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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의 뿔을 베어버린 사제(司祭)의 언어
-이상옥 시집『그리운 외뿔』(문학세계사)
김남호(시인)
1. 언어의 사진첩
이상옥 시인의 새 시집 『그리운 외뿔』이 나왔다. ‘디카시’의 주창자이면서 전도사를 자임하는 그가 이번에는 잠시 디지털카메라를 밀쳐두고 문자시만으로 구성한 시집을 낸 것이다. 그동안 디카시라는 형식 때문에 그의 시가 갖는 본래의 표정들이 굴절된 면도 있었을 것이다. 문자시만 읽는 것과 사진(이미지)이 곁들여진 디카시를 읽는 것은 공감이나 소통, 시적 감동 등에서 충분히 다를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사진 없이 문자시만으로 구성된 탓에 디카시를 볼 때와는 또 다른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문자시라고 해서 사진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디카시가 외부의 풍경에서 시를 찾았다면, 이번 시집은 내부의 풍경("사람이나 사물, 혹은 에피소드"-시인의 말)에서 시를 찾아 형상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시집을 두고 “내면의 풍경을 반사시킨 언어의 사진첩”(홍용희 해설「무위와 성찰의 언어」)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적절하고 적실해 보인다.
그의 시의 주요한 특징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조용함을 꼽겠다. 기왕의 시집들도 그렇지만, 이번 시집도 무척 조용하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읽는 내내 책장 넘기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것 같은 시집이다. 이때 조용하다는 건, 물론 데시벨(db)의 차원이 아니다. 대중의 이목을 끌 만한 노이즈――이를테면 형식면에서의 실험성, 동원된 어휘의 과격성이나 표현의 신랄함, 대(對)사회적 발언의 수위 등――가 없어서 고요하다는 거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시는 그의 성정을 닮았기 때문일 터. 반백의 머리를 가지런하게 빗어 넘기고, 남에게 언짢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을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 없이 웃고만 있는 그의 모습이 바로 그의 시의 표정이다.
그래서 그의 시집을 채우고 있는 반성과 성찰과 사색의 언어는 사제(司祭)의 그것처럼 희미한 비누냄새를 풍기며 조용하고 차분하고 나직하다. 그리고 그 언어의 결은 예배당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처럼 가지런하고 따뜻하고 편안하다. 하지만 그의 시집을 읽고 뭔가를 써야 하는 입장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 심마니-되기와 간디-되기
그의 시는 독자(讀者)에게는 친절하고 평자(評者)에게는 난감하다. 시적 발언에 대해 아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하는 그의 ‘착한 언어’들 앞에서 절망해야 했기 때문이다. 짧고 단아한 형식 안에서 수행자의 페르소나로 앉아 있는 그의 시집은, 읽고 공감하는 것 외에는 어떤 식의 개입도 허락하지 않았다. 오롯이 스스로 충만한 상태에서 시인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때로는 ‘진정한 의미의 견자’(「시인의 말」)로서 시집 곳곳에 조용히 출몰한다.
당신은 어떻게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 상 같은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습니까 당신은 정말 위대한 예술가예요
아니에요 신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을 배달하는 심마니와 다를 바 없어요 숨어 있는 산삼을 찾아서 잔뿌리 하나도 다치지 않게 정성껏 파내듯이, 대리석 속에 숨어 있는 조각상을 정이나 쇠망치로 손상 없이 꺼내주었을 뿐이에요
나도 택배꾼일 뿐이에요
-「미켈란젤로」전문
이 시집에서 말하는 그의 시론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심마니論>이나 <택배꾼論>이 될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지우고 절대자의 뜻을 따르는 것, 하여 신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을 배달하는 바로 그 심마니로서의 시인. 신이 심마니로 하여금 산삼 심부름을 하게 하듯이,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대리석 속에 갇혀 있는 ‘피에타’나 ‘다비드’를 꺼내게 하듯이, 시인으로 하여금 당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받아쓰게 한다고 그는 믿는다. 그리고 덧붙여서 심마니는(물론 시인도) “심부름 값만 받고 만족해야지 과도한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초보 심마니」)는 직업윤리까지 상기시켜 준다.
그만큼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욕심이 없다는 것. 게다가 착하기까지 하다는 것. 그래서 무구하다는 것. 그들의 무구를 거울삼아 시인은 세상을 비쳐보고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 심마니와 미켈란젤로를 필두로 마더 데레사, 조선의 인종(仁宗), 간디, 펄벅이 보았던 60년대 농부, 그분, 워낭소리 할아버지 등은 시인에 의해 ‘무욕(無慾)주의’의 모범적 사례로 동원되었고, 시집을 관통하는 이 정신의 시적 구현을 위해 복무한다. 그러므로 이 시집은 ‘착하게 사는 그들’과 ‘그들을 밑줄 치며 읽는 나’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직조되어 있다.
