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녘인의 감사 신명기 16장 13-15절
오늘은 추수감사절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감사 절기는 교우들의 감사 릴레이를 토대로 드릴 수 있게 되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우리 모두의 감사의 내용을 담아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달 동안 평화살림부 주관으로 감사릴레이 자원을 받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감사릴레이를 통해 나눈 고백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동녘인들의 감사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감사릴레이를 쓸 때의 느낌이 어떠셨어요. 힘드셨지요. 그런데 쓰고 나니 어떠셨어요? 내 삶이 새롭게 보이지 않던가요? 너무도 평범한 것들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끼고 있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전도사님의 감사릴레이는 똑같은 상황이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약간의 절망스럽고 허탈한 현실 속에서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또다른 고마움과 감사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음을 세세하게 묘사해 주셨어요. 효정 집사님의 감사릴레이는 짐짝처럼 여겨졌던 식구들이 어느 순간 나를 떠받치고 있는 이들이라는 사실도 깨닫고 더 힘겨웠을 삶의 무게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신실한 신앙으로 그 모든 것을 떠받치고 계시는 어머님을 보면서 신실하게 추앙하는 삶이 가지고 있는 힘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최가연 님, 명정숙님, 고정숙님, 이은숙 님, 최윤정님, 정민정 님, 이재원님, 김미선 님, 김기림 님, 송원석 님 일상, 현장, 관계, 자연, 삶의 소소함 안에서 이루어지는 감사의 내용들을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감사한 것들을 찾아가는 여행은 마치 어떤 느낌이 드냐면 건축가가 재료를 가지고 건축을 하는 느낌, 여기 있는 이 십자가를 조각하신 조각가가 나무를 가지고 십자가라는 예술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같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조그마한 십자가는 그냥 평범한 나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집어 설계하고 파고 조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내 삶의 중요한 의미가 되었습니다.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그렇죠. 그냥 시간, 공기, 본다는 것, 듣는다는 것, 걷는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수없이 많은 행위들이 의미없이 흩어져 있는 것들로 인식해버리면 다 의미없고 하찮은 행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삶의 시간들과 내 삶에 존재하는 것의 의미들을 하나씩 찾아내서 조각하고 그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찾아가는 과정들은 내 삶을 의미화시켜가고 예술화시켜가는 거룩한 예술 행위일 수 있습니다.
최가연 님을 보십시오. 엄마의 속도에 맞춰줄 줄 아는 승현이의 모습을 볼 줄 아는 엄마, 엄마가 아플 때 아픈 엄마를 위해 더 크게 울어줄 줄 아는 승우의 예쁜 마음을 볼 줄 아는 엄마,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들어줄 줄 아는 남편, 감사한 소중한 것들이 지천에 깔려있지만 기억조차 해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보물을 발견하듯이 찾아내 고마워하고 그런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감사하는 삶의 시간들을 만들어가는 모습 자체가 정말 아름답죠.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 살아가도 그 시간속의 삶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내용을 부여하며 좀 더 가치있는 스토리로 텔링해 나아가면 우리는 지옥같은 일상속에서도 천국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한 해 동안, 아니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 속에서 감사의 릴레이를 만들어낸 시간들은 저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그리고 소중하게 살아낸 삶의 시간들을 가치화하고 의미화하는 예술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사실 하나하나의 감사 릴레이를 읽어보면 우리는 지극히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일상이지만 매우 감동적이고 감격의 일상을 살아왔던 겁니다. 그때 그 순간은 몰랐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매 일상을 그렇게 고귀한 감사의 내용이 꽉찬 시간들속 한걸음 한걸음 내디디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술작업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고마움과 축하의 마음을 드립니다.
예수님 항상 깨어있으라 하셨는데 어쩌면 이렇게 감사한 것들을 찾고 발견하는 시간들은 우리가 우리가 살아왔던 삶,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삶에 깨어나는 시간들일찌 모릅니다. 걸어왔던 삶에 담긴 신비, 걸어가고 있는 삶에 대한 신비에 깨어나는 시간! 틱낫한 스님이 사셨던 프랑스 남부의 플럼 빌리지는 그분이 세우신 승가공동체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모든 일을 천천히 한다고 합니다. 길을 걸을 때도 천천히 걷고 밥을 먹을 때도 천천히 먹고 이야기를 할 때도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천천히 하나하나 느끼면서. 이들 공동체의 가장 큰 수행은 천천히 사는 거라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때때로 삶에 있어서 수없이 많은 감사한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니 고맙고 감사하고 소중한 것들이었노라 여기지만 여기 이 공동체에서 수행하는 것은 그 고마움을 그 감사함을 그 소중함은 지금 여기서 살아가면서 이 순간 충만히 느끼며 살아가자라는 거죠. 어쩌면 예수님께서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 바울 선생님의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어쩌면 이 도의 경지를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걸어왔던 삶의 시간들을 감사의 신앙으로 예술화하듯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금의 이순간의 삶에 담긴 신비감과 예술감을 이순간 충분히 느끼며 감사하며 살자는 것이죠. 우리의 소중한 감사가 지나온 소중한 삶의 시간들뿐만 아니라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의 삶에 대한 충만함일 수 있기를 또한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번 감사 릴레이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장성만님의 고백입니다. 삶에는 불안하고 힘들 삶의 순간들이 많은데 더구나 불안이 높은 성격 탓에 겁이 많고 평소에도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순간 그런 일상속에서도 감사한 것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찾아지고 그러면 그럴수록 어느 순간 마음이 평안을 찾게 되고 삶의 기운이 달라진다는 고백입니다.
