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감사한 위성복 선생님께 올립니다
소풍 가기 전날의 설레임.
운동회 날 펄럭이는 만국기마냥 희망으로 들떠 있던 마음.
그 때 그 마음.
지금 그 때 그 마음 같습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시간.
만감이 교차하여 한꺼번에 쏟아지는 그리운 추억들이 뒤죽박죽 순서 없이 고개를 내밉니다.
무엇부터 써야 할까.
선생님은 기억이나 하고 계실까.
선생님은 지금 어떤 모습이실까.
지금은 무얼 하고 계실까.
설마 절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엄마께서 장흥 5일장엘 다녀오시며 간혹 선생님을 뵈시면 언니와 저의 안부를 묻곤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2년 터울인 언니와 저, 저희 둘 다 6학년 때 선생님께서 담임을 하셨지요.
선생님.
5월이 다가올 때면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심지어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도 아니 한 무심하기 그지없는 제자이기에 부끄럼만 켜켜이 쌓여가며 앓습니다.
해년마다 스승의 날 즈음하여 남편을 따라 존경하는 남편의 은사님 내외분을 모십니다. 그윽한 음식과 함께 은사님 이름의 장학재단에 장학금 기부까지 합니다. 은사님과 제자 모두 가슴 뿌듯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순간을 바라보는 저 또한 뭉클해지는 감동이 온 맘을 엄습합니다.
그 한편으로 남편이 제게 선생님을 찾아뵙자고 청을 합니다. 아직은 아니라고 남편의 배려를 주저앉히곤 합니다.
이순(耳順)이 다 되어가는 세월을 탐지게 먹고서도 더 채워야만 할 빈 주머니들이 아직도 남아있나 봅니다.
시간이 갈수록 꿈과 이상에서 비껴가고 멀어져 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선생님!
책을 참 좋아하셨던 선생님!
한학문(漢學問)이 바탕인 저의 태생적인 기질은 선생님을 만남으로 줄탁동시(啐啄同時) 되어 문학소녀로의 발돋움을 하였습니다.
<논어>와 <신곡>을 탐독하게 하시고 한국고전을 더듬으며 교내외 독서대회 참여 권한을 으레 제게 주셨던 선생님!
선생님과 저, 함께 공유했던 문학적 공감은 어린 제 가슴에 얼마나 짜릿한 쾌감으로 으쓱했었는지 모릅니다.
초등학교 6학년 소녀의 순정은 이렇게 새록새록 무르익어 갔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심취한 독서는 어휘, 쓰기 뿐만이 아닌 제 감성의 뿌리에 많은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특별히 부여해 주셨던 문학과의 인연.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가슴이기를 소망하는 제 삶의 초석이 되지 않았을까요.
선생님과 함께한 시간이 채 1년이 되지 않았는데도 많은 이야기들이 기억 속에 꿈틀댑니다.
선생님!
저 두고두고 잊지 않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아마 선생님께서도 기억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6학년 1학기 말 경 서울에서 전학을 왔지요.
곧 여름방학식과 함께 저는 전 과목 ‘미’로 평가된 통신표를 받았습니다. 전학을 온 학생에게 적용되는 학교 규칙이었습니다.
반감 없이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제게 선생님께선 굳은 얼굴로 진정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그러하셨는지 졸업식 사정회를 2번이나 열어 전학 온 학생에게 불가하다는 우등상을 제게 기어코 안겨주셨습니다.
평소 말수 없으시고 조용하신 선생님께서 저의 저다운 모습을 인정해 주시려고 단단히 마음 먹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때 부상으로 받은 국어사전은 지금 많이 낡았지만 해진 그대로 선생님의 모습과 이중노출 되어 책장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유교적 틀 안에서 자라온 탓에 한 세대쯤 뒤떨어진 백지(白紙)같은 저를 그대로 인정해 주시고 오히려 존중해 주셨던 선생님.
이같은 선생님의 높고 깊고 크신 은혜가 봄 가고 여름 지나 가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하길 여러 번, 긴 세월을 거치면서 제 삶의 토양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상전벽해(桑田碧海)되어 예전 그대로가 아닐지라도 양말 한 켤레, 달걀 한 꾸러미의 촌지(寸志)도 큰 뇌물이나 된 양 부끄러워하시면서 하얀, 참으로 하이얀 얼굴을 붉게 물들이시던 그 때 그 얼굴, 그 마음
지금도 선생님의 그 때 그 마음을 기억하면서
꿈에서라도 선생님의 그림자를 그대로 꼭 그대로 따르는 제자이고자 합니다.
