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천국, 별락정(원미연)
지금은 그 마저도 듣기가 어려운 말이지만 다릿골 사람들은 이곳을 ‘비락쟁이’라고 불렀다.
시내에서 산을 하나 넘어와 버스가 서는 동네 입구엔 커다란 돌에 ‘다릿골’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입석이 있다. 그 다릿골에서 버스를 내려 아랫마을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면 여섯 호의 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 내가 살고 있는 ‘비락쟁이’다. 처음 들었을 땐 무슨 벼락이라도 잘 떨어지는 곳인가 하는 느낌이 드는 ‘비락쟁이’는 뜻밖에도 ‘별락정’의 사투리였다.
시댁이 있던 이 마을에 들어와 산 지 십오 년이 넘어간다. 이사 온 얼마 후, 집에 도착한 편지 겉봉 지번 옆에 써 있던 ‘별락정’이라는 글자를 보고 좀 의아했다. 사실 이 동네는 조그만 도랑 외엔 시냇물 한 줄기 흐르지 않고 어디 한 군데 시원하게 탁 트인 곳도 없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별락정’이라 이름 붙일 경치랄 것도 없는 작은 골짜기에 ‘별락정’이라니. 그 옛날 어느 선비가 작은 정자라도 하나 지어 근사한 이름을 붙인 것인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남편에게 물어봐도 아는 것이 없었고 동네 사람 누구도 신통한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이젠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나는 내가 살려고 들어온 곳이 ‘별락정’이란 것이 괜히 마음에 들었다.
십여 년 전 돌아가신 시아버님은 말이 없는 분이셨다. 결혼 후 시댁 마당 한 켠에 작은 흙집을 짓고 들어와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동안 그분과 나눈 대화가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미 풍이 들어 몸이 불편하셨던 아버님은 말없이 그림처럼 앉아 있거나 누워서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계셨다. 아들인 남편에게도 말을 건네는 걸 본 적이 없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겠다고 말씀드리자 딱 한마디 물으셨다 한다. “성씨가 뭐여?”
그는 지금은 행정수도가 들어서 상전벽해를 실감하게 하는 세종시 연기군에서 가난한 집안의 일곱 남매의 맏이이자 종손으로 태어났다. 옆 동네 살던 어린 처녀와 결혼을 하여 부모님과 동생들과 한 집에서 어렵게 살다 군대를 갔다. 어느 날 휴가를 나온 그는 쌓인 농사일과 굶고 있는 식구들을 놔두고 돌아갈 수가 없어 졸지에 탈영병이 되었다. 결국 밭에서 일을 하다가 그를 찾으러 온 헌병들에게 잡혀 가 한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집가지 않은 처녀들을 일본놈들이 잡아간다는 소문에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온 새댁은 함께 모시고 살던 시어머니와 번갈아 가며 배가 불러 슬하에 여덟 명의 자식을 두었다.
연기군을 떠나 그가 금강 건너 다릿골로 분가를 결심한 것은 이곳이 한씨 집성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을 사람 대부분이 종중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사는 곳이다. 그는 산밑에 있던 재실에 들어가 살면서 종중 소유 뒷산을 개간하여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늘 말이 없고 부지런하며 성실했던 그는 과수원을 키우고 마을에 싼 땅이 나오면 조금씩 논도 사들였다. 초가삼간이지만 재실 밑에 집도 지어 이사를 하고 외양간을 만들어 소도 키우며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자신이 키우던 소처럼 일만 하던 그가 쓰러진 것은 아들의 죽음을 본 이후였다. 늙어가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점점 키워 마을의 유지가 되어가던 둘째 아들이 어느 날 고개 넘어 개간한 밭에서 넘어오다 타고 있던 트랙터가 뒤집히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다른 자식들이 다 장성하여 집을 떠나고 아버지를 이어 농사를 짓고 싶어하던 아들이었다. 그 아들은 수확을 해도 보관이 어려운 복숭아나무를 베어 내고 한창 값이 좋은 배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키웠고 산 넘어 종중 땅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어 크게 농사를 짓던 중이었다. 트랙터 밑에 깔려 사체가 된 아들을 발견한 그는 술로 끼니를 삼고 더 말이 없어지더니 결국 풍으로 쓰러지게 되었다.
아버님이 쓰러지신 후 과수원은 애물단지가 되었다. 종중 소유의 땅이라 누구에게 팔 수도 없었고, 심어놓은 지 이십 여 년 된 배나무는 한창 좋은 열매들을 맺고 있는 틈실한 것들이어서 베어버리기도 아까웠다. 한 동안 각지에 흩어져 살던 자식들이 배 봉지를 싸는 봄과 수확하는 가을이면 주말마다 모여 배농사를 지었다. 그런 날이면 좁은 집 앞에 자동차가 그득하게 몰려들고 아이들의 쨍쨍한 목소리가 골짜기를 채웠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라고 그들도 나이를 먹어 시나브로 농사철이 되어도 발걸음이 뜸해지게 되면서 과수원 일은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는 남편의 차지가 되었다.
지금도 집 뒤로 양지바른 골짜기에 병풍처럼 배나무밭이 둘러싸고 있다. 봄날 하얗게 배꽃이 피면 잠시 이곳이 별락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그 옛날 연분홍 복숭아꽃이 골짜기를 뒤덮었을 땐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꽃이 피는 건 아주 잠깐이고 달고 시원한 노란 배를 얻기 위한 노동의 날은 길고 지난하다. 여덟 남매의 막내인 남편은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도와야 했던 자식들이 쉴 수 있는 날이 비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처마에 매달린 풍경을 바람이 흔들고 지나갈 때면 늙은 시어머니와 남편은 지금은 없어진 외양간 쪽을 바라보곤 한다.
오래 전 소와 함께 사라진 워낭 소리랑 닮았다는 풍경이 무심하게 바람에 흔들리는 저녁, 뒷산에서 내려온 이름 모를 꽃향기가 마당에 가득하다. 문득 지금 이 순간 이곳이 ‘별락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락정’은 어떤 건축물이나 장소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니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살다 간 누군가의 삶에도 ‘별락정’은 존재했겠구나 하는. 오랜 궁금증이 하나 풀렸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다 어느 순간 떠나간 사람들, 그리고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갈 나의 삶이 아련하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이 글은 <월간 풍경소리>에 실린 원미연 님의 글입니다.
첫댓글 마음이 참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나의 별락정은 어디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