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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계절의 시
우리가 사랑할 때
박 설 희
1. 이제 막 시인의 길을 걷는 그대에게
끝까지 가보지도, 미학적으로 엄살을 떨지도, 비겁의 자취를 통렬하게 드러내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시인이지만 이제 막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후배에게 한 마디 하라고 멍석을 깔아 준다면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이 예술가의 본성이다. 문학은 다른 이들의 여론에 제정신 이상으로 신경 쓴 사람들의 부숴진 파편으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그 시인이 유명 출판사와 첫 시집을 계약했다고 흥분과 불안이 뒤범벅된 얼굴로 찾아와 그 말을 전하는 순간에도 어쩔 줄 모른다면 우선 축하를 해준 뒤 차분하게 얘기해 줄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건 큰 격려와 힘이 되지. 그러나 그건 다만 그대에게 찾아온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선물을 누리되 너무 연연하지는 말게. 늘 칭찬만 하는 사람을 경계하고 작품에 대해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꿋꿋이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 이건 평생의 과업이다 생각하고 멀리 보는 것, 그게 좋은 작품을 오래 쓸 수 있는 비결이지.”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그러나 우리 주변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평에 의해 일희일비,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않으면 불안한 연예인처럼 구는 문학인이 얼마나 많은가.
백 년 전에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 작가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자기표현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예술로서의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는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는다면 혼자 있을 기회가 별로 없다. 창작품을 통하지 않고서도 작가들은 익명의 사람들과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 전자매체를 통한 일련의 진행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문학의 운명과 직간접적으로 어떻게 연관되려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작가는 실재의 현존 속에서 더 많이 살아갈 기회를 가지고 있고, 그 실재를 찾아내고 모아들이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라는 점이다.
올해도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해서 작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신인들이 많이 등장할 것이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고 내 작품의 개성과 참신함을 위해 고민하고 잠을 못 이룬다면 스스로의 성취감과 만족감만으로도 작품의 동력이 될 것이다. 내 스스로에게 늘 그렇게 다짐한다.
2. 현실에 대응하려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창밖에는 눈이 내린다. 날벌레처럼 흩날리다가 아무데나 가리지 않고 내려앉는다. 눈의 평등성이랄까. 눈의 엉덩이는 수다스럽고 편해서 머물고 싶을 만큼 머물다 홀연히 사라진다. 오지 말라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고 가지 말라고 붙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제가 있고 싶은 만큼만 머물다 간다. 무심하다.
영문 키를 누르고 한글 자판 순으로 ‘눈’을 치면 SNS가 된다고 여균동 영화감독이 『실천문학』2011년 겨울호에서 쓴 글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눈은 공중에 난무하는 문자 같기도 하고 소리 없는 함성 같기도 하다. 각각의 대상을 향해 날아가는 문자들에 흰색을 입힌다면, 그 문자들이 나를 관통하고 사람들의 머리를 관통하고 내장 깊숙이 헤집다가 다시 빠져나와 제 갈 길을 간다면……. 그것은 도시뿐 아니라 강과 바다를, 산과 들을 횡단하다가 어느 순간 툭 떨어져 발밑에 쌓이기도 할 것이다. 문자들의 그물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소셜네트워크시스템의 위력을 선거와 쟁점들에서 실감한 작년 한 해였기에 여균동 감독의 글을 읽는 이들은 제각각의 ‘눈’을 상상하며 웃었겠다. 하지만 내 웃음은 흔쾌하지만은 아닌 웃음이었다.
눈발은 창밖에서 저렇듯 문 두드리는데
오늘 같은 날, 그대는
어떤 낯선 자리에 끼어 버석대는가.
-신덕룡 「홍탁삼합」 부분 (『시와문화』 2011 겨울호)
언젠가부터 주변에서 희망, 행복이라는 말을 많이 쓰기 시작했다. 희망, 행복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시대는 희망과 행복이 넘쳐나는 시대일까, 아니면 그 말의 주술적 힘에 기대어야 살 수 있는 시대일까?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주머니에 복권 한 장쯤 다들 넣고 다닌다고 한다. 지금 이 시대는 ‘복권 권하는 사회’인가. 오천 원짜리 복권 한 장 사서 지갑에 고이 넣고 다니며 천만분의 일의 확률일지라도 당첨됐을 때의 행복감을 상상해보며 마음이 뿌듯하다면 오천 원으로 사는 행복이 비싼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사람살이가 그래서일까,『실천문학』2011년 겨울호는 파격이었다. 한 권의 종합문예지가 신작시나 소설 등을 배제하고 <21세기 문학과 예술의 실천논리>라는 제목 하에 온통 한 가지 특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걸 보면서 갖가지 의문이 일었다. 그 배경이 궁금했고 그 효과가 궁금했다. 사회적 실천 운동과 연대에 관한 여러 분야의 글들이 읽을 만 했고 문학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질문을 던지는 기획 의도가 와 닿기도 했는데, 과연 그 다음에 어떤 실천을 이끌어낼지 2012년 봄호가 기대된다.
