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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사람 시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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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숙 시인의 방 스크랩 2014발표작품
전숙 추천 0 조회 87 15.01.04 20: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돌하르방 장공익

                                                            전숙

 

돌명장이라는 하르방을 만났다

자신이 조각한 돌하르방처럼 소박한 매무새의 하르방은

그 흔한 마스크 한 장 쓰지 않고

돌 속에 가부좌로 들어앉아있는 제주의 혼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돌은 저를 밟고 지나간 바람의 발자국을 기억하고 있다

돌들의 사연이 제주 앞바다처럼 남실거려

하르방은 늘 이야기바다에 떠있다

가슴에 뻥뻥 구멍이 뚫린 제주할망 같은 용암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한 줄기 바람으로 스쳐간

비바리 넹바리 아즈방 아즈망 좀녀 하르방 홀아방들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다

 

소라껍질 같은 아득한 귀에만 들리고

왕방울 같은 먼 눈에만 보이는 저 대하소설들

그래서 하르방은 팔순의 고단한 손을 멈출 수가 없다

 

폭삭 속았수다예*

 

한 마디로 위로받는

 

망망대해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같은 시간들이

고담주머니에서 풀려나온 이야기처럼

돌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다.

*매우 수고하셨습니다의 제주방언

 

 

 

 

 

절개지

                                           전숙

 

길이 절단 났습니다

뇌출혈로 막힌 뇌혈관에 길을 내려고

산을 자르듯 덥석 뇌를 잘랐다는데

생의 지반이 붕괴된 엄니는

한평생 이끌어온 길의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말았습니다

한참 절룩거리다 돌아오십니다

노루가 사라져버린 길을 찾듯

홀연한 길의 발가락을 찾다가

장판바닥만 쓸어보고 한동안 망연하십니다

주섬주섬 밤새워 꿰맨 기억의 가닥이 흩어져버렸습니다

주인에게서 멀어진 발가락의 열린 상처에

토사에 뒤덮인 절개지처럼 망각구름이 쌓입니다

산사태처럼 작은 기억들이 무너져 내리자

반듯한 가르마 같던 엄니 길 전체가 흔들립니다

씽크홀*처럼 엄니의 길들이 돌연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추억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절개지는

먼 길 찾아온 사촌바람에게도

손잡고 울먹이는 풀씨친구에게도

밥 안준다고 타박입니다

길을 잃은 산짐승이 사라지듯

엄니의 아름답던 꽃잎도 낙화유수입니다

때 아닌 갱년기처럼 변덕스런

기억의 가닥을 엄니는 아예 싹둑 가위질입니다

핏물 어룽진 노을이 산허리에 업혀서

저물어가는 꽃잎에 침을 탁. 탁. 뱉습니다.

 

*씽크홀: 땅이 갑자기 꺼지는 현상

 

                                                           -2014다층

 

 

변호인*

                                         전숙

 

극장문을 밀치고 쏟아져 나오는 침묵들

가슴속에는 정의의 불씨 한 톨씩 품고 있다

어느 힘없는 풀꽃도 어느 가난한 바람도

억울하지 않는 것이 정의라고?

극장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스러질

빈말이 유월 버들가지처럼 치렁치렁 햇살에 빛나고 있다

제 목숨도 변호하지 못하는 뼈 없는 혀로

풍장된 주검에 열광하는 스마트폰이 진동음으로 운다

 

다시 살처분이 시작되었다는 SNS

고병원성조류독감으로 판결 받은

오리들은 변호인도 구하지 못하고 다시 매몰되기 시작했다

정의의 여신은 구리에 내려앉은 인류의 푸른 추억이다

정의의 칼이 벨 수 있는 건 숙취에 목마른 자리끼 한 모금

정의의 저울로 재면 가장 가벼운 것은 눈물과 한숨이고

가장 무거운 것은 오리발과 건망증이다

정의는 크레인의 높이에 매달려 오금이 저리고

어여쁜 여신은 눈을 가리고 허기진 평등을 고수레 중이다

 

숲은 기진맥진한 연어를 잡아먹고 태양은 숲을 호령한다

달빛의 눈물은 투명체이므로 시인에게만 보인다

 

머리가 광속으로 회전하면 기억은 지워진다

생각나지 않습니다

생각나지 않는 증언만 유효하다

건망증이 나라를 구한다.

