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계속되면서 입맛이 없다. 고온다습하다보니 불쾌지수가 높아지고, 매일 반복되는 농사일로 몸도 지쳐간다. 아침에 물리치료를 받고 농장에 가자했더니 아내는 하루를 쉬었으면 한다. 한라봉 열매 매다는 일도 마무리가 되어가고, 평상시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만사가 형통하다는 것을 터득한 지 오래다.
진료실에서 치료를 받는데,
“오늘이 음력으로 며칠이 꽈.”하며 말을 걸어온다.
“무사?”
“입맛도 없고 해언 바당에 겡이 잡으래나 가시민 좋을 것 닮안.” 핸드폰으로 물때를 보니 아홉 물이다.
“물때는 좋은 게.” 그러고 보니 그렇게 자주 가던 바다에 다녀온 지가 까마득하다. “에에~ 바당에 갔당 오민 딱 지청 원” 하면서도 은근히 구미가 당긴다.
점심 식사를 하기 전에 우영팟으로 갔다. 겡이를 잡으려면 조금이라도 요기를 하고 가야하지 돌멩이들을 들어내야 하니 바릇잡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 농약을 치지 않고 자란 콩잎 깻잎 상추 고추를 따고 와서 마늘을 넣고 갈치젓갈에 쌈을 싸서 막걸리 한잔 곁들이니 식욕이 당긴다. 농사일은 힘이 들지만, 이런 맛에 그 끈을 놓지 못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둘이서만 바다에 가는 것도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올해 퇴직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같이 가겠다며 좋아한다. 바다에 가보니 아직은 파도가 높고 물이 덜 빠져서 아무도 없는데, 마침 해녀 한사람이 파도 따라 떠내려 온 해초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겡이 잡으러 왔는데, 어디로 가야 잡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소상히 알려준다. 해녀가 알려준 장소는 소싯적에 아버지와 함께 다니던 바다였다.
장마 때 비오는 날이면 부모님을 따라 바다에 다녔던 기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지게에 촐구덕과 호미 연장들을 넣고 바다로 간다. 50년쯤 전 일이니 그 당시 나는 재미로 따라다닌 것이 고작이었다. 아버지는 지렛대로 돌을 들어 올리면 어머니는 그 속에 해초사이로 고메기 소라 성게 전복을 잡았다. 집에 올 때는 미역까지 해서 잔뜩 한 짐을 지고 와서 노란 성게 알을 손가락으로 파서 먹으면 입술은 벌겋게 물들어졌다. 지금은 백화현상으로 해초도 없고, 소라 전복도 꿈같은 이야기이다.
유년시절에 부모님을 따라 다니며 보아 두었던 방식으로 마음속으로 원을 둥글게 그려 놓고, 밑바닥이 나올 때까지 원둘레의 돌을 들어낸다. 큼직큼직한 돌을 들어내자 겡이들은 구멍으로 숨노라고 야단법석이다. 아내는 옆에서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는 놈은 놔두고 밖으로 도망가는 겡이만 잡는다. 가운데로만 모여든 겡이가 나중에는 한 사발씩 뭉크러져 있다. 두 시간쯤 잡았을까 양동이로 거의 하나를 잡았다. 아내는 겡이는 그만 잡고, 고메기를 잡자고 한다. 물이 많이 빠져서 고메기도 있을 것 같으나, 파도가 일렁이는 곳으로 가야하니 별로 내키지 않았다. 혼자 한참을 내려가더니 고메기가 있다며 오라는 손짓을 한다. 친구에게도 가자했으나 대답도 하지 않고 부지런히 겡이만 잡는다. 아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고메기가 예상외로 많아서 두어 됫박은 잡았다. 어느 새 밀물이 밀려오기 시작하니 서둘러 밖으로 나와야 했다. 친구도 겡이를 많이 잡았다며 흐뭇해한다.
