주는 전조입니다. 예수를 죽이려 시도한 이들은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었고, 끝내 예수를 죽인 이들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은 묘한 연관성을 형성합니다.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30절)
예수께서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dielqw.n dia. me,sou auvtw/n)”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은 오천 명의 군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해 가십니다(공역 6:15; 떠나가다, 물러가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피해 가거나 떠나가거나 물러가지 아니하시고,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십니다. 말하자면, 죽음을 피하지 않으시고 관통해서 가셨다는 뜻입니다.
죽음을 관통해서 가셨다는 나사렛 일화의 결말은,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죽음의 결과를 예견하게 합니다. 결론은 죽지 않으셨다는 것이고, 이는 예수의 부활을 연상하게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나사렛에서 거부당한 복음이 가버나움에서 본격적으로 선포된다는 이후의 이야기 전개(4:31 이하)는 예수의 부활 이후 예수의 복음이 땅끝까지(행1:8) 전파된다는 사도행전의 전개를 암시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나사렛 일화는 누가-사도행전을 압축하는 단일 이야기로 그려집니다.
나사렛 일화는 언제나 교회의 모습과 겹칩니다. 자주 교회도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배타적으로 차지해야 한다고 믿고 있고, 그것이 성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의 교회 역시 우리 자신의 특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나사렛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늘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분의 무한한 자비를 받아들일 것인지, 나사렛 사람들처럼 거부해야 할지,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 역시 결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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