 

*변호인: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송강호주연의 영화

조작된 ‘부림사건’은 33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윤일병에게

                                             전숙

 

아들아, 아침을 차리다가 네 소식을 들었다

숟가락을 놓다가 말고 하염없다가

다시 삶을 든다

네가 개처럼 핥아먹었다는 누군가의 가래침처럼

끈적한 액체가 숨구멍을 덮는다

발길질에 반듯한 무릎이 무너지고

욕설에 꿈의 새하얀 날개가 꺾이고

주먹질에 생의 포실한 지붕이 내려앉은

수치와 공포로 뭉친 주먹밥을 꾸역꾸역 넘긴다

 

삶이란 강이구나

흙탕물도 오물도 어떤 눈물도

다 받아먹어야하는 서러운 강이구나

인간을 지탱하는 뼈라는 뼈는 모두 부러진 너도

레고블록처럼 끼워 맞춘 개가 되어서도 무참히 흘렀구나

심장이 터지고 비장이 찢겨 핏물로 염색된 천사의 백의

네 하늘에 떠있던 새하얀 날개는 어느새 의자가 비었는데

주먹을 파르르 쥐고

숨넘어갈 비명을 지르고

십자가를 세운들

 

칼을 주지 않고

방패를 주지 않고

‘착하게 착하게 살아라’고 주먹으로 윽박지른

도덕교과서가 다시 회생하겠니?

 

 

 

 

 

자화상1

                                전숙

 

가수 이효리가 47000원이 든 노란봉투로

쌍용차해직자들의 손해배상금 47억원을 나누었다는 방송을 듣고

나도 보내야지 하다가 며칠 지내며 까맣게 까먹다가

1차 목표액에 도달했다는 추가방송을 듣고

부랴부랴 2차모금액을 보낸다

최초로 노란봉투운동을 시작했다는 주부는

아이의 학원비를 줄였다는데

작은 풀꽃의 향기를 알아챈 이효리는

찔레덤불처럼 무성한 향기를 품었을진대

시인의 이름표를 단 나는

허공에 잔 먼지만 일다가 주저앉아버린

의미 없는 파동일 뿐이다

 

대저 시인이란 무엇인가

창조주처럼 처음인가

달빛 같은 그윽한 동반자인가

별빛 같은 구경꾼인가

뻐꾸기 같은 무임승차족인가

 

밀폐시킨 암흑창고에 노동자를 몰아넣고

스티로폼도 녹여버리는 최루가스를

자선 베풀듯이 터뜨린 공권력에 공분하다가

뉴스가 시들해지면 분노도 시들해져버리는

부끄러움도 잊고 마는 나는 누구인가

 

노란봉투를 처음으로 생각해낸 이름 모를 주부에게

‘시인’의 이름을 바친다

 

시인은 눈물의 눈물을 닦아주는 눈물이다.

 

 

상처에서 꽃이 핀다

                                            전숙

 

모든 상처에서는 꽃이 핀다

유년의 상처에 꽃이 피어있다

무르팍을 으깬 돌멩이가 꽃잎으로 박혀있다

꽃잎을 누르면 검색창이 열리듯 상처의 기억이 열린다

밥 대신 누런 코를 들이마시던 아이의

허물어진 담벼락 같은 가난도 망초꽃으로 피어있다

 

고래가 죽을 때 핀다는 ‘붉은 장미’에는 가시가 없다

상처는 가시를 버리고 꽃의 길을 택했다

마지막 호흡에서 피어나는 붉디붉은 상처의 꽃

‘신은 살아있다’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에 손톱으로 새긴

아리디 아린 상처의 꽃

 

상처가 꽃처럼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기억한

암각화이기 때문이다

결코 잊지 말라고

상처가 오체투지로 새긴

눈물의 전언이 꽃으로 피어난다

 

밟히고 밟힌 풀꽃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라

매듭 매듭 저린 아픔과 상처의 기억이

다시는 밟히지 말라고

눈부처로 피어 있다.

 

 

 

 강에는 인문학코드가 흐른다

-서유럽의 강을 건너다

                                      전숙

 

축지법을 쓰듯이 하루에 한 나라씩을 건넌다

나라마다 핏줄 같은 강이 흐르고 있다

강의 깊이는 그 강을 마시는 명줄들의 가슴의 깊이다

깊은 강은 제 깊이만한 명줄을 받아들이고

얕은 강은 제 몸도 허우적거린다

강이 키우는 것은 목숨만이 아니다

강은 네로와 나폴레옹과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메디치를 낳았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같은 강에서도

폭군도 종교도 예술도 태어난다

어떤 강은 통곡소리가 범람하고

어떤 강은 천년의 암흑을 깨운다

전설과 신화는 마천루처럼 쌓이고

악한 것은 더 악해지고 선한 것은 더 선해진다

아직도 생목숨 같은 강에는 숭고하거나 치욕이거나 분노가 흐른다

 

다 잊혔으리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리라

초승달처럼 캄캄하게 강물을 속여보지만

보이지 않아도 진실은 보름달처럼 이미

검은빛 또는 푸른빛의 발자국을 강물에 선명하게 찍어두었다

맑은 바람이 바스티유를 흔들던 그날처럼

악에 오염되었던 강은 검은빛에 다시 물들지 않는다

오늘의 상심에도 두만강이 주저앉지 않고 흘러가는 이유다

자유가 흐르는 강에서는 풀꽃들의 피냄새가 난다.

