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에 얽힌 설화들
득성사실과 시조유래에 관한 신화·전설·민담 등 설화는 상고시대의 건국신화 외에도 각 가문의 가첩·족보 등에서나 구전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건국신화 겸 시조설화로는 혁거세(赫居世), 탈해(脫解), 알지(閼智), 수로왕, 제주의 3성시조설화가 있다.
신라의 박·석·김씨 시조 신화를 대비하여 볼 때, 각 신화가 가지는 화소(motif)가 공통되는 면도 보이고 있으나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점을 보인다. 그것은 제의론적(祭儀論的) 측면에서도 각 족단이 소유한 신앙대상과 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 신화의 화소를 비교해 보자.
동일 화소
① 태어나자 부모로부터 유기받음,
② 유기 후 짐승들로부터 보호를 받거나 도움을 받음,
③ 사람에게 구출되어 양육됨,
④ 모두 신화와 관련되는 성을 가짐
이질화소
① 난생(卵生), 왕자로 태어남
② 꿰짝 속에 들어 있음
③ 표류되어 왔음
④ 특이한 여자와 결혼
⑤ 죽은 뒤에 신이 됨
이들 신화는 그 자체로서는 허구이지만, 우리의 상고사체계를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를테면, 부족의 이동이나 형성,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 원시민간신앙 등을 아울러 반영하고 있다.
이들 시조설화는 대개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난생설화를 가진 혁거세·탈해·수로왕의 경우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강족으로 되어 있는데 대하여, 알영이나 허황후 또는 제주 삼을나의 배필이 된 처녀들은 바다를 건너왔거나 아니면 우물과 관련지어서 지신족임을 나타내고 있다.
상자 속에 담겨 표류하다가 노파에 의하여 건져지고 키워진 탈해 전승은 후세의 시조설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파평윤씨·강화봉씨의 시조와 남평문씨의 시조는 각기 연못에서 석함에 담겨진 상태로 노파에 의하여 발견되거나 바다 위에서 발견된다. 이들의 탄생에는 대개 구름과 안개 또는 천둥과 번개가 개입되어 더욱 신이한 것으로 수식되었다.
또 황간견씨의 시조 견훤(甄萱)은 여인과 지렁이와의 교배에 의하여 태어나고 호랑이에 의하여 길러진다. 이런 이물교혼담(異物交婚譚)은 우리 민담에 널리 퍼져 있다.
특히, 신라의 시조설화는 민간신앙과도 결부되어 지금도 영남지방에는 ‘골맥이’라는 동신제가 전승되고 있다. 여기에는 성씨가 붙어서‘골맥이김씨할배’· ‘골맥이이씨할매’ 등으로 불리는데, 이때의 김씨할배는 그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시조신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후삼국시대의 인물인 신숭겸(申崇謙)·김홍술(金洪術)·김인훈 (金忍訓)·손긍훈(孫兢訓)·박영규(朴英規) 등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각기 출신지인 곡성·의성·양산·밀양·순천의 성황신(城隍神)으로 기재된 것이 그 예이다.
또 남부지방에는 이른바 ‘조상단지’나 ‘삼신바가지’라는 단지에 쌀·보리 등을 넣어 방안 시렁 위에 모시는 풍습이 있는데, 이 쌀알은 조상의 혼령을 상징한다. 알지 신화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는 금궤는 바로 이 조상단지의 신화적 반영이며, 계림(鷄林)은 곧 ‘골맥이제당’이었다.
고대에 등장하는 족장들은, 신라에서 출자한 3성과 6성의 시조와 같이, 모두 천강설화(天降說話)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전승은 고려·조선시대까지로 면면히 이어져 현존하는 대성들의 시조 또는 원조로서 숭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철마다 제향이 베풀어지고 있다.
또한, 이천서씨의 시조 신일(神逸)이 사냥꾼으로부터 사슴을 구하고, 문화유씨의 유효금(柳孝金)이 범의 목구멍에 걸린 여자의 은비녀를 뽑아 줌으로써 각각 신령이 꿈에 나타나 보은을 약속한 데서 그 자손들은 음덕을 받아 대대로 현달하였다는 설화는 후삼국시대 이래 고려·조선의 성씨 관계 자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시조 또는 조상의 비상한 은공과 효성에 감복한 신령(산신령과 같음)이 그의 자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음덕을 입게 하였다는 것이다.
혁거세 설화 (《삼국사기》)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6촌(斯盧六村)의 촌장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서 임금을 모시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고, 백마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가보니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하늘로 날아가고,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이다. 알의 크기가 박〔瓠〕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고, 그 광채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弗矩內)라고 하였다. 고허촌(高墟村) 촌장인 소벌공(蘇伐公, 혹은 蘇伐都利)이 데리고 가 길렀다. 그리고 6촌의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존경하였고, 나이 13세가 되어 이들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고, 나라이름을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서기전 53년에 알영(閼英)을 비로 맞아들였다.
탈해 설화 (《삼국사기》)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卵〕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를 거쳐 계림(鷄林) 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이때 한 노파에 의하여 건져지고 길러졌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로써 생업을 하며 양모(養母)를 공양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冶匠〕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김알지 설화 (《삼국사기》)
탈해왕 9년(서기 65)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알지(閼智)라 이름하였다. 또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라 하였으며, 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이름으로 삼았다.
수로왕 설화(《삼국유사》)
아직 나라가 없던 시절인 서기 42년 3월에 구지봉 북쪽에서 이상한 소리로 부름이 있었다. 무리 200-300명이 거기에 모이니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한데 그 형상은 숨기고 소리만 내어, “여기에 누가 있느냐?” 하니 구간(九干) 등이 “우리가 있소”라고 대답하였다. 또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라고 물으매, “구지요”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다시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워 임금이 되라 하여 내려왔으므로, 너희는 모름지기 산 정상을 파 흙을 모으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 고 노래하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매우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인 사람들이 그 말대로 행하자, 얼마 후 자주색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그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합자(金合子)가 싸여 있었다. 열어보니 그 속에는 해와 같이 둥근 황금빛 알 여섯이 있어 모든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며 함께 수없이 절을 한 다음,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그것을 가져와 평상에 두고 흩어졌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모여 금합자를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차례로 남아로 변했는데, 용모가 매우 준수하였다. 그 중 제일 먼저 변한 아이를 수로(首露)라 하고, 가락국의 왕으로 모셨다. 나머지 다섯 남아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제주의 3성 시조설화(《고려사》)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이 한라산 북녘 기슭의 모흥혈(毛興穴)에서 솟아났다.맏이를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하였다. 세 신인은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사는데, 하루는 자줏빛 흙으로 봉하여진 나무함이 동쪽 바닷가에 떠밀려 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그 안에는 돌함과 사자(使者)가 있었다. 돌함을 열어보니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와 송아지 망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인데 우리 임금이 세 딸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쪽 바다에 있는 산에 신자(神子) 셋이 탄강(誕降)하고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며 신에게 명하시어 세 따님을 모시도록 하여 왔사오니 마땅히 배필을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 라고 하고 사자는 구름을 타고 떠났다. 세 사람은 나이 차례에 따라 장가들고, 물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아가 활을 쏘아 거처할 땅을 정하였는데, 양을나가 거처한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거처한 곳을 제이도라 하였으며, 부을나가 거처한 곳을 제삼도라 하였다. 그런 다음 비로소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소와 말을 기르니 날로 살림이 풍요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