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시와사람》 신인상 심사평
활달한 언어, 서사의 힘
심사위원의 손에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설정환의 작품들이었다.
이미 다른 관문을 통해 검증받기도 했지만 오랜 연마의 흔적이 선명하다.
우선 설정환의 작품은 언어가 활달하다. 이는 신인다운 패기가 넘친다는 뜻이다. 그의 작품은 압축하는 쪽보다 거침없이 내뿜는 서사의 힘으로 시를 이끌어가는 편이다.
「달밤」에서는 아내를 잃은 아버지의 심사를 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마을 사람들과 윷놀이를 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상처를 뻔히 들여다보면서 말없이 어울리는 마을 사람들의 관계에서 스스로 길을 가야 하는 존재의 심연을 잘 묘파하고 있다. 특히 윷놀이가 끝나고 달빛 아래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는 쓸쓸한 아버지의 발걸음과 독백이 단독자 인간의 슬픔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시킨 것에서 이 시인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돼지 잡는 날」은 돼지의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사색하게 한다. 특히 돼지가 해체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언어와 언어 사이, 또는 행간과 행간 사이에 숨겨놓은 비의가 이 작품의 의미를 풍요롭게 한다.
「內藏寺에 들다」 역시 존재의 의미를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다. 즉 서릿발 덮인 논바닥에서 정사를 뜨겁게 나누는 염소들의 행위와 “문 하나를 달아두지 않고서도/무궁천지를 감추고 있는/은밀한 밀어로 가득찬 내장사”의 부끄럼 없음과 가득참, 그리고 “그 속으로 감춰진 내 안의/기둥 하나를 一柱門 안으로 밀어 넣자/더운 김을 스멀스멀 피워 올리는” 뜨거움이 어우러지면서 작품이 복합적으로 내면의 충일함을 획득하고 있다.
그리고 「수평」과 「변기통에 빠진 볼펜」은 일상의 가벼운 사건을 분석과 사색을 통해 바로 서고 싶은 존재를 의미있게 설파하고 있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심사 : 《시와사람》 편집위원회
《시와사람》 신인상 당선작
달밤 外 4편
설 정 환
1.
매우리 떡집
마당에서는
동짓달 섣달 정월 이렇게 석달을
윷판이 벌어진다
모거나 뙤거나
잡거나 꼬불치거나
개도 좋고 걸도 좋고
늦었다거니 안 늦었다거니 했샀더니
물 방방하게 잡아 놓은 무논에
개구리 맹꽁이처럼 시글사끌했샀더니
손때 결은 윷짝을 놓지 못하는
아내를 잃은 아버지의 속내를
말 안 해도 이미 다 아는 매우리 사람들은
상관도 없다는 듯이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무작정 놀아주기만 하였다
아무도 함부로 만류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윷은 길을 내 가고
한 오백 년을 산 느티나무 가지가
달을 저울질해 앞산 솔숲으로 내려놓자
밤은 윷판으로 까맣게 기울어 쏟아진다
2.