  -시와사람겨울호신작특집-

 

 

보리암 가는 길

                                 전숙

관음의 미소는 멀었다

‘금방’이라는 바람의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춤추듯 내려오는 십육분음표 실바람들에게

선재동자처럼 길을 물으면

“다 왔어요. 조금만 가면 돼요.”

마침표의 문장들에 내 다리품도 곧 마칠 것만 같아서

사위어가는 갈맷빛에게도 끄덕이고

붉게 철들어가는 열매에게도 속아주며

보리암 가는 길

해수관음은 마중도 나오지 않는데 가을비가 온다

석녀에게 자식을 점지해주고

장군바위를 출세시켰다는 관음의 신통력

끓어 넘치는 구름의 열정을 숫처녀처럼 막아내는데

생의 바위에 억눌려있던 설움이

압력솥 꼭지처럼 핑글핑글 돌아간다

 

생의 방향을 찾고자 보리암 가는 길

해수관음 앞에 서면

세상의 길인 나침반도 방향을 잃는다는데

중생의 아픔을 더듬어보는 심미안으로

관음은 나의 설움을 받아주실까

참나무의 보시를 갈무리해둔

다람쥐 곳간 같은 산모롱이를 휘어 도니

관음이 운무에 안겨 있다

 

원효가 본 관음을 본다

천년의 세월이 골목 안과 골목 밖의 대빗자루 같다

관음이 골목 안 운무를 대빗자루로 쓸어낸다

세상의 번뇌를 다 받아먹은 바다가

관음의 미소로 출렁이고 있었다.

 

날개를 추억하다

                                        전숙

 

로열 젤리를 먹으면 날개가 돋아난다

달빛처럼 고요한 반투명의 액체에

셀 수 없는 날개가 숨어있다

나는 로열 젤리 한 통을 깡그리 먹고

날개 돋기를 기다린다

이왕이면

알타이산맥을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날개가 3미터나 된다는 검은독수리의 날개를 기다린다

폐경이 된 후

붉은 빛만 보아도 가슴이 뛴다

성가신 것들이 날개였다는 걸

알아채는데 한 생을 낭비했다

돌이키지 말아야할 것과

돌이켜지지 않는 것들의 간극에서

날개는 찢기고

창공만 기억하는 날개는

알 낳는 도구로 전락한 날개를 견딜 수 없었다

펼쳐보지도 않고 타박만 하다가

스스로 물어뜯은 날개가 암흑 저편으로

찰나에 사라져버렸다

 

로열 젤리에서 요동치는 날개들

여왕벌의 날개와 일벌의 날개와 수벌의 날개

어느 날개라도 아프지 않은 날개 있으랴

날개가 날개일 때 마음껏 웃기를.......

 

과도에 베인 손가락의 붉은 빛에서

날개를 추억하는 저녁이다.

 

                                                 -2014광주문학

 

나무의 허공

                                전숙

 

밤새 태풍이 불었다

오백년 동안 마을을 품었던 정자나무 우듬지가 찢겼다

덜렁거리는 가지를 마을 청년이 잘라냈다

우리는 모두 아연했다

 

나무는 안쪽이 텅 비어 있었다

보물을 허겁지겁 도둑맞은 금고 같았다

아름드리 몸통을 들여다보니 아궁이처럼 캄캄했다

오장육부와 그것들을 감싸던 갈비뼈와 등뼈가 삭아 내려

나무는 허공에 떠있었다

 

어떤 태풍도, 어떤 가뭄도 막아낸 그의 강건한 의지는

마을의 신앙이었다

누구도 그의 건강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여름이면 깊은 그늘로

마을의 진땀을 식혀주던

나무는

 

제 안을 태워 소신공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뭇잎이 소신공양의 불꽃이었다는 걸

그늘이 불꽃의 눈물이었다는 걸 알게 된 우리는

나무의 허공을 채워주려고 울력을 해서 시멘트를 부었다

 

나무의 온몸이 안팎으로 썩어

그늘이 없어진 뒤에야

할아버지의 잇몸처럼

허공이 나무를 버티고 있었음을 우리는 깨달았다.

 

                                   -시선 2014가을호

 

노을 꽃밭

                                       전숙

 

보건진료소 하얀 벽에 노을 꽃밭이 걸려 있다

사금 든 꽃, 고실라진 꽃, 검버섯 잔뜩 피운 꽃

기역자로 휘어진 꽃들이 이글거린다

언제 찍혔나, 저 꽃밭

들여다보니 구멍이 뻥뻥 뚫려있다

시간의 직업은 구멍 뚫는 일

폐가에 늘어나는 구멍처럼 꽃들의 옆구리에 구멍이 늘어간다

뚫린 구멍을 통해 바람 한 줄기 불어나가고

눈물이 방울방울 걸어온다

 

동그란 약으로 노역과 시간의 구멍을 메우고

안마의자의 안마를 받아야 하루를 건너는 꽃들

달달한 차 한 잔씩 나누며 저녁놀이 타오른다

더 이상 잊히지 않으려는

기억의 호미질에서는 캄캄한 목초액만 올라온다

어느새 숯처럼 타버린 시간들

길은 점점 어두워지고 구멍이 아가리를 벌려도

무성한 풋것과 맞닥뜨려 지는 법 없다

푸른 풋것들 노욕이라 꼬집지만

그 노욕이 저녁놀을 저리 뜨겁게 사르는 용기의 숯이다.