① 매번 “제게는 믿음이 없습니다”라고 진실을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는 그, 여전히 하느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는 그, 사랑 안에 있으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신앙에 의해 살면서도 믿지 않는 것, 자신을 소비하면서도 완전한 어둠 속에 있는 것,
그를 밑줄 치며 읽는 나.
-「성녀 마더 데레사」부분
②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올라타다가 그만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기차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다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려 놓았다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간디」전문
①은 끝없는 기도와 희생으로 자신의 신앙을 완성한 마더 테레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을 흠모하며 그의 삶을 부러워하는 화자가 ‘그’를 밑줄 치며 읽고 있다. ②는 간디에게 ‘일어났을 법한’ 에피소드 하나가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아마도 이 시가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에나 걸려 있었다면 스쳐 읽고 말았겠지만, 이 시집의 독자들은 어떤 강렬함을 느끼며 읽었을 것이다. 간디의 이미지와 이상옥 시인의 이미지가 일부분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이미지에서는 오탁(汚濁)을 거부하는 고결한 사제나 수행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의 시에 긍정적인 기능을 할 때도 있으나, 그의 시를 미리 한계 지어버리는 선입견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는 부정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제의 이미지가 주는 부정적인 측면을 시인이 모를 리가 없는데도 그의 시에는 위악적인 포즈 하나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간디」는 시로써 기능하는 것이다. 즉, 시인의 성정과 추구하는 삶이 간디의 그것들과 멀지 않기에 떠도는 에피소드 하나를 그대로 옮겨놓아도 시가 된다는 뜻이다. 비단 「간디」뿐만이 아니다. 예를 드는 것조차 무색하게 그의 시집 전반에 걸쳐 ‘간디적(的) 삶’의 변주는 반복되고, 그는 이를 통해 감동과 계몽을 동시에 수행한다.
3. 그리운 외뿔
이렇듯 단순한 메시지와 단정한 형식으로 시종(始終)하고 있는데도 그의 시집이 고루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관념의 비만에서 오기 십상인 설교나 군말이 그의 시에는 없기 때문이다. 쾌적한 속도를 제공해주는 시원한 여백 못지않게 일상에 밀착된 풍경도 한몫 거들고 있다. 먼저 관념의 비만을 경계하는 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 최초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이다
무소는 다름 아닌 인도코뿔소다
아프리카코뿔소는 뿔이 두 개지만
인도코뿔소는 정신의 뿔을 베어버리고
육체의 뿔 달랑 하나다
무리 짓지 않고
혼자서 길 가는 외뿔이다
아, 나는 너무 관념주의자다
-「그리운 외뿔」전문
이 시는 이렇게 말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무소(인도코뿔소)는 정신(관념)을 제거하고 육체의 뿔 하나만 남았다고, 하지만 나는 육체의 뿔은 제거되어버리고 관념의 뿔만 남아서 온갖 번민이 울창하다고,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 수가 없다고!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이 시의 문맥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프리카의 코뿔소는 관념적이고 인도의 코뿔소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근거는 뭘까. 어떤 연유로 아프리카 코뿔소는 정신과 육체를 다 가져서 번민하고, 인도 코뿔소는 육체만 남아 쿨하다는 걸까. 단순히 두 개 있느냐 한 개만 있느냐 하는 뿔의 수효로 이렇게 추측했다면, 어느 여행 전문가의 다음과 같은 인터뷰는 음미해볼 만하다.
“아프리카에 가면 사물이 보이는 방식이 무의미해져요. 희한하게도, 가령 인도에서 태양이 돌이나 나무 따위를 비추면 그것의 배후에 이미지랄지, 존재의 의미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는 반대예요. 빛이 비치면 사물에서 하나 둘 의미가 벗겨져 나가 단순히 ‘있다’는 것뿐인 세계가 되어갑니다. (…) 돌이라고 하면 돌 말고는 다른 무엇도 아닌 세계지요. 인도에서는 돌이라고 하면 돌의 배후에 어떤 은유가 작용합니다. 어느 쪽이 대단하냐로 말한다면 인도는 더 깊고, 아프리카는 더 얽매인 데가 없어요.”(후지와라 신야, 『인도 방랑』)
이 말대로라면 오히려 인도코뿔소는 관념의 뿔 하나를 숨기고 있는 셈이고, 아프리카코뿔소는 육체성(물질성)만 가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혹시, 시인은 이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고 이렇게 탄식했을까. “아, 나는 너무 관념주의자다!” 물론 농담이다. 이 시는 자신의 시나 사유가 관념적으로 흘러 사물의 구체성에서 멀어지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는 시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을 테니까. 이번에는 일상 속의 풍경을 슬림하게 표현한 시.
