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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 개인적으로 의자왕이라는 인물에 큰 흥미를 갖고 있는 편입니다. 신라의 핏줄을 이어받은 의자왕자가 태자가 되기위해 속에 칼날을 감추고 대외에 해동증자, 해동증민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계모인 사택씨왕후 등에게 극진하게 대한 것도 그렇거니와 즉위 후의 성공적인 정복활동이 의자왕이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드라마 계백에 한다네요. 주몽, 선덕여왕, 연개소문 등 한국 고대사를 다룬 사극들에 대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터라 별 기대않고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기획의도와 등장인물 소개를 보니, 의자왕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명이더군요. 특히 기획의도에서는 주로 이도학, 양종국 교수 등의 저서와 논문들을 갖고 공부한 흔적이 역력해서 살짝 기대를 갖고 봤는데, 개인적으로 기대 이상으로 잘 보고 있습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갑옷고증이 그간의 주몽- 선덕여왕에서 보여준 수라왕 슈라트에나 나올법한 정체성과 국적을 알 수 없는 판타지 갑옷이 아닌 기본적인 고증을 베이직으로 한 갑옷을 선보였더군요. 물론 지나치게 화려한 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허용할 수 있는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딱 이 선을 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좀 더 자제를 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무튼 이렇게 한층 진일보한 갑옷고증을 보면서 KBS 근초고왕이 헛되이 망하지만은 않은 고대사극의 갑옷고증에 아주 큰 획을 그었다고 평을 내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간 한국 고대사를 다룬 사극에서 그 시대에 존재한 인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은 극에 넣지 않고 굳이 창작인물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몽에서 소서노 진영의 인물로 나온 사용, 계필 등이 그러한 예이지요. 아무튼 이번에 계백에서 왕효린, 사택지적, 연문진, 사걸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한 것도 괜찮았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히 했어야 할 일들인데, 그동안 워낙 그런 시도들이 없었다보니...^^;
신라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의자왕자의 태자책봉을 반대하는 것도 설득력있게 잘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견 배우들의 열연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의자왕의 아역과 교기의 연기도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의자왕 아역이 오열할 때는 저도 막 뭉클했을 정도고ㅋㅋ 제 동생이 어린 교기가 토끼를 칼로 찍는 것을 보고 저 아이는 폭력성이 다분하다고 해서 피식했습니다.ㅋㅋ;; 무진의 처 명주역을 맡은 배우 정소영 분은 연기도 연기지만 미모에서 단연 원탑을...ㅋㅋㅋ
무엇보다 전술했듯이 저 개인적으로 의자왕이라는 인물에 큰 흥미를 갖고 있는데, 제가 생각한 의자왕의 이미지가 드라마상의 설정과 매우 비슷한 것 같아서 흡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점을 거론치 않을 수 없습니다.
황제, 황후- 이거 고쳐지는 듯 하다가도 계속 나오네요. 백제는 왕 중의 왕이라는 표현을 분명 大王이라고 칭했습니다. 그 아래 外王. 小王을 두었지요. 당장 시대배경이 무왕 치세인데, 그를 두고서 대왕이라고 칭하는 기록이 적잖게 있습니다. 2009년에 출토된 미륵사지 사리명문에도 분명히 대왕폐하라고 하고 있지요. 황제는 왕중의 왕을 뜻하는 중국식 표현일 뿐 백제의 표현이 아닙니다. 백제에는 고구려- 신라의 태왕이나 중국의 황제, 유목국가의 가한과는 다른 대왕이라는 독자적인 칭호가 존재했습니다. 서동요나 계백에서 자꾸 황제를 쓰는 이유는 황제가 대왕보다 높다고 생각해서 쓰는 것 같은데, 이는 또 다른 열등감의 표출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왕이 말년에 잔치를 열면서 친히 거문고를 뜯으며 흥겨움에 노래를 부른 곳도 황제포가 아니라 대왕포입니다. SBS의 연개소문에서 극초반에 고구려 군주칭호를 황제, 제라고 했다가 태왕으로 고친 좋은 선례가 있는만큼 지금이라도 대왕과 왕후라고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사택비전하- 다른 분도 지적했지만, 저 역시 보는 내내 사택비전하라는 이 표현 굉장히 거슬렸습니다. 동북아 어느 왕조에서도 면전에서 왕후의 성씨를 왕비전하에 갖다붙여서 부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는 예를 들어 金妃전하, 李妃전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름을 창작해서 새로 만들어주는 것도 괜찮고 대사에서는 그냥 왕비전하라고 해도 무난합니다. 그래도 그간 쓰였던 고려시대 용어인 마마 대신 전하나, 폐하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괜찮았습니다. 사족으로 사택비의 눈꼬리 화장... 진짜 분장 누가 했는지 몰라도 정말 2차원적인 발상입니다. 그런 화장 안 해도 오연수 분의 연기력만으로도 의자왕과 계백의 정적이라는 것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좀 지워줬으면 하는 바람이...;;
교기- 교기는 의자왕 동생의 아들로 의자왕의 조카입니다. 기록에는 분명 弟王子翹岐가 아니라 弟王子兒翹岐라고 되어있습니다. 즉, 동생왕자의 아이인 교기라는 뜻입니다. 몇몇 학자들도 심심찮게 교기를 의자왕의 동생으로 해석하고는 하는데, 이는 분명한 오류입니다. 아무래도 참고한 서적 중에 교기를 의자왕의 동생이라고 해석한 내용이 있는 서적을 봐서 극 초반에 이런 실수가 나온 듯 합니다.
