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의 징검다리인 수요 말씀: 시편 묵상 이야기! ◈
핵심 주제: 빛나는 유산!(4월 3일)
본문: 시편 17편 주관&찬양: 신양균님 가정/기도: 김경미님
17편 시인은 자신이 순전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에서 욥과 많이 닮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의 부자 청년처럼 율법을 다 지켰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4절, “나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랐기에 약탈하는 무리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에서 비슷합니다. 여기서 약탈하는 무리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강도나 도둑의 의미를 포함하여, 권력이나 지위 등을 이용한 착취까지를 말합니다. 그러니 시인은 이런 간접적 수탈조차 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세상적 기준의 도덕성을 잘 지켰음으로 항변하는 겁니다.
그러니 시인은 세상적 기준에 의하면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욥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헤세드’(오직 은총)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조건이나 요구가 아닌 전적으로 사랑만으로 바라보신다는 걸 깨닫지 못합니다. 전적인 헌신을 드릴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도 전적인 은총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밤에까지(3절) 찾아가 살펴주십니다. 밤에까지 찾아가셨다는 건, 당신은 완벽한 존재이나 혹여 누락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검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이 아닌 사람(나)의 입장에서 돌봐 주신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해한다는 말의 언더스탠드(understand)는 남보다 아래에 위치하여 바라보는 걸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사람(나)보다 아래에서 바라보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자의 근본 자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요구를 쏟아냅니다. 1절, 나의 진실을 변호하여 주십시오. 꼭 내 뜻대로 해달라는 겁니다. 시인은 자신의 결백함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간청이 아니라 요구나 거래의 느낌이 짙습니다. 3절, 시인은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기 위해 남들의 처지와 형편을 밖에 둡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이 기준이 되어 타인을 평가하는 데 익숙하죠. 이러다 보면 자신의 정당성에 의해 상대는 언제나 그릇된 존재가 됩니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의 순전함을 남과 비교함으로 정당성을 찾고자 합니다. 오류도 있지만, 시인에게서 보여지는 건 당당함입니다. 원래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밖의 사람들로부터 얻은 칭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크리스천들은 당당했습니다.
당당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삶이 순교라는 말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걸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래도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자부심, 이것이 사랑과 합해지면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시에서 가장 압권은 8절입니다. “주님의 눈동자처럼 나를 지켜주시고, 주님의 날개 그늘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눈동자처럼과 날개 그늘이라는 표현은 신명기 32장 10-11절로부터 인용된 겁니다. 눈동자라는 말은 ‘작은 사랑’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주님의 눈동자에 비친 모든 건 사랑뿐입니다. 아니 사랑해야 할 대상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우리 인간의 눈처럼 차별과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날개 그늘에 거한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니 믿는 자는 낙관주의자의 유혹으로부터 단호한 현실 직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시인은 마지막에서 떳떳하게 주님의 얼굴을 뵙겠다고 합니다. 덧붙여 말하기를 주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기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런 믿음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했겠지요.(14절 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