     

                       -시와사람 여름호 일터에서

 

 

 

쌍지팡이/ 전숙

보건진료소에서 일한지 33년째다.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스틱을 양손에 쥐고 걸어간다. 그때의 지팡이는 걸음마다의 신체적 의지가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 동행이고 가족이다. 오, 벽지에 위치한 보건진료소의 특성상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팔순 즈음의 어르신이다. 신체적 기능이 노화되어 잘 보이지도, 잘 들리지도 잘 걷지도 못하신다. 또한 식구라야 부부양주거나 독거노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동네의 주민들은 통째로 식구고 가족이다. 맛있는 것이 생기면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드시는 게 인지상정이 되었다. 진료소도 진료의 기능보다는 어르신들의 지팡이로서의 역할이 크다. 어르신들의 적막강산인 외로움을 안아드리고 상처받은 가슴의 흉터에는 순한 연고처럼 스며들어 흉터를 다독인다. 소나무 껍질처럼 부르튼 손바닥을 끌어안고 열두 이랑 막막하던 노동의 시간을 읽으며 그 힘들었던 세월을 위로해드린다.

진료소는 내 집처럼 편히 머물다 가는 어르신들의 쉼터다. 진료소장은 어르신들의 돋보기고, 보청기고, 신문이고, 편지다. 택배를 불러드리고 새로운 소식을 전해드리고 며칠 안 오시면 전화로 안부를 여쭙는다. 처음 발령 받았을 때 오, 벽지인지라 목욕하기가 어려우니 가렵고 냄새가 나고 피부병이 심했다. 그래서 우리 진료소는 10년째 무료목욕탕을 운영하고 있다. 목욕탕에서는 서로 등도 문질러주면서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시며 한바탕 웃음꽃이 피어난다. 목욕하고 나오시면 아기피부처럼 뽀얗게 예뻐지신다. 그 모습을 뵈면 고봉밥 먹은 것처럼 배가 불룩해진다. 목욕 후에 차를 한 잔씩 드시고 물리치료를 하신다. 물리치료를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외로움을 달랜다. 나는 서러운 시절의 하소연도 들어드리고 고부간의 갈등도 조정하고 친구간의 서운함도 중재하다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어르신들은 나름 시인이시다. 굽은 허리도 ‘하늘을 업고 다닌다.’ 하신다.

고혈압, 당뇨병, 관절염 등 병주머니 몇 개씩 찬 종합병원인 어르신들은 내 얼굴만 봐도 안심이 된다고 하신다. 하지만 실은 내가 더 어르신들께 의지하고 산다. 된장이며 김치며 푸성귀며 아쉬울 것 없이 챙겨주시는 어르신들과 나는 서로 힘을 주는 쌍지팡이다. 몸도 마음도 서로에게 기대고 저녁놀을 맞는다. 저 노을처럼 어르신들께는 아직 아궁이의 잔불이 남아 있다. 날만 새면 여전히 호미를 친구 삼아 논두렁밭두렁으로 들일 나가는 어르신들께 누구는 노욕이라고 핀잔이지만 그 욕심이 하루를 건너는 어르신들의 용기라는 것을 나는 안다.

                                                 -좋은생각 11월호 글번호30

 

사이회 여고졸업 사십주년 축시

 

타오르는 노을처럼

                                                   전숙

 

보랏빛등꽃향기는 누굴 유혹하고 싶었을까

감자바위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귀 기울이면, 풍금소리처럼 들리는

사춘기계집아이의 심장 쿵쾅거리는 소리

폭포의 무지개처럼 하늘에 걸리는 웃음소리

세월의 책을 덮고 눈을 감으면

시간의 머리 위로 모래바람이 휘몰아친다

그 바람 속에서

맑은 마음, 밝은 지혜, 힘찬 생활로

교문을 나선 춘향이가 보름달 같은 월매가 되어

사위 밥상 차려주며 오지랖 넓게 웃는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시간의 눈금에 정직하게 다이얼을 맞추어야

그 눈금만의 답이 들린다

그 눈금만의 통증과 눈물이 만져진다

그 눈금만의 텃밭에서 피어나는 꽃이 보인다

부르기만 해도 눈물겨운 친구들아

이제, 무소처럼 홀로 걸어갈 뿔이 돋아나는 시간이다

그 뿔은 흔들리지 않는 뿔이다

외롭거나 서럽거나 아프거나 악물고 견뎌낼 뿔이다

외로움도 꽃으로 피워낼 뿔이다

서러움도 측은지심으로 풀어갈 뿔이다

고통도 쓸어내리는 약손 같은 뿔이다

뿔의 귀는 한없이 순해져서

못 알아듣는 상처가 없으리니...

