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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속으론 어땠는지 모르지만
살짝 컨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르뽀를 덥썩 집은 인디안에게
괜찮다고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내 개인적이 의견을 말하자면 르뽀의 생명은 생동감 같아.
사실적인 기사문 작성을 하느라고 그동안 감정을 배제한 기사 쓰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런데 이제는 감정 살려서 쓰라는 르뽀~~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답니다.
백곰 이풍민이 쓴 교동도 르뽀
섬마을조사단 문경숙님의 답사기
섬연구모임의 박경숙님의 답사기
는 모두 교동도가 배경
이풍민
교동도의 오랜세월동안 견뎌온 문화재들의 대부분이 관리가 미흡하다. 주민들은 문화재관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눈치다. 교동도는 삼국시대부터 교동으로 불려왔다. 또한 조선대에는 수군절도부가 옮겨와 수도수비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섬 자체가 커 주민도 많이살았지만 6ㆍ25때의 실향민들이 들어와 살면서 인구도 급격히 증가했다. 초기에는 문화재에 대한 무지와 생계유지를 위해서라지만 현재는 알면서도 방치를 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허전한 문묘향교, 교동향교.
5월 17일 기자단은 첫 취재로 교동도의 교동향교를 찾았다. 홍살문을 지나 마주한 교동향교는 아담하다는 표현이 들어맞을만큼 소규모였다. 그러나 문화재관리를 목적으로 모든 건물들의 문을 걸어 잠근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게다가 향교의 모습으로는 체계적인 관리를 받지 못한 듯 황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교동향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자의 초상을 모신 곳이다 우리나라 향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성과 달리 현재 향교의 모습은 그것과 거리가 멀게 느껴질 뿐이다 신문성(71) 교동문화재관리원에게 교동향교에 대한 정보와 약력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은 고려 충렬왕대의 유학자 안향이 공자의 초상화를 화개산 북쪽에 봉안한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조선 영조대에 이르러 정식적으로 교동향교에 이전ㆍ봉안하였다. 신문성씨는 교동을 시작으로 전국 234개의 향교에서 공자를 모시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잊혀져버린 은혜, 영세불망비.
공허한 마음을 뒤로한채 교동향교를 나와 인근에서 읍내리 비석군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에는 교동도에 선정을 펼친 도호부사,삼도수군통어사, 방어사들에 대한 영세불망비 40여 기가 다닥다닥 모여있다.영세불망비란 '영원히 잊지 않겠다.'의 의미로써 선정을 베푼 지도자에 대한 백성들의 감사함이 담긴 비석이라 할 수 있다. 교동도 관내에 흩어져있는 비석들을 모아놓고 현재 강화군과 교동유림이 관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묘지인 줄 알았다. 그 옆에 있는 표지판을 보고 나서야 알게되었다. 단지 관리상 편의를 위해 교동 전역에 흩어져있던 비석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모습에 당황스러움을 감출수 없었다.관리상 편의를 위해 모아놓았지만 정작 관리는 커녕 비석들은 울타리 속에 방치된 모습이다.길가에 울타리로만 둘러싸여있어 관심을 모으지 못할 우려가 생긴다. 차를 타고다니면 무심코 지나갈수 있는 이 비석들을 좀 더 관리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이를 배경으로 교동도의 역사를 자세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고 조선 관리들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한양으로의 문지기, 남산포 삼도수군통어영지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 겨우 남산포에 도착했다. 교동향교에서 남서쪽으로 1km거리에 위치해 있는 남산포엔 조선 인조대에 설치된 삼도수군통여영지가 있다. 이곳에 한성 방어를 위해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을 옮겨왔다. 이후 인조 11년 삼도수군통어영을 남산포 서쪽해안에 설치했다. 이는 강화도와 더불어 군사적요충지로 여겨졌다는 의미이다. 인근에 당시 배를 정박시킬 때 묶어놓던 돌인 계류석 1기가 현존한다. 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쓰레기더미에 있는 계류석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비석군에서 느꼈던 부분을 이곳에서 다시한번 곱씹게 만들었다.
이제는 역사의 페이지속의 유물, 동진나루.
반대쪽에는 동진나루가 있다. 4시에 도착한 동진나루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있었다. 햇빛은 뜨거웠지만 바람으로 덥지는 않은 기분좋은 날씨였다. 동진나루는 한적했다. 동진나루는 정확히 언제라고 말할 수 없으나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내륙과 이어주는 문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또한 교동도는 조선시대에 세곡을 수송하던 조운선, 물자를 이동시키는 수송선들의 중간기착지였다. 그로 인해 동진나루에는 무수한 배들이 이용하던 항구였다. 인근 주민은 6ㆍ25사변 이후로는 월선포선착장을 이용하고 동진나루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갯벌위에 남아있는 나룻터는 다소 흉물스럽게 보인다. 방치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지 대책이 필요하다.
