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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tigerykdianne님이 2012-03-19 23:32:04 쓰신글
어제 저녁에 집안 쓰레기를 모아서 쓰레기통에 넣으려고 뒷마당에 나갔다가
그 작은 깻잎밭에 벌써 잡초가 번지기 시작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작년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들깻잎 씨를 한개도 못받아서 올 봄엔 뿌릴 씨도 없이
밭에서 싹이 나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들깻잎 싹이 적지않게 나온 것이 보였다.
그 밭 가장자리에 잡초가 나와서 밭을 넘보는 것 같아 밖에 나온 김에 장갑을 끼고 잡초를
뽑느라고 쪼그리고 앉아서 눈에 거스리는 것만 대강 뽑다 보니 무릎과 등이 꽤나 힘들었었다.
나는 수십년 전에 할머니께서 미국에 오시자마자 뒷마당의 반을 밭으로 만드시고
밭농사로 소일하시는 것을 볼 때마다 저 힘든 일을 왜 저토록 열심히 하시는지 이해는 커녕
나는 절대로 저런 힘든 일은 안 할거라고 다짐을 했었는데 오늘날 내가 밭에
쭈그리고 앉아서 풀을 뽑다 보니 사람은 두손을 배위에 얹을 때까지 큰소리치지 말라는 말은
이런 나를 두고 한 말이구나 싶다.
나의 텃밭은 이름이 밭이지 할머니께서 밭농사 하시던 큰 밭과는 비교 할 수도 없이 작은데...
아주 오래 전에 나의 외할머니께서 막내이모님댁에서 함께 사시며
집 뒷마당에 넓은 잔디밭을 절반은 잔디를 떠내고 밭을 만드시곤
온 종일 가족들이 없는 낮시간에는 밭에서 사셨던 생각이 떠올랐다.
항상 할머니한테 해가 있는 낮시간에 방문을 할 때면 언제나 집 현관문도 열어 놓으신 채로
뒷마당에서 밭을 김매시는 일에 열중을 하고 계시곤 했었다.
그 시절엔 현관문을 낮시간 동안 열어 놓고 있어도 도둑맞을 걱정하는 일이 없었고
할머니께서 사시던 그 동네는 아침에 모두가 출근을 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적막하기까지 한
조용한 동네로 월요일 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같은 시간에 우체부가 지나다가
주민들과 마주하면 인사를 나누며 근황을 주고 받고,
앞집, 옆집 사는 주인들이(대부분 은퇴한 노인들이였음) 밖에 나와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어쩌다 지나다니는 자동차 소리만 가끔 조용함을 흔들어 놓는 그랬던 그 거리의 모습과 함께
할머니의 밭농사 짓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구글 밭농사 이미지 중에서: 유감스럽게도 나의
할머니의 밭이 사진으로 남겨진 것은 없고 이 사진
에서 보이는 네모난 블럭들 4개 정도 크기의 밭이
할머니의 텃밭이였기에 올려 보았다.
나의 외할머니께서는 유학생이였던 막내아들의 초청으로 1971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셨다.
그러나 아들과는 오래 떨어져 사셨던 터이고 그 아들네엔 손주가 없으니 할머니는 할 일 없이
아들내외가 출근하고 없는 빈 집만을 지키는게 무료하신 나머지
막내 이모가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부터 막내이모님댁의 손주들 3남매를 맡아 돌보시며
살림도 도맡아 하시느라 심심하기는 커녕 오히려 바쁘게 지내셨다.
이모부와 이모께서도 두분 모두 직장에 다니셨기 때문에 외할머니께서는 막내딸네 살림을 하시면서
뒷마당에 넓은 밭농사까지도 하시며 미국생활에서 외롭고 답답함을 그 밭농사로 달래신 것이다.
아침이면 모두들 등교하고, 출근하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심심하실 시간이 없으셨었다.
살림을 하시면서 낮에는 밭에 나가 고추, 상추, 배추,호박등의 농사일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쁘셨다.
바로 옆집엔 은퇴한지가 꽤 되는 나의 할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백인인 파시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전형적인 미국의 중산층으로 그 집의 뒷마당에 따로 만들어진 창고엔 연장이 없는게 없었다.
