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에 가 보면 그 음식점에서 팔고 있는 음식이나 재료의 효능에 대해 길고도 자세하게 써 놓은 설명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문구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임금에게 바친 진상품이거나 임금과 관련된 일화들이 꼭 들어 있다. 몸에 좋다는 성분은 다 들어 있고, 먹기만 하면 원기가 왕성해질 것 같다. 그 증거는 우리의 옛 의서나 저명한 서양 학자의 연구에서 끌어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저기서 따온 것들을 조합하다 보니 대부분의 문장이 주어와 서술어가 호응이 되지 않는 비문이고, 맞춤법이 틀린 것도 부지기수다.
우리가 먹는 다양한 음식 중 ‘탕(湯)’의 대표 주자라 할 만한 설렁탕도 마찬가지다. 설렁탕 전문점의 벽면에 음식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빠지는 법이 없고, 그 내용은 당연히 임금과 관련이 있다. 음식의 이름을 역사와 관련짓고, 한자로 풀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선농탕’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풍년이 들기를 바라며 임금이 제를 올리던 제단이 선농단(先農壇)인데 제를 올린 후 소를 고기와 뼈째 고아 백성들과 함께 먹었다. 선농단에서 먹은 탕이니 ‘선농탕’인데 소리가 변해 ‘설렁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음식 이름을 최초로 붙인 이, 그리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이는 대개 찾기 어려우니 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유래담이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는 것이라면 그 다음은 말소리의 변화를 고려해서 그 진위를 파악해 볼 수도 있다. ‘선농탕’설은 말소리와 그 변화의 과정만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라면 상표 중에 앞에 ‘신(辛)’이나 ‘진’을 붙인 것이 있는데 이것을 각각 [실라면], [질라면]’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신나면], [진나면]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표기나 발음 모두에서 이러한 혼란이 나타나고 있으니 ‘선농’이 ‘설롱’으로 발음되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어’와 ‘오’는 아주 비슷한 소리여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설농’이 ‘설렁’이 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설농’은 본래 ‘ㄹㄴ’이 겹치는 것이니 발음은 당연히 ‘ㄹㄹ’로 되고 그에 따라 표기마저 바뀌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설은 ‘눈처럼 진한’이란 다소 억지스런 한자어를 끌어들여야 하는 것이 문제다. ‘슐루’나 ‘실러’를 기원으로 하자면 설렁탕이 외국의 음식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슐루’나 ‘실러’가 ‘설렁’으로 바뀌는 것까지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적어도 말소리의 변화만 따져 보면 쉽게 설명되지 않는 변화라 할 수 있다.
설렁탕집에 가서 조금 비싼 것을 먹고자 하면 설렁탕보다 몇 줄 아래를 보면 된다. 어김없이 ‘도가니탕’을 발견하게 된다. 밥상머리, 아니 식탁 머리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반가워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도가니탕은 곰탕의 한 종류이되 소의 연골을 둘러싸고 있는 살인 도가니를 주재료로 하는 탕이다. 약간 투명한 빛을 띠며 씹는 맛은 찐득하다. 소 한 마리를 잡아 봐야 그리 많이 나오지도 않으니 값이 꽤나 비싸다. 본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소의 모든 부위를 맛있게 먹고자 만들어 낸 요리일 텐데 이것이 오늘날 혼란을 자아낸다.
‘도가니’는 쇠붙이를 녹이는 그릇을 뜻하기도 한다. 높은 온도에서도 타거나 녹지 않으며 안의 금속 내용물만 녹을 수 있도록 만든 그릇이다. 여기에서 의미가 확대되어 흥분이나 감격으로 들끓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주로 ‘흥분의 도가니’란 관용구로 쓰인다. 그런데 도가니를 실제로 본 이들이 드물다. 주물 공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일상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 도가니다. 공지영 작가의 소설 <도가니> 덕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만 앞으로 쓰임은 더 위축될 것으로 보이는 단어다.
그런데 엉뚱한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렁탕집에 갔더니 펄펄 끓는 음식을 가져다준다. 몇 술을 뜰 때까지도 여전히 끓는다. 그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도가니탕’이라고 한다.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흥분의 도가니탕’이라고……. 장난으로 시작된 이 말이 어느 날 신문 기사의 제목으로 버젓이 등장하게 된다. 쇠를 녹이는 도가니는 모르지만 펄펄 끓는 도가니탕을 아는 이들은 그 말이 맞는 것으로 착각한다. 먼 훗날 ‘흥분의 도가니’가 ‘흥분의 도가니탕’으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말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말을 잘못 분석해 일어나지 말아야 할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흥분의 도가니’가 ‘흥분의 도가니탕’으로 바뀐다면 이는 낯이 뜨거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해 우리말의 표현력을 늘려 나가는 변화라면 환영할 일이지만 이것은 그저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더욱이 ‘말과 글로 먹고사는’ 기자가 이러한 실수를 범한다면 기자로서의 근본적인 자질이 의심스럽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현진건, <운수 좋은 날>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먹어 둬라.”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설렁탕은 썰렁한 탕인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를 읽은 이는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병든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사왔건만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을 발견한 남편을 그려본 이, 설렁탕 국물이라도 더 먹이려고 소금을 많이 넣어 짜다고 국물을 더 받아 아들에게 부어 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본 이는 그렇게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렁탕의 뽀얀 국물을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가를 아는 이는 설렁탕을 ‘썰렁한 탕’이라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말의 그릇된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아는 이라면 ‘흥분의 도가니탕’이란 썰렁한 농담도 함부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글_한성우(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 글은 필자가 2016년에 펴낸 ≪우리 음식의 언어≫(어크로스)에서 일부를 추려 내어 다시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