금융기관에 지점장으로 근무를 하다가 정년퇴임 하고, 모처럼 바릇잡이를 와서 감회가 새로웠던지 자기가 잡은 겡이를 자꾸 쳐다본다. 고메기를 잡으러 왜 내려오지 않고 겡이만 잡았느냐고 하자, 어떻게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느냐 한다. 30년 이상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외골수라 나하고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있을 때는 두 마리가 아니라 다섯 마리 토끼라도 잡아야 하고, 없으면 한 마리도 못 잡는 것이 현실이지 않는가?
옛날에는 겡이를 절구통에 넣고 빻아서 그 물로 죽을 쑤었으나 요즘은 믹서로 갈아서 체로 걸러내어 그 물로 죽을 쑨다고 한다. 고메기를 삶아서 바늘로 여물을 열다가 문득 돌아가신 양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일본에서 사셨는데 고향에 왔다가 고메기를 잡아다 놓고, 농장에 가버리면 하루 종일 여물을 열어서 대접으로 하나 가득 장만해 둔다. 저녁에 고메기국을 끓여서 자식들이 농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어머니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런 저런 상념으로 여물을 열고 있는데,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던가. 아내도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살아생전의 어머니와 고메기 이야기를 들추어낸다.
무릎관절이나 뼈가 아프다면 할머니는“바당에 강 겡이 잡아 당 죽 쑤웡 먹그라” 한다. 겡이는 키토산이 많이 들어 있어서 골다공증이나 식욕이 없고, 기력이 쇠약한 사람들의 뼈가 튼튼해져 아픈 곳이 없어지고 몸을 가볍게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겡이죽은 신토불이 음식으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중섭 화백도 서귀포에서 살면서 겡이를 많이 잡았는지 겡이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있다. 가끔은 ‘자굴이 해안가’를 걸으며 이 화백이 겡이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구를 보며 그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밤은 깊어 가는데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는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아버지를 따라 다녔던 그 바다에서 겡이와 고메기를 내가 잡고 있다. 그 바다는 언제나 그대로인데 그 때의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고…, 돌이켜 보면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잠깐 머물다가 구름처럼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던가. 앞으로 50년 후에 겡이는 누가 잡고 ‘갱이죽 이야기’는 누가 할 것인지.
※겡이(깅이): 게의 제주도 방언. 갔당오민 딱 지청: 갔다 오면 너무 피곤해서
고메기: 고동 우영팟: 텃밭 바당에 강 : 바다에 가서
바릇잡이: 조개잡이 촐구덕: 대바구니 가시민 :갔으면
무사: 왜 닮안: 같아서 좋은 게: 좋은 데
첫댓글 어릴 적 생각이나서 미소를 지으며 읽었습니다. 해녀인 어머니는 우리가 바다에 가는 것을 싫어 하셨지요. 아직도 우리가 바다에서 무얼 잡는다는 것이 영 못 믿어우신 모양입니다. 이젠 바다도 메말라가고........
아~~~~먹고 싶다. 겡이 죽. 어렸을 때 생각이 마구마구 납니다. 내일은 동문 시장으로 겡이나 잡으러(사러) 가야겠습니다.
고메기는 보말? 겡이를 우린 '긍이'라고 하는데...ㅎ .어제 친정어머니 긍이젓 가져왔습니다. 볶은 콩 넣고 간장 다려 부은 것.... 드셔본 적 있나요.
아이고!!!!! 죽것네.... 긍이죽 보단 겡이죽이 훠~~~ㄹ씬 낫다. 근데 제주시 표준어는 '깅이죽'임.
유년시절, 아니 초등교시절만 해도, 유일한 즐거움이 있었다면, 여름에 아버님이 화북 곤흘바다에 보말잡고 해수욕하러 데리고 갈때가 그렇게 좋았었는데요...그 시절이 마냥그립네요...
깅이 잡으러 가난지도 10년이 넘었네요. 간이는 일본어로 겡이, 전부가 그거그거 같아요. 같은 語족인 모양입니다. 이젠 다리도 아파오고 깅이죽 생각도 나누만여. 수필이 마치 겡이죽 마냥 구수하기도 하고. 잘 읽고 갑니다
雲浪泉 은 염돈에 샘 이름인디 염돈어른 아니답고,.... 재미지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