작년 말 실천문학사에서 열린 <실천포럼>에 참석한 현기영 소설가는 문학은 적극적 인식 작용이며 현실에 대응하려면 풍자, 유머, 위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미학적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충분히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창밖에선 쉬지 않고 눈이 내린다. 길눈을 바라보며 불안이 불안해하고 절망이 절망하고 고독이 고독한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3. 적-사랑의 증거
임진각에서 제주 강정마을까지 일번국도를 따라 걷는 작가들의 평화 릴레이는 놀라운 발상이었다. 평화를 화두로 구간별로 십 킬로 남짓 나누어서 걷는다는 것. 자기만의 방에서 걸어 나온 많은 작가들이 글이 아닌 몸으로 표현하는 평화. 작가들은 섣불리 방을 나서지 않는다. 나서는 순간 글을 쓰는 작업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자신만의 고유 공간을 잃어버림에서 오는 위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하나의 기치 아래 순차적으로 장기간 참여한 사태는 내가 문단이라는 추상적 공간에 발을 디딘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시급하고 절실했던 것이다. 글보다는 몸짓이 더 빠르고 직접적인 의사표현이면서 실질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으므로. 아마 봄쯤이면 이렇게 걷는 과정에서 일어선 시들이 여기저기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한겨울의 바람과 햇빛, 국도변의 먼지와 배기가스를 담은 언어들이 지면과 인터넷에 등장할 것이다.
걸음은 걸음을 부르는지, 오산대역 광장에서 송탄소방서까지 십 킬로 남짓 걸은 며칠 후 눈 쌓인 산길을 걷고 싶다는 충동으로 무작정 길을 나선다. 한파주의보가 내려 전국이 꽁꽁 얼어붙은 날, 터벅터벅 걷다가 태백산 입구에서 보았다, 얼음나무를. 처음엔 분수의 물이 솟아오르다 얼어서 나무 모양이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얼음 속에 나무 줄기랑 가지의 형상이 있었다. 얼음 속에 갇힌 그 모습을 보고 관상용으로 이런 짓을 한 사람들이 참 잔인하다고 분개했다. 그런데 설명을 들어보니 단순히 관상용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나무를 살리려고 일부러 물을 뿌려준 것이라 했다. 얼음에 갇힌 나무는 얼어 죽지 않는단다. 얼음이 오히려 나무를 보호해 주는 셈이었다. 열로 열을 다스리고 찬 것으로 추위를 다스리는 역설의 이치.
나무들은 이 별에 우리보다 훨씬 먼저 자리 잡았고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중력과 더위와 추위를 묵묵히 감내해 왔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직립이었던 그들. 태백산의 나무들은 눈을 이고 있거나 가지에 서리가 엉겨 붙어 그 아름다운 모습에 탄성을 자아내게 했지만 몇 차례의 폭설로 인한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두 동강으로 찢긴 나무와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곳곳에 있었다. 사람처럼 나무들도 이 겨울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시인들은 나무에서 자연과 사람살이의 양면성을 보는지 모른다. 초월하든지 동일시하든지.
적들은 내 사랑의 증거. 사랑이 없었다면 적들도 없었으리. 그러나 이제 “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어지네. 적들에게 지쳤기 때문이지. 나는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므로 그들도 더 이상 나의 적이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네.