선생님!
머지않은 날,
소풍가듯이, 운동회 날 만국기 휘날리는 학교 가듯이 그 때 그 마음으로 선생님을 찾아뵙겠습니다.
2016.5.
제자 강두희 올림
첫댓글 감수성이 예민한 유년시절 각인의 성장에 점을 찍어 주셨던 분들이 있습니다. 작은 점이 나중 큰 원으로 자리잡게 되지요.
떨고 있을 때 성냥개비 하나.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 한올, 전학와 낮 설을 때 위성복 선생님의 보살핌 영원히 기억할 것 같네요. 나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셨는데 위충복선생님인것도 같고, 위성복 선생님인것도 같고. 장흥 행원리에 사시고 지금도 친구와 같이 놀러 다니는 선생님 이신데 같은 분인지 모르겠네요.
계속 감사하시고, 작은 점이 더욱 큰 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단하신 강두희 선생님(사실 사모님 보다 더 정겹습니다.)앞으로 선생님이라 부르겠습니다.떡잎시절 부터 두각을 나타내셨군요.공자의 말씀,단테의'신곡'을 읽다니요.난 그 시절'엉클 톰스 캐빈' 허킅베리핀의 모험..그런 거나 읽었을 텐데요.정적이고 학구적인 그 면모를 위성복 선생님은 발견하신 겁니다.같은 문학적 감성으로..꼭 뵙기를 바랍니다.우리가 태어날 때,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스승님 또한 선택할 수 없다지요.운명같이.스승 제자와의 인연을 '사제삼세'라 하지요.스승과 제자와의 인연은 전세 현세 내세에까지 이어진다는..그런데 위성복 선생님이 지금의 남편분과도 흡사한 이미지로 느껴집니다.나의 오래 전 스승님도
생각납니다.살아계시다면 보고싶습니다.늙으신 그 모습에서 어릴 적 추억을 찾아내렵니다.에드가 엘런 포우의 '애너밸 리'를 이제는 잊으셨는지도 살짝 여쭈어보렵니다.
위성복선생님의 모습을 스케치 해보겠습니다.키 172정도 호리호리 함,새하얀 피부,쌍거풀진 큰 눈,덧니가 있었던 것 같구요.행원리에 사십니다.
키가 작고 꽤 마른 편이셨던 위충복선생님도 기억납니다.
장촌선생님! 어떤 분이 3학년때 담임이셨을까요?
어린시절 기억 속에 계신 분을 함께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 고향 찾은 느낌입니다.
스텔라님! 선생님이라니요? 그리하지마시구요.<논어>와 <신곡>,목적을 두고 읽어야했기에 시험 공부하듯이 읽었답니다.학구열은 절대 아니었던것같구요.
선생님 성향이 제 남편과 비슷한다고 느끼셨네요.맞아요. 외모는 전혀 아니구요.
'사제삼세'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정말 운명같습니다.
이 귀한 인연의 끈 놓치않고 소중하게 이어가겠습니다.
좋은 말씀 주신 장촌사람님,스텔라님 감사합니다,
장흥 행원리에 위씨 성을 갖은 분이 몇 분 삶니다. 행원리는 나 어릴적 반촌으로 지금생각하니 맹자왈 공자왈 하던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행원리는 서로 기세워 양반이라 자처한 분들의 갈등이 좀 심한 곳이지요. 그리고 우리나라의 산업 방향이 확 바뀌면서 동참하지 못하여 빈곤으로 추락하였던 곳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위충복선생님이나 성복선생님은 광주사범을 나오셔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셨죠. 아마도 형제간이나 사춘간 일거에요. 충복선생님은 작고 야위고 깐깐하셔요. 나 아직 어릴적이라 내 영원에 양분은 별 주시지 못했고. 5학년 때 막 선생시작한 김종섭선생이 나의 감수성을 잘 다듬어 주셨어요.
'나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었던 선생이었을까?' 부끄러운 생각이 막 듭니다. 그 분을 참 행복해 하실 것 같습니다.
특히나 선생님들이 많으신 하하..모두들 충분히 가슴 따뜻한 선생님들이셨을 겁니다.'죽은 시인의 사회' 존 키팅 선생님처럼 교육의 철학,목표..제자들에게 남다른 열정이 있었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