의자왕, 김유신- 611년 당시 의자왕자의 나이가 10세이면 너무 어린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의 출생연도로 볼 때 의자왕은 595년 이전 무왕이 선화공주와 재야 시절을 보내면서 탄생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611년 당시에는 사춘기 소년이 비교적 타당해보입니다. 의자왕과 비슷한 시기인 595년에 태어난 김유신 역시 660년 당시에는 60이 넘은 어르신인데, 지나치게 젊게 나왔습니다. 아마도 계백의 라이벌로 그리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 같은데, 한 인물의 생몰년 정도는 철저히 지켜줬음 좋겠습니다. 추후에 나올 때는 어르신 분장이라도 해서 나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무왕- 개인적으로 최종환 분의 연기를 좋아하는 지라 그의 캐스팅에 흡족하고 있는데, 무왕의 권력이 생각이상으로 약하게 나옵니다. 위사좌평 하나 마음대로 부리지 못 하는 것은 개연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뭐, 드라마상 현시점은 무왕 12년 차니까 왕권을 다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재위 말년에까지 무왕의 왕권이 약하고 의자왕 때에 이르러서야 왕권이 강해졌다는 무리한 전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쟁장면- 한국사극의 고질병인데, 여기서도 나옵니다. 장군들을 제발 제 1선에서 날뛰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지휘자입니다. 뒤에서 부하들을 통솔해야 하는데, 이들이 일반 병사들처럼 제1선에서 백병전을 치르는 것은 진영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의 얘기입니다. 투구도 좀 씌우고, 타던 말에서 내려서 뛰어다니는 장군으로서 이상한 행동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폭약...;; 역사에 화약의 등장은 훨씬 뒤의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이 장면은 편집하고 보다 개연성있는 다른 구성으로 대체했으면 좋겠습니다.
극의 설정상 아쉬운 점들도 있는데, 삼국사기같은 정사에는 없지만서도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보면 성충과 윤충은 忠자 돌림의 형제로 나와있는데, 이 둘을 형제지간으로 설정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거든요. 조선상고사에서는 백제측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동맹을 추진한 이도 성충으로 나오는데, 성충의 활약을 거론할 때 연개소문과의 대담도 넣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國主母 즉, 사탁씨왕후의 자매가 4명이나 있다고 기록했는데, 이왕에 고증하기로 한 것 인물관계에 이들도 넣었다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지금 이들을 넣기에는 늦은 감이 있는 듯 하네요.^^;;
이 외에도 몇 가지 비판하고픈 것들이 있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패스하기로 하고...^^
무튼 아직 1, 2화 밖에 지나지 않았고, 지적도 적잖게 했지만 그래도 주몽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형수 작가 분이 보다 주몽 때보다 공부도 하고, 역사적 고증에 매우 신경 쓴 흔적들이 있는 것 같아 좋습니다. 지금처럼 역사 왜곡은 최대한 피하고 역사의 행간을 개연성과 재미가 있는 픽션으로 잘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계백 1, 2화를 본 지극히 개언적인 감상평이며, 아직까지는 정말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주몽, 선덕여왕, 연개소문, 대조영 등은 1화부터 열불내면서 봤는데, 모처럼 비교적 편안하게 사극보네요.ㅋㅋ
첫댓글 오, 요즘 사극들에 회의를 느껴서 안 보고 있었는데 명치호태왕 님의 감상평을 보니 한 번 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한류의 영향으로 사극 한편이 국내에서만 방영되는 작품이 아니다 보니 중국을 의식하여 "황제"운운하는 것 같거든요. 중국에서 "대왕"이라는 표현은 일개 제후이거나 황제의 아들정도의 위상밖에 드러낼 수가 없거든요. 실상 백제국왕의 위상은 황제급이였거든요. 따라서 현대 우리나라 시청자들과 중국 시청자들을 배려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황제 운운하는 것 같습니다. "사택비전하"라는 표현도 아무래도 시청자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같네요..
제작진의 입장이 그렇다 해도 저는 별로 납득이 가질 않네요.^^; 드라마에서 대왕이나 태왕을 칭하면서 제후왕들을 등장시킨다면 대왕, 태왕 아래에 제후왕들이 있고 대왕, 태왕은 황제와 위상이 같은 용어라는 인식을 갖게끔 할 수 도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료가 있음에도 황제 운운하는 것은 제작진의 안일하다고 생각됩니다.^^;
아주 예리한 분석이십니다. 저도 한 차례 보았는데, 워낙 기대를 안 하고 봐서인지 기대 이상으로 괜찮았습니다.
동감입니다. 정말 기대하지 않았는데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언급하신 각 요소들도 만족할만 합니다. 갑주도 기본 골격을 고증대로 유지하면서 충분히 화려하게 말들 수 있음을 보여주어 광개토태왕측은 할 말이 없을 겁니다. 1회 야전씬은 개인적으론 지금까지 전쟁장면 가운데 최고였다고 봅니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미흡한 점보다 만족할 만한 요소가 더 눈에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극초반이라 평가가 다소 이른감이...^^;
어째 시청률은 10%를 못넘기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