 

시간이 뚫어놓은 구멍들

가슴에도, 뼈 매듭에도, 기억의 창고에도

마파람이 제 집처럼 드나든다

젖은 바람의 등에 업혀

손을 내밀고 다가오는 것들

노을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저 노을을 아름답게 태우려면

숯덩이처럼 까맣게 타버린 심장이 필요하다

어쩌면 식도염처럼 밤새 아렸던 시간에

더 뜨거운 불이 들어있으리니...

 

허물도 수다의 꽃송이로 향기롭게 피워내는

사이회 꽃송이들아

교문을 나서던 사십 년 전 불꽃의 열정으로

세상이 숨을 멈추고

우주가 운행을 그치도록

아리땁게 아리땁게 타오르는 노을이 되자!

 

                                    -여고졸업40주년축시

 

눈물에게

                            전숙

 

눈물은 태초에 가시였단다

 

순한 눈을 지키라고 하느님이 선물로 주셨지

 

발톱을 세워 달려드는 적들을

가시는 차마 찌를 수 없었단다

 

마음이 너무 투명해서

적들의 아픔까지 유리알처럼 보였거든

 

세상의 순한 눈들은

가시의 방향을 바꾸어

제 마음을 찌르고 말았단다

 

도살장의 소

 

마음이 흘린 피

그게 눈물이란다.

 

 

 

왼쪽이 아프다

                                    전숙

 

땅이 왼다리를 전다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몸

강한 오른손에 밀려 움츠러든 왼손

주방보조처럼 제대로 된 음식 만들어 본 적 없다

길 왼쪽에 몸을 푼 작은 저수지

오랜 봄가뭄에 자궁이 열려 있다

낙태의 흔적일까

자궁내벽의 생살 움푹 패어있다

군무를 추며 상처를 핥는 하루살이 무리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흉터를 덮어주려는 듯

깊은 골을 따라 애잔한 물줄기 서넛

긴 자락을 끌고 있다

형제 중 공부가 뒤처진다고

왼손처럼 자꾸만 움츠러들었던 작은 언니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뒤

어머니는 왼 무릎이 운다며

앉기만 하면 왼 무릎을 왼 손바닥으로 쓸어주었다

모든 애잔한 것들은 왼쪽으로 몰리는 걸까

왼쪽 하늘이 붉게 충혈 된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속 관절 붉게 타는 어머니 왼 무릎이

산등성이로 서럽게 꺾이고,

아픈 살이 떠나자

남아있던 몸도 금세 어두워졌다

그리고 언니의 볼우물처럼

수줍은 달빛이 어머니의 왼 무릎을 부드럽게 안았다.

 

 

가방끈엄마

                                        전숙

 

아빠별똥별이 까무룩 사라진 후

가방끈 짧은 우리 엄마는 화장품외판원이 되었다

 

사십 년 동안 발을 동동 구르던 엄마의 동동구루무는

가방끈 짧은 우리 엄마 혓바닥까지 둥글게 말아먹은

멋진 꼬부랑 이름의 링클크림이 되고

금의환향한 한자말 이름을 붙여

주름도 없애고 피부까지 바꾼다는 기능성으로 진화하는 동안

똘망거리던 별빛들도

화장품외판원 엄마가 부끄러운 사춘기 반항아별이 되었다가

꼬맹이별이 또 두 개의 꼬맹이별의 엄마가 되었다

‘동안’이라는 시간은 엄마에게도 똑같은 ‘동안’이어서

엄마의 어깨에는 새가 둥지를 틀듯이 가방끈이 집을 지었다

화장품 무게를 수십 년 지탱한

가방끈을 견딘 엄마의 어깨뼈는 가방끈의 넓이만큼 주저앉았다

안락하게 누울 수 있도록 홈이 파인

가방끈의 집 때문에 죽을 만큼의 무게에도 삶이 밀려나지 않았다는 엄마

 

야금야금 뼈를 갉아먹는 가난한 파도를

엄마는 손바닥만한 삼각형의 방패로 감당했다

가방끈이 짧아 스스로 가방끈이 된 엄마의 가슴엔

자식이라는 가방의 무게 때문에

해지고 늘어진 기나긴 동굴이 파였다

 

엄마의 동굴에 꼬맹이별이 들락거리면

별빛에 반짝이는 종유석 같은 아름다운 가방끈이 보였다.