윷판이 끝난 달밤
산 몸뚱이를 윷짝처럼
두 동강내어 사는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뿐인데
모든 길을 잃어버린
어린 산짐승 같아져서는
가장 먼 길을 돌아서
집에 닿지 않기 위해
혼자 걸어가고 있다
나 걸어가고 있다아,
걱정마라
돼지 잡는 날
돼지의 마지막 悲鳴은
눈 채인 마을에 길 하나를 열었다
살아서는 길이 되지 못한
돼지의 마지막 길, 그 길은
弔問행렬로 정적을 깨고 소란해졌다
드럼통 속에서는 장작불이 타고
죄지은 자들이 죄짓지 않은 자를 구원하듯
돼지 머리에는 뜨거운 물이 쏟아부어진다
세례가 끝난 돼지는
웃고 죽은 돼지라며 좋아들 하는데
이미 웃으며 죽을 수 있는 길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사람들이
주름 진 골을 따라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군침을 연신 삼킨다
털이 뽑힌 돼지는 풀 먹인 이불 홑청을 둘러쓴 듯 빛났다
누군가를 미워해 보지 못한 자의 빛깔은 정녕 이 같으리라
배를 가른다, 새끼들에게는 늘 기름진 영토였을 젖통이 갈라진다
갈비뼈를 두 토막을 내자 마지막에 몰아쉬었던 숨을 내뱉기라도 하듯
후, 하고 더운 김을 불어낸다 간이 배 밖으로 덜렁 쏟아진다
저리 붉은 꽃을 속으로 크게 키우고 있었구나
눈 위에 떨어지는 동백 꽃잎처럼
하얀 소금 위로 뜨거운 꽃잎이 한 점 한 점 낙화하는 사이
돼지의 영혼은 눈 쌓인 문밖으로 나가자고 붉은 길을 끌고 나간다
어슬렁어슬렁 눈치만 살피던 흰 개 한 마리가
그 길을 긴 혀로 착하다 착하다 따뜻하게 핥아 준다
內藏寺에 들다
내장사 가는 길 옆
서릿발 하얗게 덮인 논바닥에
밤에도 집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시커먼 염소 한 마리
저보다 몸집 큰 놈 위에 올라타서는
거친 숨을 허옇게 불어내고 있다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른다
제 안에 뜨거운 불길을
한 덩어리도 감추지 않는다
쑥대마저 말라비틀어진 물기 없는 들판에서
射精으로 치닫는 듯
불꽃으로 펼쳐지는 율동은
흰 요에 검은 먹물 흩뜨리는 듯
어지러운 자국으로 남아
논바닥에 박힌 화석이 된다
아무에게도 감추지 않는
부끄러움 없는 저들의 사랑이
찬 서리를 뜨겁게 이기고 있는 곳에
문 하나를 달아두지 않고서도
무궁천지를 감추고 있는
은밀한 밀어로 가득 찬 내장사가 있다
그 속으로 감춰진 내 안의
기둥 하나를 一柱門안으로 밀어 넣자
더운 김을 스멀스멀 피워 올리는데
愛眼을 흐트러뜨리는 房事를
감추자고 황급히 울어대는
風磬소리에 감춰 질 법한 환희인가
변기통에 빠진 볼펜
바지를 걷어올리다가 빠뜨렸지 싶은
볼펜 한 자루 변기통 속에 담겨 있다.
똥과 함께 따라내려 가지 못하고
물을 내릴 때마다 그곳에 남아
무엇인가 꼭 쓰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예 배설물 속에 들어가서
마치 현실을 똥의 수사와 의식으로
어느 시인보다도 더 구린내 나게 쓰기 위해서
스스로 뛰어 들어 버린 것은 아닐는지
음부에서 자신을 향해 배설하는 똥통에서
똥을 받아먹는다는 똥돼지처럼
똥으로 먹고사는 살진 돼지처럼 살자는 것인지
그는 쓸려나가지 않은 똥에 기대어서도
매일 똥에 관한 사색을 멈추지 않는다
변기통 속에서 끝까지 배설되지 않고
구린 곳에서도 매일 글을 쓰는 그는
똥만 봐도 똥주인의 삶을 알게 되고는
똥으로 사람의 속을 알게 되는 법을
똥과 사람의 경계에서 적고 있다
《시와사람》 신인상 당선자 인터뷰
소외되고 상처진 것들에게 보내는 연민
설정환|전북 순창 출생/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주 소 :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 호반리젠시빌5차 502동 501호
전 화 : 010-8205-5657
이메일 : jhsheal@paran.com
시와사람 : 참으로 반갑습니다. 우리 시단에 개성있는 시인 한 분을 맞게 되었습니다.
설정환 : 제가 한없이 미흡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와사람》에서 저를 예쁘게 봐주신 걸로 생각됩니다.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시와사람 : 선생님이 응모한 작품은 수십 편에 이릅니다. 작품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심사평에서도 거론되었지만 제 생각에는 선생님의 시는 마치 시나리오가 튼튼한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의 작품 속에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서사의 힘이 시를 이끌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설정환 : 솔직히 저는 저의 시에 대해 분석적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 즉 낮고 갖지 못한 자들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중심에서 먼 곳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시골 고향 마을 사람들의 남루한 삶과 도시의 변방 사람들이지요. 이들은 평범하게 살지만 권력이나 부를 가진 사람들처럼 무엇인가를 누리고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지요. 저는 그들의 앞길에 햇살이 비추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저의 시는 그들을 위한 연민이랄 수 있습니다.
