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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하는 자는 누구였을까?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누가복음 4장)
광야의 경험, 사순절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포함하는 사십일의 절기로 알려진 사순절은 참회와 기도, 연단과 인내, 복종과 제자의 길을 성찰하는 기간입니다. 이런 의미를 담은 절기가 사십(사순)의 시간으로 연결되는 근거는 성서 안에서 발견됩니다. 해방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를 전전하며 나아가던 사십 년, 도망하는 엘리야가 광야로 들어가 호렙산에 닿기까지의 사십 일, 모세가 산 위에서 먹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했던 사십일(출34:28) 등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순절의 직접적 배경은 예수께서 광야에 거하면 시험을 받으셨던 사십일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예수의 광야 시험 이야기를 읽으면서 사순절 순례를 시작합니다.
성령에게 이끌리다(1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다(2절)
보통 시험하는 존재는 마귀(사탄)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시험)한 뱀이 사탄으로 인식되고, 욥을 끔찍한 고통으로 몰아넣은 시험자도 사탄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시험을 자원하는 이는 없겠지요. 예수께서도 시험을 받으러 자원해 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1절). 성령이 예수를 이끌어간 곳 광야는,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와 이스라엘이 고난을 겪었던 시험의 장소였습니다. 그렇다면 시험의 장소인 광야로 성령이 예수를 이끌어갔다는 말은, 이 시험은 마귀(사탄)의 시험이지만, 동시에 성령(하나님)의 시험이기도 하다는 의미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성서는 하나님이 시험하신다(페이라조, peirazo)는 진실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창22:1), 또한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셨을 때(출16:4), 그것은 시험하기(페이라조, 칠십인역성서) 위함이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백 세에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과 놀라운 양식을 얻은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알기 위한 시험이었습니다(신13:3). “불같은” 시험이라는 말처럼, 시험은 피시험자를 태웁니다. 겉의 것을 다 태워버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그 사람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함(신8:2-3)이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욥이 겪은 불같은 시험에도 하나님은 명백히 관여되어 있었습니다(욥1-2장).
세례, 하나님 아들의 시험
성령 충만(1절)은 세례의 결과입니다. 세례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했다고 공관복음서는 일제히 공시합니다(마3:16; 막1:10; 눅3:22), 이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이끌어가고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시험을 받으십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예수의 ‘성령 충만한 상태’를 언급합니다(4:1). 흔히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는 기쁨과 능력이 가득하여 시험이나 마귀 따위는 얼씬도 못 할 듯한데, 기대와는 달리, 예수께서는 광야로 내몰리고 시험을 겪습니다. 어쩌면, 성령 충만은 시험당하기에 쉬운 상태라는 뜻일 수도 있겠습니다.
누가복음은, 유독, 예수의 세례와 예수의 시험 이야기 사이에 예수의 족보를 끼워 넣습니다(3:23-38). 아브라함에서 예수에 이르는 마태복음의 족보(1:1-17)와는 달리, 누가의 족보는 예수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을 지나쳐 아담과 하나님에게까지 닿습니다. 이는 세례 때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공포한 하늘의 선언과 관련 있습니다. 이 족보 뒤에 이어지는 예수의 시험은 조상 아담이 겪은 시험(창3:1-8)을 연상시킵니다. 시험을 겪는다는 점에서는 아담과 같고, 시험을 이겨내셨다는 점에서는 아담과 대비됩니다.
시험하는 자는 누구인가?
시험하는 자는 마귀(디아블로스, 히브리어 사탄)입니다. 히브리 개념에서 사탄은 하나님과 맞서는 적대적이고 강력한 신적 존재가 아니라, 기발한 방법을 제시하는 일종의 참모입니다. 사탄인 뱀은 ‘하나님처럼 밝은 눈을 갖는 길’을 인간에게 조언하는 안내자 역할을 수행합니다(창3:1-8). 욥기에서 사탄은 욥의 진심을 알아낼 방도를 하나님께 제안하는 모략가입니다(욥1-2장). 예수로부터 ‘사탄’이라는 질책을 받는 베드로 역시, 실상은 선생의 수난과 죽음을 찬성할 수 없어 다른 의견을 내는 충성스러운 참모입니다(마16:21-23).
여기서도, 마귀는 예수와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합니다(3, 9절). 그리고 마귀가 던지는 세 가지 시험은, 예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세상에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제안들입니다. 하나는 광야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서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라는 것입니다(3절). 다른 하나는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도 몸이 상하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성서의 약속을 성취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9-11절). 최고의 참모가 제시하는 손색 없는 제안들입니다.