어느날 체구가 작은 할머니께서 넓은 뒷마당을 밭으로 만들기 위해 호미자루한개를 들고
뒷마당 잔디를 떠내는 것을 본 그 파시노영감님은 삽과 괭이를 들고 와서는 기운차게
그 뒷마당 반이나 되는 꽤나 큰 밭을 하루도 아니고 며칠에 걸쳐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할머니께서는 그 고마움에 해마다 밭에서 처음으로 소출이 되는 야채들을 골고루 담은 한바구니와
밭 옆에 자리잡고 있는 큰 고목의 살구나무에서 붉은기운이 발그레 도는 살구가
(그 나무에서 익은 살구는 유난히 달고 맛있었음) 익으면 그 살구와 함께
옆집 파시노부부한테 보내시는 것은 그 집에서 막내이모네가 새집을 짓고
이사 하실 때까지 한해도 거르지않고 하셨었다.
로스앤젤스의 날씨는 건조하고 더운날씨로 조석으로는 선선하기 때문에 옛날 집에는
요즘 처럼 중앙냉방장치가 없고,
방마다 창문에 달린 작은 냉방장치만 있는 오래된 집에서 사셨었다.
한낮에 뜨거운 햇볕에 더위를 달래려 밭에 김을 매다가 집에 들어와 한숨 쉬고
더위를 쫒으려고 부채질을 하고 있으려니까 파시노영감님이 이를 보고는
자신의 창고에 두었던 사용하지않던 오래된 선풍기를 꺼내 가져다 주면서
자기는 사용하는 것이 아니니까 갖고 필요 할 때 사용하라며 주었다는
그 선풍기는 작동이 되기는 하는데 선풍기 머리가 하늘로 향한 채로만 돌아가고 있어서
앉아서는 바람을 쏘일 수가 없는 것이였다며,
그래도 그 파시노영감님의 마음 씀씀이가 할머니한테는 고맙게만 느껴지시며
말도 안 통하는 나한테 이런 것을 가져다 줄 생각을 했다니
인종이 달라도 인정을 베푸는 사람의 마음은 다 같은 모양이라고
두고두고 천장을 향한 선풍기 이야기를 하시곤 했었다.
영어란 한마디도 못하시기에 할머니께서는 옆집 노부부와 단한마디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옆집 고양이한테"코맹, 코맹."하시는 할머니시다.
나는 그 코맹이 무슨 말이냐고 여쭈었더니 옆집 파시노부인이 고양이한테 그렇게 말하더라고,
사촌동생의 설명이"come on."하는 말을 들으시고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우리는 또 얼마나 웃었는지... )
그리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미국에 오신 친척분이 다운타운에 버스타고 나갔다가
귀가길에 버스에서 내리는 정류장을 잃어 한정거 더 가서 내려서 집으로 오는 길을 찾느라고
당황하던 중에 옆집에 살던 사람이 얼굴을 알아 보고는 길을 가르쳐주었다며
고마운 맘에 영어를 못하시는 분이"땡큐(Thank you.)"라고 인사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우리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그런 때는 베리마치(very much)까지 하지 그랬냐."
고 일깨우시는 경우를 꼼꼼히 따지는 분이시기도 했었다.
이렇게 서로 도움을 받고 고마움을 표시하며 정을 주고받는 인지상정의 삶으로
고희를 넘긴 연세에 시작된 미국생활을 누구한테도 그 투정이 없으셨으며
스스로 외로움을 달래며 사신 분이셨다.
그 밭에 온 정성을 쏟으시며 밭에 심은 것들을 거두실 때마다 막내이모님 식구들이 실컷 먹고도
넘쳐나는 밭에서 거두는 채소들을 할머니께서는 주변에 나를 포함해서 아시는 분들한테
연락을 하시면 모두들 퇴근길에 막내이모님댁으로 와서 할머니께서 봉투마다
이름을 적어 놓으신대로 고추, 상추, 호박, 배추등을 얻어가며 고마워하곤 했었다.
그렇게 채소들을 얻어가신 분들은 할머니께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맛있는 음식을 집에서 만들었다며 잡수시라고 우정 먼길을 마다않고 찾아 오기도 했었다.
그래서인가 막내이모님댁은 한국에서 말하는 종가집인양 항상 손님이 드나드는 집이기도 했었다.
때가 되면 작지않은 밭농사를 하시는 할머니를 위해서 막내이모부께서는 할머니께서 필요한 것을
써놓은대로 갖가지 채소씨와 비료, 제초제등을 열심히 사들여 놓으셨다.