시와사람 : 그렇군요.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시는 서정의 결이 애잔하지만 따스하고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시인의 마음이 시 속에 배어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렇듯 따스한 서정을 보여주는 서정시가 갈수록 외면당하고 있는 우리 시단에 선생님의 시가 서정시의 본령을 추구하는 시로써 활력을 넣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설정환 :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물기가 빠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촉촉함이랄까요. 저는 그런 시를 쓰고 싶습니다. 늦깎기로 등단하는 제가 아마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를 체험한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와사람 : 선생님의 시 한 경향을 살펴보면 세탁기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덜컹거려서 세탁을 할 수 없듯이 사람도 수평이 맞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지닌 시처럼 `인간다움' 또는 `중심잡힌 인간'을 추구하는 시편들이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 시가 되었습니까.
설정환 : 그것은 서정시를 왜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시만 잘 쓸 것이 아니라 제대로 균형잡힌 사람, 그래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와 시인이 함께 합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는 저의 실천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와사람 : 참으로 좋은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 같은 생각을 지녔으면 참 좋은 세상이 될텐데요. 그래서였군요. 앞에서도 잠깐 말씀을 나누었습니다만 선생님의 시는 우리 사회의 중심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참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는지요.
설정환 : 예, 중국집 배달원, 다방 아가씨, 노총각, 유모차 밀고 가는 늙은이, 실직자, 창녀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보통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길고양이, 방치된 차, 버려진 냉장고 등 도시의 구석에 소외된 것들을 통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즉 용도 폐기된 고물이나 쓰레기 취급 받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 모두가 함께 가야 하는 가족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졌을 때 세상은 더욱 환해지고 따뜻해질 것입니다.
시와사람 : 그런 선생님의 생각 속에는 `생명성'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응모한 작품들의 수준이 평범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특히 `생명성'을 노래한 시편들이 그렇습니다.
설정환 : 그렇게 봐주시니 부끄럽습니다. 그렇지요. 오늘날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 것 같습니다.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 생태계가 훼손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옵니다. 추위가 몰려간 뒤 쓰레기 통에 버려진 상사화 구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얼어죽었다고 생각하고 버린 것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그걸 집에다 갖다 놓았는데 푸른 싹을 틔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의 기쁨을 어떻게 말해야 될까요. 또 언젠가는 트럭 짐칸에서 핀 쇠비름 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흙이 아닌 트럭에서 자라는 쇠비름 꽃에서 강한 생명력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벌레들이 풀잎 갉는 소리가 참 듣기 좋습니다.
시와사람 : 「內藏寺에 들다」라는 작품에서는 원초적 생명력과 내적 생명력을 읽었습니다. 형이하학에서 형이상학을 발견한 것이겠지요, 시적 깊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시편에서 어머니보다도 아버지가 자주 등장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설정환 :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혼자 남은 아버지가 안쓰럽게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가까이서 모시지도 못하고 늘 불효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아버지는 내 생의 중심을 일으켜 주신 분입니다. 그것도 실천적인 모습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밭을 가는 아버지의 모습, 모 심는 아버지의 모습, 논두렁을 깎는 아버지의 모습 등 흔히 농촌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버지에게서 생을 반듯하게 이끌어가시는 자세를 읽곤 했습니다.
시와사람 : 선생님의 시는 도시 소시민의 모습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그늘까지도 움켜쥐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어두운 도시의 굴절된 모습을 카메라에 담듯 잘 담아내는 것 같습니다.
설정환 : 제가 도시에서 살고 있으니까 당연히 그런 모습들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겠지요. 병적인 공간으로 변신한 여관은 쾌락의 배설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델하우스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건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자본 문명에 찌든 인간의 모습들을 앞으로도 담아낼 생각입니다. 그것들이 아픈 우리의 현실이니까요.
시와사람 : 좋은 시인이 탄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