③ 나는 생각한다 침대는 제단이고 나는 제물이라고
하루 온갖 오물로 탁한 의식 밤새 말갛게 가라앉아 맑디맑은 신새벽에 나는 가장 정결한 영혼 하늘에 바쳐져도 좋을
-「제물祭物」전문
④ 신의 운동장을 구르고 있다
한순간도 멈출 수 없다
-「굴렁쇠」전문
⑤ 연구실 좁은 공간,
모과 다섯이 뿜어내는
그 말을 먼저 알아듣는 나.
-「팜파탈」전문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이 대부분 일상에서 건져 올린 단상들을 짧은 시 형식에 담은 것들이어서 특별히 짧은 시라고 골라 예시할 것도 없지만, 굳이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라는 거다. 그가 이렇게 짧은 형식을 선호하는 데는 디카시와 무관하지 않다. 디카시는 일단 분량이 길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가 없다. 호흡이 길어지면, 디카시 특유의 점화력(點火力)과 폭발력(爆發力)이 현저하게 감소하기 때문이다. 자칫 더 느슨해지면 시와 사진이 겉돌거나 사진이 시의 사족으로 혹은 그 반대로 전락하면서 시를 망칠 위험도 커진다. 그래서 디카시는 길이가 생명이다. 게다가 단순명료한 메시지도 시의 길이가 줄어들게 되는 중요한 이유다.
③을 보면 알 수 있다. 시적 긴장을 유지하는 데 가장 경제적인 길이는 어떤가를. 잠이 깬 신새벽에 침대에 누운 채 생각한다. 아, 지금의 나는 오늘 중에서 가장 깨끗한 희생(犧牲)이구나 하고. 바칠 수 있고, 바쳐야 한다면 바로 새벽의 내 영혼을 제물로 삼고 싶다고. ④를 보면 알 수 있다. 왜 이번 시집을 두고 ‘언어의 사진첩’이라고 했는지. 지금 운동장을 따라 돌고 있는 굴렁쇠가 보이지 않는가. 그 곁에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시인이 보이지 않는가. 멈추고 싶은, 그러나 멈출 수 없는 자의 고통스런 질주가 보이지 않는가. ⑤를 보면 알 수 있다. 짧은 시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좁은 연구실에서 썩어가는 다섯 개의 ‘팜파탈’이 뿜어내는 향기는 또 얼마나 뇌쇄적(惱殺的)인지. 이 시집은 묻는다. 왜 시가 길어야 하냐고, 왜 시에 장광설이 필요하고, 중언부언이 필요하냐고.
4. 신파, 우리 속의 콤플렉스
이상옥 시인이 주로 구사하는 시작(詩作)의 기법은 사진을 찍듯이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묘사다. 그의 시가 간결하면서 쾌적한 느낌을 주는 건 묘사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의 시가 건조하게 비치기도 한다. 가장 빼어난 묘사란 건조한 보고(報告)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시에도 습기가 밸 때가 있으니, 두 여인을 이야기할 때다. 바로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와 누이. 그녀들을 추억하는 시에서는, 시인의 눈자위가 따끔거렸던 탓인지 행간이 매캐하다. 어찌 회한 없이 사모곡(思母曲)을 부르고 눈물 없이 망매가(亡妹歌)를 부르랴!
⑥ 어머님 지구별을 떠나시고
시골집은 텅 비었다
새벽녘 새소리가
신주꾸 인파처럼 귀에 쏟아져
어느새 눈을 떴다
한참 상념에 잠기다
-「알람 이전」부분
⑦ 어머니
아직 주무시지 못하신다
아직 세상살이 서툰
아들 빤히 지켜보신다
-「별」전문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지만, 그 자리가 어머니의 자리임에랴 말해 무엇하랴. 작고한 어느 평론가는 “아버지라는 말, 어머니라는 천둥소리”(김양헌 평론집, 『이 해골이 니 해골이니?』)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양친 중의 한 분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이고,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신이시다. 그러니 ‘아버지’라는 기호는 단순한 ‘말’이지만, ‘어머니’라는 기호는 발화(發話)되는 순간 우리 신체의 어느 부위에서 진동을 느끼게 하는 천둥소리다.