공허한 흔적, 교동읍성
숙소로 오는길에 교동읍성을 들렀다. 읍성은 군사적 요충지나 경제중심구역에 축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높이 6m, 둘레 480m인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 경기수영이 옮겨질 당시에 축성됐다. 높이로 봐서는 다소 군사적요소가 강하며 좁은 성 안에는 중인이나 양반계층이 살았을거라 추측된다. 동문,북문,남문이 있으며 현재는 남문만 존재한다. 동문과 북문은 소실시기가 언제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남문은 1921년 폭풍우로 무너졌다고 알려졌으며 현재는 홍예문이라 불리는 아치형 석축만이 존재한다.벽에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하게 자라있어 세월의 흐름을 보여준다.하지만 성의 뼈대만 남아있어 허전하게 보인다.같은 읍성인 해미읍성을 떠올리게 했다. 해미읍성은 현재 복원이 잘 되있어 천주교 순교순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또한 지속적인 관리로 관광지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교동읍성도 복원작업을 거치면 어떨까란 생각을 했다. 또한 관리도 제대로 되있지 않아 흉물스러운 잔재로 보인다. 교동도의 문화재들을 돌아보며 실제로 대부분의 문화재들은 보존되지 못하고 있었다. 국가차원에서의 교동도 문화재관리와 보존의 필요성이 시급하다.
교동도 답사기
한반도의 역사를 품은 작지만 큰 섬, 교동도!
박경화 / 작가, 인천섬연구모임 회원
“이 섬이 왜 중요한 곳이냐 하면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죠.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만나는 곳이고, 이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할 수 있고,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군사적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지요.” 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렇지! 지금도 비무장지대가 되어 긴장감이 감도는 곳이지.’여행을 출발하기 전, 지도를 살펴보았다. 강화도 옆에 달린 섬이고, 서해의 섬들이 그렇듯 갯벌이 있거나 철새들의 보금자리쯤 되지 않을까? 이렇게 지레짐작했다. 막상 섬에 발 디디며 해설을 듣고 보니 둔탁한 뭔가가 머리를 쳤다. 그 뿐이 아니다. 이곳에는 강에서 흘러드는 퇴적물이 쌓여 땅이 무척 비옥하고, 이 땅에서 나는 쌀은 지역 사람들의 자부심이 되었다. 서해 바다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관문의 역할을 하고, 분단이 되어 지금은 왕래를 할 순 없지만 북쪽 황해도가 건너다보이고, 동쪽으로는 강화도 북부를 지나 한강 하류와 만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이다. 우리가 그 존재가치를 잠시 잊고 살았던 섬, 이곳은 바로 교동도다. 도시 사람들에게 섬 여행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일상과는 다른 풍경을 느끼고 싶을 때 잠시 다녀오는 일상탈출이다. 짭짤하고 알싸한 바닷바람을 만끽하는 정도면 충분히 만족한다. 거기다가 입맛 돋우는 지역 특산음식이라도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지면 환호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그런데 정작 이 땅에 대한 이해, 섬 본래의 모습을 찬찬히 돌아본 적이 있었던가? 갸웃갸웃해진다.
섬에는 파도와 비바람을 견디며 물질을 해온 어부와 결코 녹록치 않은 땅을 일구어온 억척스런 농부들이 있다. 그저 여기가 전국 최고이자 지상낙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들의 순박한 역사가 있고, 척박한 환경을 낮은 자세로 견뎌온 독특한 동식물이 있고, 한결같이 불어오는 알싸한 바람도 있다. 이렇게 섬의 다양한 얼굴을 찾아보고 그 가치를 생각하는 ‘인천섬연구모임’이 결성되었다. 2012년 9월에 창립할 무렵 모임의 가칭은 ‘인천도서연구모임’이었다. 이 이름을 들은 몇몇 사람들은 “도서? 책 연구모임인가?” 그랬다. 책이 아니라 바로 인천앞바다에 있는 섬을 연구하는 모임이다. 인천앞바다, 가까운 거리지만 마음의 거리가 멀었던 것일까? 제주도나 울릉도, 남해안의 이름난 섬들은 부지런히 다녔지만 인천앞바다에 있는 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곳에는 무려 155개나 되는 섬이 있고, 사람이 사는 유인도도 41개나 된다. 섬마다 알콩달콩 살아온 이야기가 있고 한반도의 역사가 있고 보전가치가 있는 자연생태계도 품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찬찬히 찾아보려고 한다. 인천섬연구모임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한반도의 역사를 품은 섬 교동도다.
