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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주의 은혜의 해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3장)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인과론은 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보편적으로 인정해온 신념입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거나 ‘과도한 흡연은 폐병을 초래한다’는 식의 주장이 다 인과론에 해당합니다. 성공 시에는 성공의 원인을 찾고, 실패했을 때도 실패 원인을 따집니다. 납득할 만한 원인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결과를 수긍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단과 공동체가 공유한 인과론적 이해는 그 사회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결속감을 부여하며 질서와 안정에 기여합니다.
인과론은 특히 종교적 믿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길은 보살피시고, 악인들은 망하게 하신다”(시1:6)는 원칙은, 하나님 신앙을 가진 이들이 믿는 보편적 인과론으로서, 구약성서의 지지를 확실히 받습니다. 의인은 흥하고 악인은 망한다는 확신은, 유대교에서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도 줄기차게 설득력 있는 지위를 누려왔습니다.
그들의 비명횡사는 죄 때문인가? (1-5절)
이런 논리에 따르면,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들이나(2절), 무너진 실로암의 망대에 깔려 죽은 예루살렘의 사람들 모두 자기 죄의 대가를 치른 결과라고(4절) 해명됩니다. 권력에 희생된 갈릴리 사람들이나 재난 사고의 피해자들인 예루살렘 사람들의 죽음은,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한 정당한 심판이라는 견해입니다. 이는, 욥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가 욥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하는 욥의 경건한 친구들의 논리와 같습니다. 2004년 성탄절 다음 날, 동남아시아에서 쓰나미가 발생해 삼십만 명 이상 사망했을 때, 한국의 상당수 교회는 피해 지역의 문화와 종교와 죄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심판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처럼 비참을 겪는 이들을 정죄하는 이들은 “나는 그들과 다르다”라는 저의(底意)를 숨기고 있습니다. 정죄를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함으로써, 차별과 이차 가해가 벌어집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이 참극을 어떻게 설명하셨을까요? 예수께서는 학살당한 갈릴리의 사람들이 죄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망대에 깔려 죽은 이들이 무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이들의 죄가 참변을 당한 이들의 죄보다 덜하거나 가벼운 것은 아니라고 언명하십니다. 죄로 말하자면, 죽은 자나 살아 있는 자나 다를 게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두 차례에 걸쳐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처럼 망할 것이다!”(3, 5절) ‘죄로 인해 죽는다’는 철칙을 뒤엎는 새로운 주장이 등장한 것입니다.
구원의 새로운 기준, 회개
구약성서는 사람을 구분할 때, 죄인(악인)과 의인으로 나눕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의인이고,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죄인입니다. 의인들은 형통할 것이고, 악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 신앙의 기본 토대입니다. 이 믿음에 의하면 악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보응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애써 의롭게 산 이들의 노력과 수고가 물거품이 됩니다. 하늘에 사무치도록 죄를 일삼은 니느웨 사람들이 망하지 않고 용서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요나가 하나님께 따지면서까지 분노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욘4장). 정의로운 하나님이라면 악인들에게 반드시 심판을 집행하셔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의 복음은, (죄인과 의인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와 회개하지 않는 자로 사람을 나눕니다. 생명과 죽음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죄의 유무에 있지 않고, 회개 여부에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아들에게 ‘죄’가 추궁되지 않고,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 부각됩니다(눅15:11이하). 아흔아홉 명의 의인이 존재하는 상황보다, 한 명의 죄인이 회개하였다는 사실에 천국이 기뻐합니다(눅15:7).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에게 낙원이 약속되는 장면은, 회개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24:39-43). 누가복음에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요구는 없고, 회개하라는 명령만 존재합니다. 회개는 지체없이 용서로 이어진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구원인 용서는 회개를 통해 제한 없이 주어집니다.
복음 : 회개와 죄의 용서
죄(罪)는 과거를 주목합니다. 죄는 이미 발생한 행동이고, 지울 수 없는 낙인이며, 심판이 작동할 이유입니다.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해 논한다면, 심판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자비와 긍휼은 개입될 자리를 잃고, 죄와 결부된 과거가 모든 판단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과거의 죄를 결정적 사안으로 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이의 현재입니다. 과거는 닫히지 않았으며, 현재는 과거가 용서되는 시간이며, 미래는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진리가, 회개와 용서를 통해 설파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할 복음이 ‘회개와 죄의 용서’라고 규정하셨습니다(눅24:46-47). 가장 널리 알려진 예수의 첫 복음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입니다(마4:17).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는 망한다’고 단정하십니다. 가장 악하다고 알려진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 때에 일어나 이 세대를 심판하게 되는(11:32) 이유는, 그들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를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벳새다와 고라신이 화를 당하는 것은 죄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눅10:13).