⑥에서 보듯이 어머니라는 신(神)이 떠나버린 시골집은, 이미 신전(神殿)이 아니다. 그저 쇠락한 시골집일 뿐이다. 어머니의 음성과 눈빛과 온기가 사라진 그 집에서, ‘들짐승’처럼 몸을 씻고 곤히 잠들었다가 알람보다 먼저 일어나 신화(神話)의 시간을 잠시 맛보지만, 인간의 시간은 금세 시끄럽게 울어댈 것이다. 그리고 마당가의 무성한 잡초들에서 신의 부재를 쓸쓸하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남자는 미숙아라는 페미니스트들의 비아냥거림을 들어도 남자들은 할 말이 없고, ⑦에서와 같은 아들의 ‘퇴행’을 보고서도 유치하다고 비웃어줄 수가 없다. 왜? 그 퇴행을 순수함의 반증이라고 우기고 싶으니까. 다음은 누이에 대한 시.
비가 촐촐히 내리는 입춘이 지난 봄날
출근하는 아침
지난해 세상을 훌훌 떠난
누이 생각
이럴 때 전화라도 한 통 하고 싶다
폰 전화부에 아직도 지우지 못한 이름
“이” “영” “옥” 010)4238-8159
“어떻게 지내”
“잘 지내, 오빠는”
암 투병 6년 동안 한결같이 밝았던 음성
오늘같이 쓸쓸한 날은
휴대폰만 만지작거린다
-「오누이」부분
체루(涕淚)라는 말이 있다. 눈물을 줄줄 흘린다는 뜻이다. 보는 자를 그렇게 만드는 드라마나 소설이나 영화를 우리는 ‘멜로물(物)’ 또는 ‘신파(新派)’라고 한다. (물론 엄격하게 따지면 멜로드라마와 신파는 다르겠지만 우리의 언어 습관이나 관행이 그렇다는 거다.) 관객이 울기 전에 배우가 먼저 우는 선읍(先泣)이야말로 신파의 특징이다. 이 시집의 마지막은 신파로 끝맺는다. 신파가 아니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은 없다. 누이를 추억하는 시인은 굳이 눈물을 감추려하지 않는다. 독자야 따라 울든 말든 상관없다. 시를 쓰다보면, 나의 슬픔과 아픔과 그리움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미학적 거리를 확보하는 게 애초 불가능할 때도 있지 않겠는가.
이럴 때 독자는 괜히 잘난 척할 필요 없다. 신파는 눈물로 보아야 하듯이 이런 시는 눈물로 읽어야 제 맛이다. 눈물은 통속의 징표이고, 통속의 극적(劇的) 양식이 신파가 아닌가. 통속(通俗)이란 속(俗)과 통(通)하는 것. 시인이라고 별 수 있으랴. 그저 약하디약한 인간일 뿐. 죽어가는 누이 앞에서 무력했을, 무력해서 속상했을, 속상한 만큼 그리웠을 그 심사를 신파 말고 달리 어떻게 표현하랴. 어쩌면 현대시의 변천사란 ‘신파’를 포장하는 기술의 변천사에 다름 아닐 터. 포장을 달리한다고 내용물까지 달라지랴. 신파야말로 우리 속의 콤플렉스가 아닐까. 그래서 일부러 어깃장을 놓아본다. 신파가 어때서?
5. 에필로그
지금까지 이상옥 시인의 새 시집 『그리운 외뿔』을 두서없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느낌과 말길이 뻗어가는 대로 읽어보았다. 오랜만에 읽어본 그의 문자시집이기도 하고, 근래에 읽은 여러 시집들 중에서 유독 편안하고 수월하게 읽혔던 시집이기도 하다. 이 시집을 읽는 시간은 그의 시세계를 확인하는 시간이도 했고, 오십대 중반을 지나고 있는 시인의 지친 표정과 그 나이가 만들었을 편안해진 표정을 동시에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동안 창작을 향한 그의 열정과 그가 주창하는 독특한 시론(디카시론)으로 그는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앞으로도 그의 역할과 위상은 더욱 크고 높아질 것이고, 그래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과 기대는 그에게 더욱 부담스럽게 작용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에게 이번 시집은 반성과 정리의 시간을 제공하며, 잠시 한숨 돌리는 계기를 마련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낯익은 것은 편안해서 좋다. 예측 가능한 것은 안정감을 주어서 좋다.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성실하고 극진해서 좋다. 그의 이번 시집이 그랬다. 편안하고, 안정감 있고, 적당히 슬프면서 쓸쓸하고, 그래서 그의 새 시집을 기다려온 독자들은 무척 즐거웠으리라. 물론 나도 그런 독자들 중의 하나다. 그러나 다음 시집에서는 독자의 예측이나 기대를 좀 배반했으면 좋겠다. 낯설고 불편한 구석도 더러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술에서 ‘편안함’과 ‘예측 가능함’이란 그리 권장할 만한 덕목은 아닐 테니 말이다.■
◆ 김남호 / 2005년 『시작』으로 등단. 시집『링 위의 돼지』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