 

 

 

아버지의 손

                                   전숙

 

사막을 보고 있다

만지면 고운 모래가 묻어날 것 같은

고요가 고요를 말리는 건조증이 아직 진행 중이다

저 사막에도 용트림하듯 거센 강물줄기 흘렀었다

회초리를 들어 내 장딴지를 후려치던

그 강단진 패기는 어디쯤에서 말라버렸을까

한 장 한 장 생을 굽듯이 아슬하게 구워낸

내 대학등록금을 은행창구에 들이밀 때

아버지의 손은 사바나로 변하고 있었으리라

 

나는 회초리 든 아버지의 푸른 손만 기억하였다

모래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아버지의 손은 언제나

내가 편히 쉴 늘 푸른 초원인 줄 알았다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은 혹독한 시절을

무소의 뿔처럼 홀로 지고 걸어간

아버지의 강과 샘은 하얗게 말라붙어

 

눈을 감고 만지면 아버지의 손은

죽어 천년을 산다는 사막의 나무

한때 그 몸에 푸른 이파리 살랑였던 기억까지

깡마르게 지워낸 호양나무의 수피처럼

갈기갈기 거친 호흡으로 덮여 있었다.

 

 

 

 

 

 

 

잔치

                           전숙

 

난장판이었다. 누군가의 생이 폭발한 파편들을 구둣발로 밀며 항진을 계속하던 후각이 일순 미간을 모았다. 간밤 술기운이 덜 풀린 눈이 게슴츠레 열렸다.

 

텔레비전케이블에 목이 감긴 주검을 구더기들이 해체하고 있었다. 그가 걸어온 길들이 얼마나 너덜너덜 했는지 말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듯 해진 잇몸뿐인 구두가 반쯤 벗겨진 채 밤처럼 어두워진 섬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해체라고 해봐야 섬이 세상에서 주워 먹은 설움을 약간의 노임만 뜯어먹고 배설하는 단순작업이었다. 아무리 단순해도 일은 일인지라 술과 안주가 필요했다. 담배 한 개비 타오를 휴식도 필요했다. 몇 가지 필요조건만 갖추면 노동은 금세 잔치로 변할 터였다.

 

잔치는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아직 알콜기가 남아있는 빈 소주병과 쇠파리가 뒹구는 음료수캔과 하얗게 곰팡이가 내려앉은 단팥빵과 향처럼 피어오르던 담뱃재가 사이키조명처럼 빈 집의 거실공기를 뿌옇게 흔들고 있었다.

 

모두들 싫어하는 혐오작업인지라 독점계약을 한 구더기업체는 제법 재미가 쏠쏠하였다. 중요장기가 다 모인 상체가 아무래도 인기여서 모두들 섬의 상반신으로 몰려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직 아무도 개봉하지 않은 바지주머니엔 만 원짜리 두 장과 버스카드 한 장이 재개발축의금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징검다리

                           전숙

 

산다는 것 어찌 보면 징검다리 건너는 일이지요

 

아스라한 둔덕을 건너다보며

긴 한숨을 몰아쉴 때

젖꼭지처럼 까맣게 반짝이는 별빛들

어미의 마음으로 누군가 괴어놓았을 징검돌들

건너가는 누구의 발걸음도 불안하지 않도록

흔들리는 가슴끼리 이리 내어주고 저리 덧대어서

하지 않은 약속처럼 아귀 맞는 조약돌이 되어

사이사이 요리조리 끼워놓은 정성을 딛습니다

아지 못한 그이의 지극한 마음이 길을 잡아줍니다

 

산다는 것 어찌 보면

같으면서 다른 우리끼리

이름도 없이 빛나는 은하수의 작은 별들처럼

이리 내어주고 저리 덧대어서

서로의 눈물을 괴어 징검돌이 되어주는 일이지요

 

열매의 기쁨을 위해

불꽃으로 스러져가는 저 꽃잎처럼

계절을 건너기 위해

가을의 징검다리가 된 저 낙엽처럼

 

우리는 또 누구의 눈물을 딛고

오늘을 건너고 있는 것일까요.

 

 

 

 

 

냄새의 역사

                              전숙

 

용산역에서 마지막 열차를 기다린다

눈동자는 텔레비전 화면에 빠져있는데

눈치 없는 후각세포가 어느 냄새의 역사를 파헤친다

대합실 세면장에서 고양이세수로 시치미 뗀 냄새가

양파껍질처럼 한 겹씩 벗겨진다

아마 세 번쯤의 겨울을 이 대합실에서 보냈을,

몇 번쯤 쫓겨났다가

참나무 연기처럼 꾸역꾸역 스며들었을

냄새의 역사들이 의자에 박혀있다

냄새도 닮은 무늬끼리 좋아하는지

교환하는 눈빛에 싸구려로션 같은 끈적함이 배어있다

아침샤워로 냄새를 감쪽같이 지우고 나온

냄새초년병들은 오래된 냄새를 피해 자리를 옮긴다

백화점에서는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이라고

하루치 냄새와의 이별을 재촉한다

백화점이 소등되고 한참 뜸을 들인 후

정처 없는 냄새들은 떠나라며

경고도 없이 모든 채널의 화면이 죽어버린다

해진 등산복차림의 나이깨나 먹은 냄새들은

멸시로 쌓은 산봉우리 몇 개쯤은 가볍게 넘어왔다는 듯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줄도 모르고

삼년치의 냄새를 메고 간다

 

집 밖의 시간에서는 단내가 난다

오래된 냄새일수록 땔감으로 쓰일 만큼 뜨거운 불이 들어있다. 

