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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 복되다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6장)
산 위 공동체와 평지 공동체 (17절)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셨다”(17절)는 구절을 뒤집어 보면, 조금 전까지 예수께서는 그들과 더불어 산 위에 계셨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은 누구이고, 산에서 무엇을 하셨던 것일까요? 앞 단락에서, 예수께서는 산 위에서 기도하시고(12절),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13-16절). “사도(apostolos)”라고 불리는(13절) 이 열두 제자는 ‘제자의 많은 무리’(17절)와 구분되는 이들로서, 예수의 부활 이후에 생겨난 첫 교회 시대의 지도자들인 사도입니다. 그러니 사도를 세움은 교회의 설립을 은유하며, 이는 산 위의 사건입니다.
마태복음은 교회를 가리켜 “산 위에 있는 동네”(마5:14)라고 칭합니다. 예수의 첫 번째이자 최고 권위의 말씀은 산에서 선포되고(마5-7장), 이 말씀을 듣는 공동체(교회)는 이 말씀을 듣고자 산으로 모입니다(마5:1). 이는 예수를 새로운 모세로 그리려는 마태복음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말씀이 누가복음에서는 “평지(plain)”에서 울려 퍼집니다(6:20-49). “말씀을 듣는 공동체”는 “교회”를 의미하는데, 마태복음의 공동체는 산 위에 있고, 누가복음의 공동체는 평지에 있습니다.
치유와 말씀의 공동체
평지에 모인 이들은 사도들과 많은 제자들,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 두로와 시돈에서 온 이방인들입니다(17절). 마태와 마가복음과는 달리, 이방인들까지 무리 가운데 포함된다는 사실이 눈에 띕니다. 그렇다면, 이 평지 공동체는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라고 외쳤던 세례 요한의 대망을 성취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하는 공동체라는 취지를 표방합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치유가 먼저 시행됩니다. 예수께 온 사람들의 기대는 ‘고침을 받고자 함’이었고(17절), 예수께서는 이들의 바람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썼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만지다(a[ptw, touch)’는 동사는 ‘점화(點火)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고대 세계에서, 장작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타고 있는 장작과 접촉해서 불을 옮겨오는 경험에 기인한 의미입니다. 치유의 능력을 입기 위해 치유자를 만지는 원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치유에 조건이나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이 치유 후에 평지설교로 알려진 말씀이 시작됩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20절)
산상수훈이 팔복(八福) 선언으로 시작된다면(마5:3-8), 평지설교의 서두는 네 가지 복(福)과 네 가지 화(禍)로 구성됩니다(눅6:20-26). 팔복의 첫 번째는 “심령이(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4:3)이고, 평지설교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20절)는 선언입니다. 복의 주제를 종종 다루는 구약성서와는 달리, 예수께서 복에 대해 말씀하시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많은 주목을 받는 “복” 언명에서, 놀랍게도 복의 첫 수혜자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복이 있다(makarios)”는 선언이 “가난한 자”와 연결될 수 있는가요? 헬라어를 사용하는 고대 문화권에서, “makarios”는 아무런 걱정이나 병약함이나 죽음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신들에게 바쳐지는 헌사입니다. 그리고 신들과 같은 위세를 지닌 이들에게 헌정되는 말이었습니다. 구약성서의 잣대로 보자면, 율법을 존중하고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들이 복이 있습니다(시편 1). ‘가난한 자가 복 있다’는 구절은 율법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공포하시는 복의 선언에서, 복 있는 이들로서 첫 주인공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20절)
가난한 사람이 받는 복은 “하나님 나라(하늘나라)”입니다. 한데, 하나님 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는 말은 받아들이기에 꽤 불편합니다. 가난하다는 것이 무슨 자격이나 상 받을 덕(德)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의인(義人)들이며(시1:1-6), 그들이 인정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얻는 것은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라는 네 번째 복은 지당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는 첫 선언은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가난한 사람(ptwco,j)”은 상대적 가난이 아니라, 절대적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16:20-31)에서, 이 명사는 ‘거지’로 사용됩니다. 이 비유에서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말하자면 천국에 갔다는 얘긴데, 왜 그가 그런 혜택을 입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굳이 찾자면, 나사로는 ‘고난을 많이 받았다’, 즉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 말씀에서, 복을 받으려면 거기에 합당한 의인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주님께 충성하여 복을 받는다는 확신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 상인가, 은혜인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에서의 ‘나라(basileia)’는 국토나 영토 등의 장소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통치’, ‘다스림’의 주권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에 따라, “하나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다”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림(보호, 구원, 자비)이 가난한 이들의 몫이다”는 얘기입니다. 이 선언은 ‘복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천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은, 우선, 상(賞)이기보다는 은혜(恩惠)이기 때문입니다. 상은 잘한 사람을 가려서 수여되지만, 은혜는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가난함’은 가장 은혜가 필요한 상태를 대변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돌보심)라고 할 때, 그분의 돌보심이 절실한 이들은 가난한 이들이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에게 임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누가는, 세례를 받고 시험을 겪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첫 번째 선포를 이렇게 들려줍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福音)을 전하게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4:18). 예수를 잉태하게 된 마리아는 자신이 “비천한(가난한)” 종이기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복을 받는다고 노래합니다(1:47-48). 누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의 탄생에 초대받은 이들은, 부자나 의인이 아니라, 목자들입니다(2:8-14). 당시 농경사회에서 목자들은 정착하지 못한 떠돌이, 가난한 이들이었지요.