-오민석, 「자작나무의 거리」부분(『 시와문화』 2011 겨울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화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 그것이 “적”에 대한 내 사랑의 유효기간이다. ‘적’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사색의 시편을 남긴 김수영을 비롯해 숱한 시인들이 ‘적’에 대한 인식과 느낌을 읊어왔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적들은 내 사랑의 증거”라고 말한다. “사랑이 없었다면 적들도 없었으리.” 그러나 적들에게 지쳐 어느 순간 “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므로 “그들도 더 이상 나의 적이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시에선 “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적들”에게 지친, 자포자기에 가까운 내 마음 상태다. “적”이란 단어엔 “사랑”의 감정이 내포돼 있는데 “적”과 싸우고 싶은 의욕조차 없어졌을 때 이젠 사랑이 식었음을, “적”이 정녕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버렸음을 자각했을 때의 허무함과 홀가분함. 사랑 따라 가버린 “적”.
역설적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항변하고 잘못됐다고 질타하는 것이 사랑의 한 가지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사랑의 열병을 앓는 중이다. 정권에 대한, 사회구조에 대한 우려와 투쟁들이 그 증거이다.
생이 소진될수록 아름다워지는 시간 앞에 서 있다
내 입 속의 미혹(迷惑)이 달아 또다시 혼기가 차오른다
항상 사랑한다,
그것이 내 나이인 줄 알아다오.
-고은강 ,「여자의 나이」(『문장웹진』2011. 12월호)
사랑에 관해서 「자작나무의 거리」와 전혀 다른 어조와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는 이 시는 3행과 4행이 압권이다. “항상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것이 내 나이”라고 말한다. 사랑하고 있는 한 화자는 늙지 않을 것이고 “생이 소진될수록 아름다워지는 시간” 앞에 계속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나이」라는 제목이 걸린다. 사랑하는 한 늙지 않는 것이 여자만의 일일까. 남자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여자"에 한정시켜 제목에서 시의 힘을 미리 빼버린 느낌이다.
“최고의 스타일이란 자기 감흥을 가장 잘 표현하고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것”(니체)이라 했던가. 위 두 시인의 “사랑”을 표현하는 스타일의 차이가 흥미롭다.
4. 해탈과 회한 사이
나무들의 귀를 빌려 듣는다 그날의 물소리를
나무들의 혀를 빌려 맛본다 그날의 바람을
나무들의 말을 찾아
미루나무 숲이 있는 강가로 가면
수천의 귀를 열고 기다리는 나무들
천수천안의 손을 흔든다
한그루 나무가 되고 싶어
나무들의 영토에 편입된 날
나무들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을 버리고
나무들의 수화를 익히는 날
나무들은 아무것도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큰 키의 미루나무들이 노을에 푹푹 빠져 돌아올 때까지
그날 내가 한 일은
나무 향기에 흠뻑 젖어
강물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일
그날 내가 한 일은 순한 입술로 그려내는
강물의 구화口話를 해독해 내는 일
강물 속에 가라앉은 맑은 바람 한 줄기 들어 올리는 일
그날 내가 한 일은,
-임형신, 「다시 강가에」(『불교문예』 2011 겨울호)
이 시의 화자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선 강가에서 한 그루의 미루나무가 되는 체험을 한다. 나무들의 귀로 물소리를 듣고, 혀로 바람을 맛본다. 일종의 ‘나무되기’인 셈이다. “한그루 나무가 되고 싶어 / 나무들의 영토에 편입된” 그 날 “나무들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을 버리고 / 나무들의 수화를 익히”려는 내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강물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강물의 구화口話를 해독해” 내고 “강물 속에 가라앉은 맑은 바람 한 줄기 들어 올”린다. 그는 그날 그 일만 한다. 그것이 전부다.
미적 차원은 시공간의 현실적 영역 안에서 작동하는 문명적 차원과 생물학적 차원을 자신 안에 포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지금 여기의 현실을 초월하는 열려진 차원으로 설정된다.(백영제, 「예술발생의 생물학적 조건」) 한마디로 지적능력과 본능을 아우르는 감정능력이 미적차원이란 것인데 위 시의 화자도 “지금 여기의 현실을 초월하는 열려진 차원”의 경험을 한다. 나무나 강, 바람과 같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 현실을 초월케 하는 힘이 아닐까.
나무와 강의 이미지가 잘 살아 있는 위 시에서 결정적으로 아쉬운 것이 있다면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따로따로인 ‘나무’와 ‘강’과 ‘나’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는 점이다. 한 그루의 나무로 강물과 더불어 흘렀으면 좋으련만 끝내 나무가 되지 못하고 “나무 향기에 흠뻑 젖어” “강물의 구화를 해독해 내”고 분별하려 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고치를 막 벗어나려다 주저앉은 나비 같다고나 할까.
