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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김태균)
세월호 침몰 후 무겁기만 했던 머리가 박근혜 탄핵안 가결로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탄핵안 가결을 선언하며 의사봉을 내리치는 장면은 다시 봐도 짜릿하기만 합니다. 박근혜 탄핵안 가결은 국민의 목소리와 후보시절 내세운 공약은 무시한 채 사리사욕에만 혈안이던 국회의원들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박근혜 탄핵안 가결로 인해 정의에 대한 목마름과 정치인에 대한 배신감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어 국민은 지금 신이 났습니다. 신난 국민을 보며 가슴 한 편이 우울해졌습니다. ‘의혹에 휩싸인 대통령을 재판해 달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 성사된 것을 두고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비상식적인 나라에서 살아온 것일까요.
상식적인 나라란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손해 보지 않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착하게 살면 호구가 됩니다. 그래서 국민은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나쁘게 사는 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나쁘게 살면 살수록 성공과 가까워지는 곳이 또한 이 나라입니다. 연일 최순실, 박근혜, 김기춘, 차은택과 같은 이들이 얼마만큼 나쁘게 살아야 성공하는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묻고 싶습니다. 최순실, 박근혜 등을 욕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일상은 떳떳한가요? 학교에서, 직장에서, 관공서에서, 병원에서,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원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친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나요?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박근혜 탄핵안 가결에 기뻐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를 계기로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일상의 변화 없는 사회개혁이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실재적 모습 이미지로 취급
“현대적 생산조건들이 지배하는 모든 사회들에서, 삶 전체는 스펙타클들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 직접적으로 삶에 속했던 모든 것은 표상으로 물러난다.
삶의 각각의 측면에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들은 공통의 흐름 속에 융합된다. 그 흐름 속에서 삶의 통일성은 다시는 재건될 수 없다. 편파적으로 관찰된 현실이, 자체의 고유한 일반적 통일성 속에서, 별개의 거짓세계, 한갓된 관조의 대상으로 펼쳐진다. 세계에 대한 이미지들의 전문화는 자율적인 이미지들의 세계 속에서 재발견되고 완성된다. 그 세계에서 기만자들은 그 자신을 기만한다. 스펙타클 일반은, 삶의 고착된 전도(顚倒)와 마찬가지로, 살아있지 않은 것의 자율적 운동이다.” -본문 中
프랑스의 지식인 기 드보르는 그의 저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현대인의 삶은 스펙타클들의 거대한 축적물로 채워져 있고, 우리 삶의 실재적인 모습은 이미지 정도로 취급된다고 말했습니다. 스펙타클의 사전적 의미는 ‘광경, 공연, 연극, 영화, 흥행물, 엔터테인먼트 사업, 연출’ 등인데, 드보르가 제시한 스펙타클의 의미는 ‘압축된 이미지’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드보르는 현대인의 삶은 수많은 이미지로 채워져 있으며, 현대인들이 실제로 행하는 행동들이 단면의 이미지로 압축되어 통용된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SNS를 떠올리면 드보르의 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SNS은 자신의 일상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수단입니다. 다시 말해 SNS에서는 한 장의 사진이나 간단한 동영상으로 현재의 삶이 압축되는데, 실제의 삶도 SNS처럼 단편적인 이미지로 압축되어 가치가 저하되고, 입체성을 잃어버리며, 삶에 있어 과정은 고려되지 않고, 삶을 결과로만 판단한다는 의미가 드보르가 제시한 스펙타클이라는 개념에 녹아있습니다.
A는 전자제품을 제작하는 회사의 제품 디자이너입니다. A의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미혼이며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에 살고 있습니다. A는 여가시간을 아이폰 유저모임, 산악자전거 모임, 독립영화 감상 모임, 와인시음 모임 등 다양한 소모임 활동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A는 자신의 모든 소모임 활동을 SNS로 공유하며, SNS상에서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합니다. 다양한 소모임 활동에 푹 파져 있던 어느 날 A는 문득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두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답답한 나머지 A는 소모임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 같은지 물어봅니다. 하지만 A는 소모임 사람들이 들려준 자신의 모습이 소모임 사람들마다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더욱 큰 혼란에 빠집니다. 모두 다 자신의 모습인데 어떠한 통일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어 A는 자신의 삶이 쪼개진 느낌을 받습니다. 소모임 사람들도 자신들의 소모임에서 봐왔던 A의 단면적인 모습을 A라고 판단할 뿐 A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A처럼 상대방의 단면만 보고 관계 맺는 형태가 이제 일반적인 관계 맺기의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비슷한 취향을 공유할 수 있고, 공동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쉽게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 맺기에서는 선을 잘 지켜야 합니다. 취향 공유와 공동의 이익추구를 넘어 상대방의 사생활을 알려하거나 상대방과 함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려는 순간 관계는 맺기는 끝을 맺습니다. 굳이 자신의 모습을 일일이 내비칠 필요가 없어 편하고 간섭하지 않아 자유로운 장점이 있지만 이러한 관계 맺기는 공허함을 동반합니다. 생명력을 느낄 수 없고, 열정적이지 않으며, 편파적입니다. 그럼에도 단면에 입각한 관계 맺기가 만연한 세태를 보며 파편적인 삶을 더 자연스럽게 느낀다는 현대인들 속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드보르의 분석은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도시의 모습을 계획하는 것은 소비’