의인의 노력 vs 죄인의 회개
벳새다와 고라신은 갈릴리 지경의 유대인 마을로서, 경건한 유대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회개하라는 예수의 복음을 그 도시들이 외면한 이유는 상대적으로 죄가 적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멀리하여) 의인이 된다’는 신앙의 목표를 따라 율법 준수에 매진하는 그들은 ‘회개하라’는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회개하는 삶이 아니라, 회개할 것이 없는 의로운 삶에 관심을 둡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수의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였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라는 저주에 이어지는,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10:13)라고 말씀이 눈길을 끕니다. 두로와 시돈은 죄 많다는 이유로 벳세다와 고라신 사람들이 멸시하던 이방인 지역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처럼, 죄 많은 이들에게는 회개와 용서가 유일한 길입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가책, 용서를 구함, 의롭게 살려는 결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함을 시인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악을 씻고 의로워짐이 아니라,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함입니다.
무화과나무 비유 (6-9절)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이 메시지를 이어갑니다.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려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가 있다는 것부터 적절치 않습니다. 큰 줄기 가지와 깊은 뿌리를 지닌 무화과나무는 주위의 포도나무 성장에 지장을 줍니다. 그렇게 넓은 자리와 양분을 차지하면서 삼 년(레19:23에 따르면 6년)이 넘도록 열매를 내지 않았다는 것은 결정적인 심판 사유, 즉 제거당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열매를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있습니다. 길을 가시던 예수께서 시장하시던 차에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얻으려고 다가가셨습니다. 하지만 나무엔 열매가 없었고, 예수께서는 그 자리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그러자 나무는 죽어버립니다(막11:12-14; 마21:18-19).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제거되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을 기회로 일 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심판과 자비의 대화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 명령하는데, 포도원 지기는 일 년 동안 더 무화과나무를 살려두고 돌보겠다고 탄원합니다. 심판과 자비의 대화인 셈입니다. 결과, 심판의 시행은 유예되고 일 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는 열매 맺음(누가복음에서의 열매는 회개)을 기대하며 주어지는 집행유예입니다. 그냥 지켜보겠다는 심사가 아닙니다. 포도원 지기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둘레를 더 깊게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경우에 맞지 않는 처사입니다. 고대 포도원 농부의 일은 울타리를 세우고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습니다(마21:33). 포도 열매 맺는 가지는 다듬어주고, 열매 없는 가지는 잘라서 버립니다(요15:2). 어느 포도원 지기도 무화과나무의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지는 않습니다. 포도원을 망치는 일입니다.
포도원 지기의 행동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판에 두고 무리를 이탈한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만큼이나, 한 드라크마를 찾겠다고 온 집 안을 청소하면서 뒤지는 여인만큼이나, 마을 어귀까지 나가 서서 방탕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행동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하고자 하는 바는 잃은 자들을 찾는 것, 곧 회개를 통한 용서입니다.
일 년 후에 과연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까요?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포도원 지기도 ‘열매가 열릴지도 모른다’(9절)고만 말합니다. 지난 수년 동안 열매를 내지 않은 나무라면 내년라고 가망이 있을 리 만무지만, 자비는 심판을 설득합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다(눅4:19)
오늘의 본문은 12:1-13:9에 걸친 긴 어록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의 본문 직전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12:56)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12:58)고도 명령하십니다. 원래는 동떨어진 두 말씀을 모아서 누가복음은 이 시대의 뚜렷한 특징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분간해야 할 이 시대는 ‘화해해야 할 때’, 즉 회개해야 할 시간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첫 선포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 선포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구절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4:19)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주목받는 “주의 은혜의 해”는 심판이 유예되고 회개를 통한 죄 용서의 은혜가 작동하고 있는 한 해, 즉 무화과나무의 일 년입니다. 자비가 심판을 설득하여 일 년의 유예가 은혜로 주어진 시간입니다. 회개가 긴박하게 요구되며,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때입니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심판이 말하는 경고가 아니라, 자비가 말하는 권고입니다. 이 권고가 어느 때보다도 크게 들려오는 사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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