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요한복음 12장 24-26절
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영혼을 주님의 품에 의탁합니다.
이태원 참사로 별이 된 이들의 삶을 추모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삶(김경기, 임보라 목사)을 추모합니다.
되돌아가는 계절을 맞이하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지난 한 해도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람들이 적지가 않습니다. 사랑했던 사람들도 있고 전쟁과 기아와 폭력과 학대로 죽어간 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무능한 사회시스템으로 죽어가기도 했고 어떤 분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의 죽음 안에는 평안함이 있고 어떤 분들의 죽음에는 고통과 아픔과 시린 상처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주님 품으로 떠났지만 여전한 그리움으로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죽음이든 이제 모두 하나님의 품에서 평안하시길 빕니다. 주님 품안에서 안식하시길 빕니다.
우리가 함께 고인들을 모시고 추모를 하면서 함께 기억합시다.
1. 우리도 언제가 육신을 벗고 이분들처럼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존재는 유한한 시간안에서 삶을 살아갑니다.
지난 주에도 무연고자 장례식장을 다녀왔는데 그곳에 오는 사람들 나이의 구별이 없습니다. 어린 꼬마아이들이 상주가 되어 취학도 하지 않은 아이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동생으로 보이는 애가 아버지의 위패를 들고 있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심지어 태어나자마자 빛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어린 생명들도 있습니다. 막으려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죽지 않으려 애를 쓰고 기를 쓰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죽지 않는 법을 알려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을 너머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셨고 바울도 죽었고 죽지 않은 생명은 없습니다. 제가 농사를 지으면서 일상적으로 가장 많은 보는 것이 수없이 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수없이 많은 생명이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과정입니다. 몇 주 전에 고구마를 캤습니다. 봄에 심겨져 120일 정도가 지나고 고구마를 캡니다. 그 고구마를 캐지 않고 살려두면 어떻게 될까요? 천년만년 클까요? 아닙니다. 시기를 넘기면 그때부터 땅속의 모든 생명들은 고구마를 먹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철 지난 고구마는 썩기 시작합니다. 누군가의 밥에 되고 썩기 시작하고 겨울을 맞이하면 결국은 얼어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5천 년 만 년되는 나무도 결국은 죽습니다.
사실 은퇴인문학을 하면서 제가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사람들의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고령화 사회속에서 90-100까지 살게 되는데 그때 아프면 어떻하지 그때 삶의 질이 확 떨어지면 어떻하지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저는 노후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제일 먼저 준비해야할 것이 신앙적으로든 인문학적으로든 나이 60 넘으면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퇴 이후의 모든 문제는 고령화로 인하여 길어진 삶에 대한 불안입니다. 이 돈이면 충분할까 더 오래 살면 어떻하지, 건강도 과연 받쳐줄까? 그런데 결국 그것에 대한 염려와 준비에 에너지를 너무 쏟다보면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결국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낼 수가 없게 됩니다. 환자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커지면 커질수록 삶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치료에만 목숨을 거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언제 죽더라도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면 모든 인생은 덤이죠. 그나마 조금이라도 있는게 감사죠. 지금 여기에 충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거고 그러다 최선을 다해 살아도 하나님께서 모든 길을 막으시면 부르신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는거죠.
그래서 혜민 스님은 우리는 삶에서 특별한 시간보다 평범한 시간들을 더 행복하게 살아야한다고 말합니다. 은행에서 순번표를 뽑아 기다리고 식당에서 음식 나오길 또 기다리고 지하철에서 시간을 보내고 친구에게 연락이 오면 문자를 보내고... 결국이 평범한 시간들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에 매 순간 집중하며 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전화번호부책을 읽어도 재미가 있다는 겁니다. 예배드리는 순간에는 예배에 집중하고 기도를 할 때는 기도하는 일에 집중하고(중보기도) 걸을 때는 걷는 일에 집중하고, 교회 있을 때는 집생각하고 집에 있을 때는 교회 생각하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삶의 상황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같은 시간>을 아름답고 충만하게 살수 있는 모두가 되길 빕니다.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이 소중한 시간은 오늘 여기에 계신 분들이 그토록 살기를 바랬던 내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죽습니다. 우리의 밥상에서 수없이 많은 동식물이 죽고 우리의 몸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세포들이 죽고 우리의 삶은 수없이 많은 생명들의 죽음 위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식사기도로 “이밥 먹고 밥이 되어” 노래를 부르지만 우리의 밥은 모든 생명이고 그 생명이 죽기 때문에 우리는 그 덕으로 살아갑니다. 텃밭의 흙속에는 지금까지 죽어갔던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있습니다. 그 생명들이 또다른 생명들을 키워내고 그 생명들을 우리는 먹고 사는 것입니다.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씨앗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지 않으셨습니다. 여기 임보라 목사님께서 약자와 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해 살아생전에 피를 토할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손수 퀴어성서를 번역하셔서는 저희 연구소에서 나온 그 책을 끌어안고는 얼마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는지 모릅니다. 그분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지 않았다면 이런 삶을 단 한순간도 살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죽음은 또다른 생명의 씨앗이 되어 안전한 사회를 향한 몸부림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정승미집사님이 살아생전에 나누었던 따뜻함은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친구의 삶속에 살아 숨쉬는 심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참사가 주는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여전히 전쟁과 폭력이 주는 죽음의 고통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이 그래서 오늘 그 기억들로 인하여 뭔가 새로운 세상에 작은 몸부림이라도 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이 또한 이 죽음이 준 새로운 세상의 작은 씨앗과 열매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죽는 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의 씨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삶이로든 죽음으로든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의 작은 씨앗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안에서 영원히 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