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빵)
아내가 큼지막한 빵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우리 집 아이들은 나를 닮아서인지 무척이나 빵을 좋아라한다. 봉지에서 빵이 쏟아져 나왔다. 막내아들은 단팥빵을 쥘 것이고 큰 놈은 크로켓(고로께)을 잡을 것이다. 나는 당연 크림빵이다. 생김새만 보아도 나는 무슨 빵인지 알아 차릴 수 있다. 곰보빵이나 도넛같이 표가 나지 않는다 하여도 식별이 가능하다.
어느 제과점이든 길쭉하게 만드는 것이 크림빵이고 둥글 펑퍼짐한 것이 단팥빵이다. 크림빵이 길쭉한 것은 한쪽을 베어 물을 때 미끌미끌한 크림이 불쑥 튀어 나오지 않도록 입안 크기에 딱 맞도록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숫하게 먹어온 경험에서 자연 알게 된 상식 같은 모양새다.
나는 어릴 적 한 때 크림이 들어가 있는 것만이 빵인 줄로만 알았었다. 빵이 원래 우리나라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서양식엔 서양식 같은 내용물이 들어 있으리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오히려 단팥이나 흑설탕이 흔하였었다. 흔한 만큼 어딘지 모르게 깔끔하지도 못하고 사뿐한 모양새도 아니었다.
크림 빵 하면 나는 어린 시절 까무잡잡하여 깜상이라 불렸던 동네 친구가 떠오른다. 그 빵에 맛을 들이게 된 것은 바로 그 친구 집에서였다. 그 아이 집은 올망졸망 모여 사는 가난한 마을 한가운데 사거리 길에서 구멍가게를 했었다. 구멍가게라지만 가게가 생기고 나서는 동네에선 제일 번잡한 마당이 되었다.
아이들은 몰려들어 뭐든 사들고 나오면 침을 질질 흘려가면서 쫓아다니며 얻어먹곤 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애와 나는 같은 반이었다. 그 애 집에서 숙제를 하던 어느 날 그 애는 가게로 들어가더니만 나무판자 속에 있는 달콤한 그 무언가를 꺼내왔다. 바로 크림빵이었다. 당시로서는 라면이랑 값이 비슷하였으니 꽤나 비쌌다.
빵은 둥글납작한 보름달 모양이 반으로 탁 포개져 있었다. 다 먹고 나서도 아쉬워 소가 하는 것처럼 혀를 내둘러 입가 하얀 향내를 한참이나 훑었다. 나는 이후 달콤함에 빠져 웬만하면 그 애 집에 가서 숙제를 하거나 그 애 마당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 집도 다른 집처럼 그 애 집에다가 외상장부란 것을 만들어 놓았었다.
엄마는 콩밭이나 감자밭에서 일하는 때가 많았는데 동생들을 데리고 잘 논다거나 시험을 잘 봤다거나 심부름을 잘했을 때나 숙제를 일찍 끝내놓고 다른 공부를 하는 척하거나 하여 기분이 좋은 날엔 외상장부에 달아놓고 먹으라 하였었다. 그때마다 나의 단골은 크림빵 아니면‘라면땅’이었다. 그 아이 또한 누구도 모르게 나를 위해 아낌없이 내 주었던 크림빵이다.
나는 그 때 달콤함은 가치가 있으며 우정이나 양심이 돈보다 크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일기장에다가 크림빵의 맛을 전하였고 우정이란 단어를 배열했었던 기억이 있으며 외상장부에 몰래 올려놓고 먹으려다가 그만 둔 가슴 두근거린 추억도 있다. 하지만 그 애와의 우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는 ‘계’란 것이 무척이나 성행하였었다. 계모임에서 그 애 엄마는 일본말 ‘오야’라 하는 계주였다. 보통 계는 한 집이 두 개정도의 순번을 받는데 돈도 뒤에 탈수록 많이 타게도 만들고 불입금도 앞에 탄 사람이 갈수록 더 내도록 구성을 하였다. 우리 집은 신용이 좋다는 이유로 타는 순서에서 앞 선 번호 하나와 끝번에 가까운 것 하나를 꼭 챙겼었다.
물론 첫 번은 계주가 탔다. 당시는 이자놀이 또한 대단하였고 이자가 2부5리에서 4부까지 했다. 엄마는 무척 셈이 빨랐다. 앞 순번에 타서 이자를 놓으면 불입할 것이 얼마만큼 적게 드는 것인지도 계산을 다하고 하다못해 몇 번째 낙찰되는 것이 유리한 것인지 까지 따져서 꼭 그 번호의 순번을 차지하였었다.
이자를 놓는다고 아버지하고 험한 소리가 오갔으면서도 엄마는 악착같이 그리 하였다. 그런데 계란 것이 순탄하지가 않다. 계돈을 못내는 사람도 있게 되고 낙찰이 되고서는 도망치는 사람도 생겨난다. 그럴 때 계를 깨어서는 안 될 것 같으니 계주가 그것을 부담하고 이끌어 가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그 애 엄마도 그러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애 엄마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동네가 난리가 났다. 몇날 며칠 계원들이 그 집 안방을 차지하였었다. 엄마도 돈을 떼였다. 억울하다고 몇날 며칠을 집에 누워만 계셨다. 이자 돈 챙기려다가 큰돈을 떼인 것이니 당신으로서는 얼마나 애가 탔을까. 다시는 계는 안 하겠다고 말을 하는 엄마였다. 그때 오히려 나는 크림빵을 많이 먹었다. 자식들 먹고 싶은 것도 잘 안 해준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젠 아무 소용이 없다 하면서 엄마가 덥석 사준 크림빵이었다.
정작 그때 나는 그 아이 생각은 하지 못 하였었다. 나에게 크림빵을 나누어 주던 그 아이가 떠오르지도 않았으며 어른들이 그 집을 대하듯 따돌리지는 않았다하여도 어색하게 대하였던 것만 같다. 그 후로 그 애와는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봇물이다. 달콤한 크림은 정작 우정이 있었기에 그리 달콤하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 일기장에 써 둔 우정이란 의미는 필경 맞는 말이며 지켜지고 간직하면 좋았을 것인데 전혀 그러하지 못하였다. 지금 나는 달콤한 것이 크림빵이 아니라 정작 우정이었다 하는 말을 못하는 마음이 못내 서글프다. 그 아이가 내게 주었듯 내가 그에게 온정을 준 기억이 딱 한 번만이라도 뚜렷이 살아 있는 것이라 한다면 얼마나 마음 후련한 일일까.
지금에 와서 불현듯 그 애가 눈물 되어 떠오르는 것은 달콤하다 하는 느낌이 추억 속에 묻어난 하얀 포말 같은 그리움이기 때문이거나 그 시절 어리석었던 잔재마저도 놓치고 싶지 않은 충동이 무수히 일어 정녕 달콤한 미소를 이제라도 되찾고 싶기 때문 일거다. 이제 다시는 달콤함이라면 그 무엇이든 놓치지 않으려 한다. 달콤함은 무엇이든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2005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