그러면 할머니께서는 그것들을 한 낮에 혼자서 조금씩 퍼다가 밭에 뿌리고,
김매고, 열심히 물을 주시고, 온갖 정성을 기우리시며 당신의 답답한 마음과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하시는 마음 속 깊은 화를
달래며 푸시는 곳이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이제서야 해보기도...
하루는 내가 이모님댁에 낮에 들린 적이 있었다.
여전히 할머니께서는 큰 그로서리 종이봉투를 들고 밭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주워담고 계셨었다.
나는 궁금해서 종이 봉투를 들여다 보니 밤톨보다도 크게 보이는 징그럽기까지한
달팽이가 가득했었다.
그 달팽이가 상추등을 모두 먹어치우니까 할머니께서 골라내고 계셨는데
내가 약을 뿌리면 될 것 같다는 말에 할머니 말씀이
"약을 뿌리면 손쉽게 죽일 수는 있겠지만 상추나 쑥갓에 해가 될가 걱정이 되고,
씻느라고 신경써야 하고, 또 달팽이도 생명인데 함부로 죽일 수는 없으니까.."
(할머니는 유기농이란 개념이 그시절엔 일반 대중들한테는 없을 때인데 유기농까지는 아니더라도
농약에 대한 염려가 되셨던 것 같다.)
나는 속으로 결국 그 달팽이를 그렇게 봉투에 담아서 버리면 죽어 버릴텐데... 하기도.
아무튼 할머니의 밭농사는 당신의 건강이 허락하시는 날까지 호미를 손에서 놓치않으셨었다.
옆집 파시노부부는 한낮이 되면 집앞의 포치에 나와 앉아서 밝은 햇볕을 쏘이곤 했다.
가끔은 파시노영감님의 아내는 집에서 한블럭 떨어진 슈퍼마켓을 작은 손가방을 들고
다녀오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했었다.
그 파시노의 아내는 키가 크고 깡마른 체격에 담배를 피워 문채로 느릿하게 걸어서
다녀 오는 것을 볼 때마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꼭 한말씀 하신다.
'저 부인은 팔자가 늘어진 여자다. 급한 것이 없고, 마켓에 갈 때면 담배피워 물고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느리게 걸어서 다녀 오거든. 생전 웃으며 눈마주치는 법도 없고...'
지금에서 생각해 보니 아마도 할머니께서는 남편과 함께 두분이서만 단촐하게 사는
그 파시노부부가 내심 많이 부럽고 또 그 파시노부인과 인사말이라도 건네고 싶으셨지만
말이 안통하니 무척이나 답답하고 친구처럼 지낼 수도 있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까우셨나 보다.
그러다가 얼마 안되어 그 파시노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시면서
혼자 남은 파시노영감님을 볼 때마다 처량맞아 보인다고 애처로워 하셨었다.
할머니께서는 연세가 드시면서 점차 머리가 빠져 숫이 적어진 머리를 여전히 쪽을 찌고 계셨었다.
그리고 외출하실 때는 반드시 한복을 입으셨기에 가는 곳마다 할머니의 한복에
주변의 많은 미국사람들로 부터 시선을 한몸에 받곤 하셨었다.
그 쪽을 찐 머리를 감으실 때마다 번거롭고 머리가 더 많이 빠지기도 하니까
머리를 짧게 자르면 어떠시겠느냐는 말씀을 드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 때마다 할머니께서는 평생을 가위란 가까히 해본 일도 없는 머리에 대한 애착이 강하신듯
"그래서, 미국할아버지들이 머리가 길어서 머리카락이 빠져 머리가 무릎팍이냐?
멀리서 보면 얼굴인지 머리뒤통수인지 알아 볼 수가 없으니..."
대머리를 무릎팍이라고 표현하시는 할머니가 말씀하실 때마다 우리는 박장대소 했었다.
몸이 편찮아지시면서 누워계신 시간이 길어지게 되어 할머니를 위해 입주해서
할머니를 24시간 돌봐드리는 도우미를 막내이모님께서 집에 구해 두셨다.
할머니께서는 그때는 이미 대소변도 돌봐드려야 할 정도로 노쇄해지셨으나
그래도 정신은 맑으신 편으로 사람을 못알아 보실 정도는 아니였었다.