첫 번째 제안 – 돌들을 빵으로 (3-4절)
사십일 금식의 결과는 배고픔입니다. “주리셨다”라는 언급은 예수께서 인간의 약함과 고통을 가감 없이 겪으신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또한 빵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생명의 조건임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다”(6:21)는 평지 설교에서도 확인됩니다. 이런 요소들을 감안할 때, 할 수 있다면 광야의 돌들로 빵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넘쳐납니다. 예수께서도 시장하시지만,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는 허기진 민중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복음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신8::3)으로 사탄의 제안을 거절하십니다. 빵이 소용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일만큼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은 없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광야의 돌들로 빵을 만들어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일이야말로 하나님 아들의 소임으로 안성맞춤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하여 빵을 먹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급식 이적은 배고픈 이들을 긍휼히 여기심에서 시행된 일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사건이지,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고 인정받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의 급식 이적은 하나님이 세상에 생명의 양식을 주신다는 진리를 가리키는 표적이었습니다(요6장). 말하자면, 주어진 양식을 통해서 생명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산다는 진리를 제시하는 답변입니다.
두 번째 제안 – 모든 것을 넘겨주겠다 (5-8절)
두 번째 시험은, 천하만국의 영광이 보이는 높은 곳에서의 제안입니다. 자신의 권세와 영광이 받은 것이라고 말함으로써(6절), 하나님과 대적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절대로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받은 것이므로 예수에게 넘겨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거짓이 아닙니다. 절을 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예수께 넘겨주겠다는 사탄의 제안은, 말하자면, 끝장 거래(the big deal)입니다. 마귀의 손아귀에서 세상을 건져냄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단번에 이룰 방법이 제시된 셈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죽음조차도 마다하지 않을 판국에, 절을 한번 한들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요?
하지만, 이번에도 사탄의 제안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됩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신6:13)는 말씀 한마디가 세상 구원이라는 명분보다 앞섭니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세상에서, 예수께서는 성공보다 신실함을 선택하십니다. 열매를 맺음도 중요하겠지만 주님과의 신실한 관계가 먼저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못할 것 없다는 주장은 교묘한 기만이며 허세입니다.
세 번째 제안 –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라 (9-12)
세 번째 시험의 장소는,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경건한 이들이 출입하는 성전입니다. 마귀는 예수를 성전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말합니다. ‘(높은 꼭대기에서 뛰어내릴지라도) 천사들이 손으로 떠받혀서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될 것이다(10절)’는 말은, 마귀가 지어낸 거짓 약속이 아니라, 거룩한 책(성서)에 기록된 말씀(시91:11-12)입니다. 마귀의 마지막 시험은 성경의 약속을 성취하라고 제안합니다.
여기에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안전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높은 꼭대기에서 과감히 뛰어내리는 용기, 사람들은 그런 용기를 믿음이라 합니다. 그런 믿음과 표적을 성전에 있는 거룩한 이들에게 과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라는 얘기입니다. 후에 예수께서 십가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지요(마27:40, 눅23:37).
예수께서는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응대하십니다(10절). 신명기 6:16에서 인용된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맛사(므리바)에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했던 사건(출17:1-7)의 배경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라며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하나님을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증거(표적)를 보여 달라는 요구는 믿지 못하는 이들의 요구입니다. 혹은 믿음을 조건으로 하나님을 내 뜻대로 조작하려는 속임수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전 꼭대기에서도, 십자가 위에서도 뛰어내리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탄이 얼마 동안 떠나다 (13절)
시험을 다 한 마귀는 떠납니다(13절). 사탄은, 제안하고 유혹할 뿐, 강제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시험에 넘어지는 것은 사탄의 위력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뱀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결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이든, 사탄의 시험이든, “예”와 “아니오”의 결정은 전적으로 시험을 받는 자에게 있습니다. 단호히 ‘아니오’를 말하는 예수를, 사탄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사탄이 떠나는 것은 잠시(얼마 동안, 13절)입니다. 때가 되면 사탄은 새로운 제안을 들고 유다에게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22:3). 사탄의 제안을 받아든 유다 역시도 자신의 선택을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오로지 유다 자신의 결정입니다. 예수를 떠나 유다를 찾는 사탄, 어쩌면 그 사탄의 방문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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