“현재는 이미 도시환경의 자기파괴의 시기이다. 전원을 ‘도시거주자라는 무정형의 대중’(루이스 멈포드)으로 뒤엎는 도시의 폭발은 소비라는 정언명령에 의해 직접 조정되고 있다. 상품풍요의 첫 단계를 선도하는 상품인 자동차의 독재는 도로의 지배와 함께 환경에 각인되었는데, 이는 낡은 도시중심을 탈구시키며 점점 증대되는 확산을 요구한다. 동시에 도시건축물의 불완전한 재편의 각 단계들은 잠정적으로는 ‘분배공장들’, 다시 말해 주차장의 나대지에 건설된 거대한 쇼핑센터들을 중심으로 양극화된다. 그리고 이 같은 광적인 소비의 사원들은, 체증의 부분적인 재조정을 낳은 후, 그것들을 배격하는 원심적인 운동 내에서 스스로 탈주하지만 그런 직후 그것들은 또한 과잉부화 된 2차 중심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의 기술적 조직은 도시를 인도하여 자신을 소비하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한 일반적 해체의 첫 요소에 불과할 따름이다.” -본문 中
경관을 해치는 흉측한 모습의 고층 아파트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 남광주 고가에 세워진 모 회사의 고층 아파트를 들 수 있습니다. 남광주 고가 인근은 차량 통행량이 많아 소음과 매연 그리고 교통체증이 심각한 곳입니다. 주거지역으로 적절한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파트가 세워진 것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도시의 모습을 계획하는 것은 소비’라는 드보르의 글이 이해를 돕는 것 같습니다. 아파트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주거환경이 좋은 것도 아니기에 남광주 고가에 새워진 고층의 아파트의 의미를 ‘소비 조장’이라는 의미 외로 읽기 힘듭니다. 어느덧 고농도의 미세먼지가 광주의 대기를 가득 메웠습니다. 그나마 광주 전남 지역은 대기오염에서 자유로웠지만 이제 옛날이야기가 됐습니다. 대기오염의 주범은 자동차 매연입니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틀만 자동차를 운행하지 않아도 대기오염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고 합니다. 자동차 보급의 확산은 대기오염의 증가와 함께 도시의 규모도 넓혔습니다. 도시 외각에 주거지가 형성되고 주차장을 보유한 거대 마트가 들어서면서 도시의 모습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그리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집값을 올리고, 소비를 조장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데에 일조한 자동차를 일컬어 ‘자동차의 만행’이라 이름 짓고 싶습니다.
“만족의 기만적 성격은 만족이 끊임없이 대체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즉 그것이 제품들과 일반적인 생산조건들의 변화를 추종한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뻔뻔스럽게도 자기만이 제일 좋다고 단언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재된 스펙타클과 집중된 스펙타클 양자 모두 속에서, 다른 것으로 바뀌며, 계속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은 오직 체제뿐이다. 예를 들면, 구식이 된 상품 뿐만 아니라 스탈린조차도 바로 자신들을 억지로 내세웠던 이들에 의해 폐기된다. 광고의 모든 새로운 거짓말은 이전의 거짓말의 부인이기도 하다. 전체주의적 권력을 지닌 모든 인물의 몰락은 그를 만장일치로 승인한 환상적 공동체를 드러내는데, 이 환상적 공동체는 아무런 환상도 지니지 않은 고독한 인간들의 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본문 中
만족은 절대 이뤄지지 않는다, 대체될 뿐
드보르의 말처럼 만족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족이 또 다른 만족으로 대체되는 시대입니다. 티셔츠를 샀으면 티셔츠에 어울리는 바지를 사고 싶고, 티셔츠와 바지를 샀으면 그에 어울리는 신발을 사고 싶어집니다. 티셔츠 한 장에도 만족하던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희한하게도 소비해놓고도 만족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광고는 자신이 소개하는 제품을 늘 최상의 제품이라 말하며 끊임없이 자기부정을 일삼습니다. 팔아먹기 위해 광고는 항상 자신이 말하는 제품이 최상이라고 말을 바꿉니다. 갖은 방법으로 소비를 조장하는 시대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호구되기 십상입니다. 소비했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세태도 비상식적인 이 나라의 단면입니다.
박근혜 탄핵안이 가결된 후 박근혜를 지지했던 세력들이 점점 더 많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력들은 늙고 외로운 인간들이 집단화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50년 전에 프랑스에서 쓰인 드보르의 글은 이 나라의 형국에 너무나도 잘 들어맞습니다. 파편화 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 파편화 된 삶의 단면만을 가지고 맺어 지는 관계, 소비에 의해 변해가는 도시의 형태, 소비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는 광고, 몰락한 독재 권력을 지지하는 계층의 드러남. 이 모든 것들이 스펙타클 사회의 모습입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그런 사회에 길들여진 개인이 보여주는 단면에 맞서 입체적으로 사고 할 때 사회가 변할 가능성이 잉태됩니다. 입체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은 눈에 보이는 단면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단면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탐구하는 것입니다. 단면에의 즉각적인 반응은 현혹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단면 너머를 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의 공부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편안하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단면 너머를 보는 이들은 소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단면 너머를 보는 이들이 다수로 확산되지 않는 한 사회 변혁이란 불가합니다. 촛불만 들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촛불은 단면을 다른 단면으로 대체할 뿐입니다. 그러니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니 고전을 읽어야 합니다.김태균<인문학 공간 소피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