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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들에게 말한다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장)
너희 듣는 자들에게 말한다(27절)
평지 설교(6:20-49)의 무대가 되는 평지에는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 이방인 지역인 두로와 시돈으로부터 예수를 찾아온 많은 무리가 모여 있습니다(6:17). 그들은 예수께 모여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씀을 듣기 위함이요, 둘째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바람을 따라 병을 고쳐주시고(18-19절), 이어 말씀을 전하십니다.
상기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 그 사람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묻지 아니하신다는 점입니다. 그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착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의인인지 죄인인지, 유대인인지 이방인지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상관없이, 예수께서는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시고 이루어 주십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병만 고침받고서 돌아갔겠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고자 온 이들도 있어, 예수의 말씀을 듣습니다. 듣는 이 중 누군가는 예수의 말씀을 수용할 것이고, 누군가는 싫어할 것입니다. 싫어하는 자들은 예수를 떠날 것이며, 더 들으려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더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이어가십니다. “너희 듣는 자들에게 내가 이른다”는 서두로 새로운 말씀이 시작됩니다. 이 말씀의 청중은 무작위의 무리가 아니라, 듣고자 귀를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27절)
‘네 개의 복과 화의 선언’(6:20-26)에 이어지는, 평지설교(6:20-49)의 두 번째 말씀(27-38절)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27절)는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세 가지 명령이 덧붙여지는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너희를 모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입니다. 어찌 보면, 뒤의 세 명령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대 전제에 대한 예시적 정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라”는 권고를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고대의 가장 고상한 윤리 사상에서는 물론, 유대인들의 성서에서조차 생소한 명령입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19:18)는 계명은 누구에게나 지당하며, 가장 중요한 율법으로 인정하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이에 반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성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는 명령은 율법에 충돌을 일으킵니다.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레24:20, 신19:21)는 계명은 원수에게 적절한 보복을 시행하라는 율법 조항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미움으로,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로, 모욕하는 자에게는 모욕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 합당합니다. 원수를 갚아달라는 탄원 기도가 시편에 즐비하게 등장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하나님도 의인들을 사랑하시고 악인들을 미워하신다고 알려집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는 신념이 율법의 기본 명제입니다. 이런 기조 속에, ‘원수(악인)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설 곳이 없습니다.
원수 사랑과 정의의 모순 (28-30절)
원수 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것이 간접적인 가해(加害)라면(27-28절), 남의 뺨을 때리는 것, 겉옷을 빼앗는 것, 가져가는 것(도둑질하는 것) 등은 직접적인 가해입니다(29-30절). 가해는 피해자의 고통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죄악입니다. 죄악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원칙이 정의(正義)이고, 성서는 정의가 하나님의 본성 중 하나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가해 행위에 대한 보복 없이는 정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살펴보면, 고대 사회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직접 보복하는 행위를 정당화했고, 오늘날의 법치 사회에서는 법이 피해자를 대신하여 보복해줍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선언은 하나님이 피해자 대신 보복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격언이 상식으로 통하는 세상에서,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을 돌려대라”는 권고는 비현실적입니다. 겉옷을 빼앗아가는 자와 맞서지 못하고 속옷까지 내주는 것은 비굴합니다. 도둑맞은 물건을 돌려받지 않는다면 정의는 구현되지 않습니다. 자칫 예수의 명령은 폭력을 방조하고 피해자의 희생을 외면하는 불의를 조장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정의에 배치된다면 문제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전
그런데 예수의 말씀대로라면 상황이 반전됩니다. 마지못해 맞았다면 폭력을 당한 것이지만, 뺨을 돌려대어 준 것이라면 나는 피해자가 아닙니다. 빼앗겼다면 원수 관계가 되겠지만, 내어준 것이라면 이웃 관계가 됩니다. 억울하게 당했다면 분노해야 마땅하겠지만, 자발적 선택이었다고 여긴다면 증오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집니다. 이런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얼마든지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도권을 빼앗긴 피해자가 아니라, 주도권을 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6:12, 눅11:4)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 용서의 권한이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데, 그 권한은 피해자가 쥐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용서는 원래 하나님만이 시행하실 수 있는 배타적 권한입니다(5:17). 그런데 그 신적 권한을 피해자가 쥐었으니, 피해자는 결정권자가 되는 셈입니다.
호혜적 사랑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다 (31-34절)
악인도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고, 범죄자도 자신의 동료를 사랑합니다. 나를 후대하는 사람에게 후대하는 일은 죄인들도 얼마든지 합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 못할뿐더러, 칭찬받을 이유가 되지도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나도 사랑하는 호혜적 사랑은 그저 본능과 다를 바 없으며, 자칫 이기적 경향으로 발전되고 특권의식으로 치닫습니다. 유대인들의 철저한 이웃(동족) 사랑이 배타적인 선민사상이 된 것이 그렇습니다. 같은 차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도 내부인 간의 호혜주의로 점철되곤 합니다. 또한 사랑할 이웃과 사랑할 수 없는 타인을 규정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반복해 왔습니다. 신앙의 이름을 띤 사랑이 악인과 죄인들이 하는 사랑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35절). 누구에겐가 좋은 일을 하면서 되돌려 받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원수를 사랑함은, 사랑받음이 없이도 사랑하는 것이고, 되돌려 받을 가능성이 없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인정과 칭찬과 보상을 받는 이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부요한(외식하는) 자들”이라 칭하십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한 선행의 상(보답)을 사람들로부터 다 받았으므로(6:24), 하나님에게서부터 받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화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지극히 높으신 이(35절), 너희 아버지(36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다”로 정의됩니다(35절). 이 표현이 산상수훈에서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는 말씀으로 발설됩니다(마5:45).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의인들)의 반발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가 아니라)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우리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다면, 도대체 의롭게 살고자 애쓰는 이들의 헌신이 무슨 소용이 있는 건가요? 이것이 경건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던지는 불만이었습니다.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신을 잘 공경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을 저주하는 분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극히 높으신 분”입니다. 조건과 한계에 갇히지 않으시고 초월하여 모두를 품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생명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한 큰아들에게만이 아니라, 온갖 비난을 받는 망나니 같은 작은아들에게도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앞서, 찾아온 이들 모두에게 구별 없이 고쳐주시는 예수의 사역에서도 드러납니다.
아버지의 자비로움 같이 너희도 자비로우라 (36절)
아들(자녀)의 특성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외견상으로든 유전적으로든,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하려면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이웃과 원수를 함께 사랑해야 지극히 높으신 분(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35절). 하나님의 자녀는 그분의 자비로움처럼 자비로워야 합니다(36절). 그 자비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응축됩니다. 이러한 원수 사랑은 비판(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라는 명령으로 확장되고 구체화 됩니다(37-38절).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받는 상(賞, misthos)입니다. 마태복음으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어질 것이다”(5:9)라는 선언에 비견됩니다. 상은 잘한 행동에 대한 보상(reward)이며 노력에 대한 대가(wage)입니다. 상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한 일에 대한 평가입니다. 말하자면, 그 사람이 경건한 유대인인가 부정한 사마리아인인가를 판별하지 않고, 그 사람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호혜적인 사랑에 대하여는 약속된 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처럼 제한을 두지 않는 사랑이 상을 얻습니다. 그런 자비로움을 행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명백한 신조가 교회의 믿음이지만, 자비로움으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도 분명합니다(35절). 하나님을 닮았으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지요.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을 우리는 영생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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