옥에 갇혀 있는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오실 분이 당신이십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이런 답변을 요한에게 전달하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7:22). 보는 것은 맹인에게, 걷는 것은 못 걷는 사람에게, 깨끗함은 나병환자에게 수여되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가난한 자의 몫입니다.
다른 복들(배부르게 될 것이다, 웃을 것이다)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의 복은 현재 시제입니다(너희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하늘에서만이 아닌 땅에서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4:19)는 선언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지금 주린 자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21절)
햇빛과 비처럼, 하나님의 은혜(복)는 소유되거나 저장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존재가 햇빛을 받아 생명의 기운으로 삼고, 비를 받아 목마름을 해결하는 것처럼, 복은 그 복이 필요한 이들이 차지할 것입니다. 배부름이 복이라면, 그 복은 지금 주린 이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21절). 웃음이 복이라면, 지금 애통하는 이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21절). 그들은 가난한 이들과 같이 결핍 가운데 있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앞서 무리를 치유하신 것처럼, 아무런 제한이나 조건 없이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이는 선언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오천 명의 배고픈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고(9:10-17), 아버지는 굶주린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15:11-24), 주인은 잔치 자리에 배고픈 이들을 초대합니다(14:15-24). 외아들을 잃고 애통하던 과부(7:11-17)와, 열두 살 딸의 죽음으로 통곡하던 회당장(8:41-42, 49-56)의 집이 웃게 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노력하고 성취한 자가 차지하는 상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와 상통합니다.
화 있을진저, 부요한 자여, 지금 배부른 자여, 지금 웃는 자여 (24-25절)
이어지는 네 가지 화 선언(24-26절)은 각각 앞서 나오는 복의 선언과 대구를 이룹니다. 복이 의로움에 대한 대가가 아니듯, 부요하거나 배부르거나 웃는 이들이 당할 화는 죄나 악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죽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떨어집니다. 그 이유가 밝혀지는데, 부자는 살아서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집니다(16:25).
부요한 이들은 은혜를 비웃고, 배부른 이들은 은혜를 원하지 않으며, 만족한 (웃는) 이들은 은혜를 가벼이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와 돌보심을 거절하고 자신의 능력과 소유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문명이 발달한 사회와 물질이 풍요로워진 시대일수록 그러하고, 욕망에 경도된 사람일수록 그러합니다.
그런데 어떤 물질도, 양식도, 성취도 일시적일 뿐입니다. 저장한 것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배부름은 잠깐이며, 만족은 쉬이 지나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하나, 사람의 손으로 얻은 열매는 한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듯 일시적인 것들이 다하게 될 때, 그들은 위로를 받을 곳이 없고 굶주리게 되고 애통할 것이기에 화(禍)입니다.
네 번째 복(22-23절), 네 번째 화(26절)
이런 복음을 세상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고,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선지자)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배척을 당합니다(22절). 선지자로서 미움과 고난을 당하는 이들에게 네 번째 복이 주어집니다. 이 복은, 은혜이기보다는, 상입니다. 반대로, 부요와 성공을 추구하는 복을 전하는 이들(거짓 선지자)은 세상에서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인정을 받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이 화는 응보에 따른 심판입니다. 예수의 선지자이길 자처하는 교회가 귀 기울일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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