 

 

 

귀향

                                  전숙

 

1.안개 속으로

무진댁의 고향이 무진이란 걸 봄 안개의 아득한 품에 잠들어있는 그녀를 보고서야 우리는 깨달았다. 치매를 앓던 무진댁은 자식들이 팔아버린 논배미를 에돌았다. 눈치 보듯 슬금슬금 피를 뽑고 나락을 쓰다듬었다. 무진댁을 돌보던 사촌이 대처에 있는 아들에게 통문을 하고 그녀는 요양원을 거쳐서 딸네로 갔다. 딸네서 백 일째 되는 날 무진댁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 이레 후에 순찰을 돌던 경찰이 안개 속으로 까무룩 스러져가던 무진댁의 진달래 빛 스웨터를 알아보았다.

 

2.낙화

길을 벗어난 자동차바퀴 같은 그녀를 젖은 논바닥이 안쓰럽게 물고 있었다. 갈기를 세운 꽃샘바람에 실낱같은 숨결은 살얼음이 바삭거렸다. 무진댁의 몸을 물고 있던 논은 볏짚으로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 그녀는 생의 담벼락 아래로 능소화처럼 통꽃 째 툭 떨어졌다.

 

3.귀향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삭아가는 볏짚을 한가슴 따뜻하게 안은 채로 질척거리는 생의 습기를 거두어들였다. 볏짚을 들어내자 논바닥에는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무진댁의 얼굴과 가슴과 무릎이 음각으로 새겨져있었다. 귀향한 그녀의 몸을 타고난 지형뿐만 아니라 그녀의 퇴행된 시간들이 무채색으로 덧칠한 활처럼 휜 무릎이며 굵어진 손가락매듭까지 한 장의 항공지도처럼 논바닥이 기억하고 있었다.

 

                                                                           - 원탁59호집중조명대표시

가을로 가는 승천보

                                                   전숙

 

승천보에 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

푸른 마음엔 뭉게구름 하얗게 부풀어 오르는데

어서오라는 듯 갈바람이 가을의 초입을 정갈하게 쓸어두었다

연분홍 자주 하양으로 염색된

코스모스 손수건이 기다림처럼 나부낀다

다시는 젖지 않겠다고

달라붙는 물기를 툴툴 털고 뭍으로 올라선

억새들이 눈물꽃을 피우고 있다

지긋지긋한 상처가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고봉밥 같은 저 다리 때문이라고

마음 둘 데 없는 저 구름 때문이라고

하롱하롱 물든 저 노을빛 때문이라고

개망초꽃 망설이며 고실라지는데

이제 막 심지를 돋운 초승달이 하늘 창에 내걸린다

 

어디쯤 오고 있니

기다리는 마음은 벌써 다리를 건너

코스모스군락을 헤치고 억새밭에 뒹군다

잡을 수도 놓칠 수도 없는

아픈 계절이 영산강처럼 흘러가고 있다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작별한 것 같기도 한

경계에서

자전거길이 시간의 바퀴를 굴리고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돌이켜보면 나의 길은

너에게로 돌아가거나 너를 기다리는 도중이었다.

  -원탁 테마시 강

 

 

여자의 입술에는 지렁이가 산다

                                                      전숙

 

적색1호 립스틱을 입술에 문지른다

죽은 듯 엎드려 있던 지렁이가 깨어난다

입술의 주름이 꿈틀꿈틀 기어가는 사이에 여자의 욕망이 있다

 

여자가 여자에게서

또 그 여자의 여자에게서 전염된

붉은 욕망은 봄날의 꽃처럼 증식하였다

붉은 꽃잎 한 점이 입술에 날아 붙어

아가씨의 땋은 머리처럼 유전자지도가 비비빅 꼬이는 동안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곱다는 지렁이의 붉은색소를 찾아냈다

 

땅만 보면 기어나가는 여자의 입술

상추밭에도 장다리 밭에도 입술이 기어 다닌다

여자는 입술을 주워 틀니처럼 입에 끼운다

 

지렁이가 꿈틀할 때마다 여자가 피어난다

여자의 입술이 세상의 암흑을 뚫고 있다

입술의 배설물을 받아먹은 꽃자리마다 화엄벌이다.