해탈이 안 된다면 다음과 같은 뼈아픈 회환은 어떠한가.
용서해다오 내가 그랬던 거 그때 막 갔던 거 짓밟은 거 그냥 돌아서 온 거 말 못한 거 차버린 거 못 가진 거 못 가진 줄 알았는데 다 가진 거 그러고도 자꾸 서러워 울었던 거 잘 가라 말하지 못했던 거 돌멩이만 걷어찬 거 하늘만 바라본 거 못 다 한 거 그러고도 미안하다 말 못한 거 먼 산만 바라본 거 주머니는 텅 비었지만 속은 그득했던 거 그러면서도 자구 아프다 말한 거 너의 아우성을 말없이 넘어온 거 숨어 돌아서서 눈물만 흘린 거 너 없어도 이리 잘 살고 있는 거 딱 거기까지만 살겠다고 맹세한 거 무수한 약속의 촛불을 켰던 거 돌아오며 다 꺼버린 거 이 거친 회환을 어느새 용서해 버린 거 다 옳다 괜찮다 해버린 거 이제 눈물도 참회도 말라버린 거 너를 두고 나 혼자 저 먼 바다로 내빼는 거 거거 거거 더듬더듬 우물우물 말꼬리를 흐린 거
-최영철, 「거」 (『불교문예』 2011 겨울호)
십분 공감이 되는 시다. 살다 보면 용서해달란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고 떠나보낸 인연들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가슴을 치는 부분이 “못 가진 줄 알았는데 다 가진 거” “무수한 약속의 촛불을 켰던 거 돌아오며 다 꺼버린 거” 그럼에도 “이 거친 회환을 어느새 용서해 버린 거” 다. 어쩌면 우리는 “다 옳다 괜찮다” 해버리며 고함치고 화내야 할 일을 그만 눈감아 버린 건 아닌지, 그것을 용서받아야 할 것은 아닌지. 더구나 “이제 눈물도 참회도 말라버린” 뒤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공허한 눈길로 말을 더듬고 “말꼬리를 흐린” 소시민으로 존재하는 것. 김수영이 가장 경계했던 적, 소시민으로.
“왕궁”과 “왕궁의 음탕”에 분개하는 대신 설렁탕집 안주인에게 욕을 하고, 야경비 받으러온 야경꾼을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 증오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김수영처럼 지난 일월에 나는 화를 내며 싸웠다. 웅진코웨이 코디, 신문보급소 직원, 경기문화재단 말단 비정규직원……. 큰 싸움은 못하고 만만해 보이는 “적”들과 싸운다. 그런데 그 비겁과 옹졸도 사랑의 일종이라고 앞서 오민석의 시에서 말했던가. 그러면 위로가 되는가.
한 편의 시를 읽고 내부에서 숱한 언어들이 반향을 일으키고 어둠 속 웅크리고 있던 느낌들이 생생하게 살아날 때, 그 시의 공감력과 환기력은 아무도 측량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시 한 편이 시인의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해준다.
방바닥에 흩어져 있는 겨울호 문예지들을 정리하면서 그 속에 실린 평론들을 떠올려본다. 한 편의 평론이 작품의 이해를 돕기는커녕 인용문들이 난해하여 독자들이 평론 자체에 빠져 허우적대게 된다면 잘 된 평론인가? 평론이 작품보다 더 어렵다면 문학 평론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다. 그것은 학술논문에 가까울 것이다. 평론들을 보면서 자꾸 불편해지는 또 한 가지는 이제 우리도 남의 전거에 기대지 말고 독자적인 안목으로 작품을 평할 때가 오지 않았나, 그런 시도를 하는 평론가들이 좀더 많아져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흰그늘의 미학>을 펴낸 김지하 시인의 시도나 임우기 평론가의 행보를 높이 평가한다.
현상을 분석하고 뒤따라가는 평론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앞질러 가는 담론을 제시하는 평론, 서양의 모모한 이론적 준거에 기대지 않고 창작자들과 일반 독자들이 함께 읽을 수 있는 평론을 기대해 본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으면 더 재미 있을것 같습니다.
글 좋군요.사유가 많이 깊어짐도...오랫만에 들어왔더니 잘 이어가고 계시네요~반갑습니다!
다들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봄이면 꽃구경 가자고 조를 때가 있었지요. 그때 그 얼굴들이 그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