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1월 17일 오후 사명당의집에서 삼계탕을 준비하는 회원님들과 함께 한 성도절 법회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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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월 17일)은 성도절입니다. 성도절은 고타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날이니, 우리 불자로서는 참으로 뜻 깊은 날입니다. 우리 작은손길 도반들도 이 날을 기념하며,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다나(자열경)에 보면, 부처님은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으시고, 7일동안 가부좌를 하고 오직 해탈의 기쁨을 누리며 앉아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연기법을 되풀이 사색하는 동안, 커다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흔들림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7일이 지나 날이 개이자 부처님은 삼매에서 일어났습니다.
경전(우다나)에서는 비 바람이 치는 동안 큰 용이 꽈리를 틀어 부처님을 감싸서 보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가 그치자 용왕이 바라문 학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세존께 합장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볼 때, 지나가는 한 바라문이 길을 가다 나무 밑에서 비바람을 맞고 있는 수행자를 보고 보호해준 것은 아닌지 상상해 봅니다.
부처님은 바라문 학인에게 이와 같은 기쁨의 시를 읇었습니다.
가르침을 배운 자, 보는 자, 만족한 자에게,
멀리 여읨이 행복이고, 생명에 대한 자제,
세상에서 폭력의 여읨이 행복이다.
세상에서 탐욕을 여의고,
감각적 쾌락을 여읨이 행복이다.
그리고 '내가 있다'는 생각의 제거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행복이다.
- <우다나(전재성 역)> 2. 무찔린다의 품, 무찔린다의 경
부처님의 시를 곰곰히 생각하면, 이 게송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이요, 평생 세상을 향하여 가르친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욕망과 집착이 모두 원인과 조건으로 형성된 것이며, 이 모든 원인과 조건이 내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부처님은 <멀리 여읨(遠離)>을 얻어, 번뇌의 묶임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신에게 형성된 번뇌가 불꺼진 것을 스스로 증험하신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진리와 해탈의 길을 평생토록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생명에 대한 자제와 사랑, 폭력을 멀리 여읨, 그리고 탐욕을 멀리 떠나라는 가르침은 2,5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세상을 깨우는 목탁소리입니다. 이 모든 진리에는 욕망과 집착이 내가 아니라는 부처님의 심오한 깨달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승부를 가리거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얻고 잃는 것에 자기의 자존심과 심지어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어둠을 일깨우고, 세상의 고통을 없애줍니다. 어둠이 사라진 자리에는 생명에 대한 자제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구하는 까닭이 실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장 오래된,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도 자신을 살피게 하는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요즈음 승속간에 깨달음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논쟁이 한창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토론에 앞서 먼저 왜 우리가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을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탐욕과 폭력, 무지와 분노는 인간 세상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그러나 오늘 태어난 생명도 만나야 하는 어둠이요 미망입니다. 탐욕 분노 폭력 슬픔 두려움은 우리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으며, 우리 삶 또한 우리의 고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통의 심연은 깊고 깊습니다. 부처님이 집을 떠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진리를 추구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츨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오늘 우리 또한 탐욕과 분노 폭력 무지 등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탐구하는 보리심은 여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