   

 

고비의 어미

                                    전숙

 

칼이 된 그리움이 있다

 

고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죽은 자리에 풍장을 하고

어미의 앞에서 새끼낙타를 칼로 찔러 죽인다

어미는 새끼의 냄새를 일 년도 넘게 기억할 수 있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바꾸는 고비에서

풍장한 곳을 찾기 위해 어미낙타를 데려가려는 것이다

 

고비의 낙타는 속눈썹이 두 겹이고

혹도 쌍봉이고

가슴에 품은 그리움의 주머니도 두 개여서

새끼를 찾고 그리워하는 정이 가축 중에 제일이다

 

기억하는 한 살아있다며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불가촉천민 같은 서러운 냄새를

사막의 지독한 모래폭풍에도 놓치지 않고

세상을 온통 새파랗게 물들이는 고비하늘,

그 시원의 파랑에도 물들지 않고

잘근잘근 음미하던 야생화의 향기도 젖히고

밤이면 거침없이 쏟아지는

미리내의 빛줄기에도 흘려보내지 않고

건초의 뼈보다 더 질긴

모래폭풍의 손아귀보다 더 억센

주머니에 각인시켜서

 

한해 전에

부풀어 오르는 목젖을 넘어간

그 비린 그리움을 퍼 올리며

어미는 망망한 고비를 건넌다.

                                     -푸른사상 여름호

 

 

시간의 식욕

                             전숙

 

강물이 강물이 흘러간다

물결에 몸을 맡기면 시간의 식욕이 육질을 삼켜버린다

지난봄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기왓장의 송곳니 틈새로 스며들어온 달빛

아랫목을 기웃거리다가 내려앉은 구들장에 엉거주춤 굳어버린다

대나무로 버틴 바람벽엔 허공이 숨구멍을 뚫고

드나드는 바람들 쉼 없이 앓는 소리를 낸다

늙는다는 일, 시간에게 구멍 숭숭 뚫리는 일

시간의 식습관은 육질을 먹어치우는 일

산수유꽃잎 노을에 젖는데

파인 곳마다 물이 고인 폐가에서 노랑턱멧새는 목을 축이고

고실라진 유두는 쌀항아리 구멍 난 바닥을 질끈 긁어본다

허물어진 강둑에 파묻힌 폐가는 남은 육질에 뻥뻥 구멍질이고

 

유두를 빨겠다고 울어대던 아이가

구강기의 기억을 강물에 흘려보내는 사이

뚫린 기억의 저편에 미라로 말라가는 유두가 누워있다

먹이고 씻어주면 강은 흘러가는 것

폭삭 주저앉을 때까지

시간의 식욕은 현재진행형이다.  

 

빨래

                                          전숙

 

셋째 고모는 오뚝한 바지랑대에 걸터앉아

바람과 햇살과 노닥거리는 걸 좋아했다

방망이질 당한 빨래처럼 욱신욱신 스며든 생의 지극한 물기

햇살과 바람이 말려주면

마음까지 고실고실 하다는 고모

 

기사식당을 하는 고모는 소위 ‘미친 여자’였다

소년과부가 병인이라는 고모는

빛 좋은 날이면

햇살과 바람을 초대하고

바지랑대에 높이 높이 빨래를 널 듯

오거리통에 그녀를 널었다

접힌 곳이 그늘지지 않도록 탈탈 털듯이

그늘진 옷가지는 훌훌 벗어던지고

태초의 울음인 알몸을 구석구석 햇살과 바람에 말렸다

 

그런 날이면

그토록 고모를 엉망으로 젖게 한

장맛비 같은 울음이 그치는지

밤마다 골방에서 주룩주룩 들리던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변인과 문학 2014

 

 

몽돌에게로 가는 길

                                     전숙

 

바위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모래들은

무의도에 가보면 안다

그곳에는 작아지고 부드러운 일이

필생의 꿈인 바위가 있다

 

부서지고 깎여서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몽돌이 되기까지

오체투지로 길을 걷는 호룡곡산의 바위들

 

붉은 장미 같은 단심으로

영웅심을 해체하고 있는

상처 낭자한 그 붉은 빛 해변에 서면

사는 일이 얼마나 뜨거운 일인지

금석문을 새기는 바위를 읽는다

어느덧 내 마음의 화덕에도

뜨거운 불길이 활활 일어

마천루처럼 치솟던 욕심이 사그라진다

사리처럼 광채만 남은 내 마음의 몽돌 하나

그 부드러움에 마음까지 가려워져서

나는 허공의 등을 훠이훠이 긁어주는 춤꾼이 된다

 

깨어지고 나뉘고 뭉그러져서

세상의 모든 발바닥을 부드럽게 받아주는

하나개 모래사장

바람이 가만가만 붓질하면

모래 속에 숨겨둔 춤사위가 덩실덩실 들썩인다

 

밟혀도 밟혀도 웃고 마는 몽돌처럼

무의도에 들면 누구도

영혼의 웃음인 춤을 멈출 수가 없다.

                                       -2014한국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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