그리고 나의 엄마는 매일 점심 때면 할머니를 방문해서 점심식사 하시는 것을 돌봐드리고
돌아오시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께서는 바쁜 와중에 방문한 것을 알고 있는데 미안한 마음과
또한 헤어져야 할 섭섭한 마음에 늘상 입버릇 처럼 내가 빨리 죽어야 할텐데...
하시는 말씀에 둘째딸인 나의 엄마는 그 말씀을 처음 듣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도 식사 후에 자리를 떠나야 하는 것을 서운해 할 할머니한테
또 간다는 인사말을 하기가 쉽지않았던 터라
나의 엄마는 인사말 대신
"엄마, 정말로 죽고 싶으세요?"
"그럼, 정말이고 말고. 내가 빨리 죽어야 너희들이 편해질테니까..."
"그렇다면, 걱정마세요. 내가 지금 가서 먹고 죽을 약을 사갖고 얼른 돌아 올게요."
그러면서 그자리를 떠났다고 엄마가 말씀하셨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할머니를 방문했을 때에 그 도우미가 웃으면서
"어제 할머니께서 둘째 따님이 떠나신 후에 나보고 둘째는 갔느냐고 물으시더니
그런데 걔가 정말 먹고 죽을 약을 갖고 오면 어쩌지?"
하시며 걱정스럽게 말씀하셨다고 하더란다.
할머니께서 그렇게 누워계셨을 때가 지금도 내기억에 확연한데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나의 엄마가 그 할머니의 자리에 계시게 된 것 같고,
나는 먹고 죽는 약을 사갖고 오겠다며 엄마를 두고 자리를 떠나야만했던
내 엄마의 자리를 넘겨 받은 상황 처럼 된 것 같으니 머지않아
내 할머니 자리를 내가 맞게 될테고 내 아이들이 지금의 내자리에 맞게 되는...
돌고 돌며 되풀이 되는 것이 인생살이였나?
첫댓글 ㅎㅎㅎ
옛날 3대 거짓말이
노인이 "빨리 죽고싶다"
노처녀가 "시집 안가요"
장사꾼이 "밋지고 판다"
라고 했는데..
할머니께서 자식들한테 미안해서 "빨리 죽고 싶다"라고
마음에 없는 말씀을 하셨네요
나는 요즈음 말씀도 못하시고
누워만 계신 엄마를 시중하면서
"엄마가 진정 이렇게 사시는걸 원하실까?"
의문도 갖지만
그래도 살아계신게 죽는것 보다 나은거지
생각합니다
정말 외할머니의 미국생활을 감동으로 읽었어요.
제 친정아버지께서 1970년에 유학오셨는데,
그 다음해에 할머님께서 미국에 막내아드님댁에 오셨다가
나중에는 막내이모님댁에서 사시다 돌아 가셨군요.
제 친정어머니는 만으로 다음달이면 93세가 됩니다.
아버지는 만66세때 1994년 친정집 현관문위 새집을 치우시다가
떨어지셔서 머리를 다치신후 뇌사상태로 계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후 친정어머니도 오래 사셔야 할텐데
걱정을 했는데,어머니는 아직도 건강하십니다.
오늘도 낚시를 갔다는 큰남동생의 점심과 저녁으로 김밥을 싸셨을거예요.
저는 이제껏 살면서 외롭다는 생각을
안하고 살았는데,요즘 조금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오늘은 미국의 메모리얼데이로 공휴일인데,
해마다 가족들이 모여서 고기를 구어먹고 담소를 했었는데
어머니께서 부엌을 결혼 안한 여동생에게 물려준뒤 가족들을 안부르네요.
친정이 이젠 여동생집 같아요.오늘 제가 음식을 사가지고 친정에 가려고 했었지요.
저희집에서 운전해서 35분거리의 알렉산드리아에 친정이 있어요.
위글을 읽으면서 가족간에 화목함이 참 부러워요.
외할머니께서 자녀들을 잘 키우셨네요.
제가 댓글을 달고 보니,제가 댓글단것 내용과는 먼 제목이네요.
제가 절못 이해했나 봅니다.
두번 읽었는데도 저는 외할머니 얘기만 본것 같아요.
좀더 더 읽어 볼게요.
내용에 외할머니 이야기가 대부분 이지요.
저도 mstiger님 외할머님 이야기를 감동으로 읽었어요
낯설은 미국땅에 자식들 때문에 오셔서는
손주들 키워 주시고
열심히 농사지어서 이웃, 따님들등 주위사람들한테 논아주는
기쁨으로 사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