장성만 집사님의 고백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매순간 어떤 태도를 취하면 살아야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디언 체로키족을 통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산과 들로 데리고 다니며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가르쳤다는 거죠. 꽃과 나무 강물 바위 작은 동물에 이르기 까지 자연의 모든 사물을 직접 보고 느끼게 도와주었다는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손자가 늑대 한 마리를 보고 두려움에 떨면서 할아버지 뒤로 숨더라는 거죠.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껄껄껄 웃으시면 늑대도 자연의 하나이기 때문에 귀한 생명이다 네가 늑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면 늑대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정말 무서운 건 마음 속의 늑대라는 거죠. 하나는 사랑과 평화의 기운을 길러내는 늑대고 또 한 마리는 싸움과 질투와 악한 기운들을 키워내는 늑대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 맘 속에서는 늘 이 두 마리 늑대가 싸움을 한다는 거죠. 그랬더니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묻더라는 거죠. 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러면 둘이 싸우면 어느 늑대가 이기나요? 그랬더니 할아버지왈 네가 날마다 먹이를 주고 키우는 늑대가 이기겠지 그러더라는 거죠.
그리고 잠시 침묵한 뒤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손자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하더라는 겁니다. “대 자연의 모든 생명을 선하고 평화롭고 공존하고 보살피며 돌보듯 아름답게 키우듯이 네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도 그렇게 키워야한다” 우리가 마음을 그렇게 먹고 살자는 겁니다. 마음을 먹으면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지 않아서 그렇지.
장성만 님의 고백은 우리가 불안하고 때로는 폭력적이고 좋지 않은 삶의 기운에 내몰리는 현실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우리가 어디에 무슨 일들에 에너지를 쏟아야하는지를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하박국 선지자의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 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그는 공의롭게 살고 정직하게 살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시고 굶주린 늑대보다도 사납게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처럼 날세게 자신의 삶을 엄습하는 폭력자들의 폭력적인 현실에 개탄을 합니다. 그래서 소출이 없고 딸 열매가 없고 돌볼 송아지도 없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겠노라 고백합니다. 폭력에 주눅들지 않고 변절해서 그들과 한패되지 않겠노라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그런 현실속에서도 자신의 삶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가면서 결국은 정의가 승리하는 세상을 살아가겠노라고 뚝심있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삶이 때때로 자신을 속이고 배반할지라도 슬픔과 고통에 농락당하지 말고 선하신 하나님과 함께 감사와 기쁨의 에너지로 내 삶을 가꾸어가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허락한 이 소중한 시간은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나의 우리들의 소중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우리의 감사릴레이를 보면서 오늘의 본문을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의 추수 때 드려진 감사절기입니다. “너희는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에서 소출을 거두어 들일 때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켜야 한다. 너희는 이 절기에 너희와 너희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성 안에서 같이 사는 레위 사람들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함께 즐거워해야한다.”
신앙의 선조들은 감사의 절기에 혼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나누고 섬기면서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두 분의 감사 릴레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감사만 한 죄 그 어머님이 새벽에 홀로 기도를 드리면 그렇게 회개했답니다. 단속반들이 다른 사람들 벌금 물릴 때 자신은 용케 배려해주었었던 것을 감사한 죄 다른 사람 일자리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 자신의 일자리는 끊이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만 한 죄, 민주화운동 하면서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 정권이 교체되어도 살아돌 아오지 못했을 때 사형받고도 몸 성히 살아 돌아온 불쌍한 자식새끼에 감사만 한 죄, 그 죄를 그토록 서글프게 참회하시더라는 겁니다.
그 박노해씨의 어머님의 모습을 보고서부터는 함부로 감사라는 단어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더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감사는 자족적인 신앙이 아니라 더 겸손하고 그래서 더 낮은 곳으로 흘러 감사조차도 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을 살아가는 곳으로 흘러야한다는 신앙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나병환자의 비유를 보면 병 고침을 받은 열사람 중에 유독 한사람 사마리아 사람만이 감사 하러 예수님 앞에 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신앙에 감탄하고 감격하셨습니다. 산다는 것은 기적과 같이 신비롭고 아름다우나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삶 역시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자의 것일 뿐입니다.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의 조각들에 의미와 생기를 불어넣고 모순과 절망의 현실속에서도 삶의 선한 기운들을 물주면서 그 에너지로 우리들의 또다른 아픔과 고통의 현장들을 품어가며 모두에게 소중한 삶을 모두에게 소중한 삶으로 선물하는 귀한 감사절 이루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