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 분노 폭력 인색 등 세상의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500여 년 전, 혼란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
인도에서는 부처님 등 여러 성인들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다양한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공자는 옛 성인들이 만든 규범 즉 예(禮)를 바로 세움으로써 혼란한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 안연이 인(仁)을 실천하는
구체적 조목에 대해 묻자,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논어 안연편)
굳이 역사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세상은 비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더욱
참담한 것은 세상을 혼란하게 만든 사람들이 법과 윤리를 앞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봉건시대에는 역적이 왕위를 빼앗으면서도 천명으로 양위받았다고 위장하였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법정에 섰더라도 끝까지 사실을 부인하며, 비리를 저질렀으면서도
굽히지 않고 결백을 주장합니다. 윤리를 생명으로 하는 종교계에서도 세속 못지
않습니다. 위선과 위장, 은폐 앞에서는 법과 윤리뿐만 아니라 종교도 무력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많은 스승들이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청정에 대한 올바른 앎을 얻으면 생사해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거나,
또는 규범이나 금기, 서원, 옛부터 내려온 교리에 청정함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부처님은 이들 수행자들을 만나면서 이들이 겉으로 말하는 것과는 달리 안으로는
탐욕과 분노 인색함 등을 여전히 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법과 등불] 9월 16일 모임에서는 <여덟 게송의 품> 제3장에서 5장까지
공부합니다. 제3장은 <사악한 생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 제4장은
<청정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 그리고 5장은 <최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입니다.
이들 경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은 당시 계율이나 금기나 서원
또는 청정한 견해를 주장하는 수행자들이 실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무엇보다 그들 수행자들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탐욕과 위선을
통렬하게 지적합니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탐욕과 분노, 슬픔과 후회
등의 고통에서 벗어났는지 물었습니다.
우리는 위 세 경전을 통해 당시 외도 스승들의 다양한 주장에 대해 부처님은 어떤
평가를 하였는지, 그리고 진정한 해탈을 위해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쳤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도 또한 경전에 대한 지식이나, 계율 또는
자신이 속한 종파에 대해 권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제 3, 4, 5장 세 경전을 읽고 함께 대화를 나눌 주제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견해 계율 서원 금기 등은 번뇌를 없앨 수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계율을 지키고 서원을 세우는 내적 의식(意識)의 성격은 무엇이며,
왜 이러한 의식은 번뇌를 없앨 수 없는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살펴봅니다.
2) 청정함을 본다면 그 앎(또는 깨달음)으로 번뇌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왜 이러한 청정이 아직 번뇌가 남은 청정이라고 평가하는지 성찰합니다.
3) 감각적 지각이 집착을 가져오는 연기적 과정은 무엇인지 사색합니다.
4) 하나의 견해에 대해 <최상>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태도는 논쟁을 가져온다고
부처님은 말씀했습니다. <최상>이라는 가치판단의 성격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5) 부처님은 거룩한 님들은 궁극적인 청정을 선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지 경전을 통해 살펴봅니다.
제3장에서 5장까지 경전 전문은 따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