아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문화재“문화재같기는 한데 저 집의 대문인가?”구불구불 골목길을 돌아서자 눈앞에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이 등장했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봐도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뭔가가 허전하고 이상하다. 성이라고 하기엔 나지막하고, 아치형 홍예문 안에는 민가가 들어앉아 있다. 가까이 다가가 안내판을 보니 교동읍성의 남문이란다. 1629년 조선 인조 때 교동읍성을 축성했을 당시에는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석축 위에 유량루라는 멋진 누각이 있었는데, 1921년 폭풍우 때 목조 건물은 무너지고 홍예문만 남은 것이다. 그 뒤 읍성 안쪽 자리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홀로 남아 있는 홍예문은 마치 민가의 대문처럼 보이게 되었다.교동도에는 예부터 왜구들이 눌러 살다시피 할 정도로 침입이 잦았다. 그래서 인조 임금 시절에 교동도와 강화도를 강화하기 위해 교동읍성을 쌓고, 읍성 안에는 주요기관들이 들어앉았다. 관아와 객사를 비롯한 내아, 외아 같은 관청건물과 안해루, 상문루 같은 건물이 자리잡았다. 그러나 무심한 세월과 함께 이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민가가 들어서고 일부는 텃밭으로 일구어졌다. 이번 답사의 해설을 해 주신 교동교회 구본선 목사님이 골목길을 걷다가 갑자기 2층 양옥집 뒤편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셨다. “목사님이 어딜 가시나?” 졸졸 뒤따라가 보니, 눈이 녹아 질척이는 텃밭에 누렇게 마른 풀들만 어지럽다. 아니, 여기는 왜 오셨지? 가만 보니 밭둑에 뭔가가 있다. 바로 안해루를 떠받들었던 석축 2개가 밭두렁에 덜렁 서 있다. 양옥집 뒤편에 숨어 있어서 아는 사람들만 찾을 수 있는 자리에 문화재가 있었다. 본래 석축은 4개가 남아 있었는데, 나머지 2개는 교동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옮겨져서 뜬금없는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다. 문화재 가치를 잘 몰랐던 사람들이 다른 용도로 쓰려고 위치를 옮기고 돌 표면도 깎아서 크기도 작아졌다고 한다. 몰랐으니 그럴 수 밖에…, 그래도 우리 문화재의 현실 앞에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석축이 서 있는 교동부지 옆 텃밭에는 연산군 적거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작은 비석이 남아 있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뒤 이 곳 교동도로 유배를 와서 초옥에서 살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한다. 철종 임금도 자신이 왕족이라는 신분을 모른 채 나무꾼으로 살았던 ‘강화도령’ 시절에 교동도에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관방의 요충지이자, 중요한 중간기착지교동읍성
안에는 강화나들길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교동도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도보여행을 하기에 딱 좋은 길이다. 안내판을 지나 따뜻한 햇볕을 따라 걸으니 동진포에 이르렀다. 한때 이 포구에는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면서 번성했고, 지금의 교동도 선착장이 생기기 전에는 이곳에서 강화도와 육지로 연결하는 배가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당시에 배를 정박시키고 사람들이 오르내렸던 동진포의 석축은 예전 모습 그대로 잘 남아 있다. 바닷가 마을마다 배가 정박하는 부두를 콘크리트로 반듯하게 만들지만 예전에는 돌을 견고하게 쌓아 만들었다. 부두의 옛 원형을 바로 동진포에서 만날 수 있다. 동진포가 섬 사람들이 이용하던 부두라면 건너다보이는 남산포는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던 포구다. 바로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어영의 선창으로 활용했던 나루터이다. 교동도는 관방의 요충지였다. 요즘에는 나라를 지키는 것을 국방이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관방(關防)이라고 했다. 여기서 관(關)이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넘어가야 하는 곳을 뜻한다. 고려시대의 교동도는 중국과 무역을 할 때 중요한 기점이자, 삼남지방에서 쌀을 싣고 개성으로 가던 조운선과 수송선이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중간기착지였다. 왜구들이 판단하기에 교동도는 황해도 연안과 개경 주변을 약탈하기에 딱 좋은 중간기지였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에는 왜구들의 선박 213척이 교동에 정박했으며, 우왕 2년(1376년)에는 왜구의 침입을 피해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등 피해가 극심했다. 이런 피해를 줄이고 관방체계를 잘 구축하기 위해 고려 조정에서는 수군을 양성하여 교동과 인근 연안을 방어했고, 조선 태조 때는 육군과 수군을 겸하는 절제사를 파견했고, 이후에도 교동에 주둔하는 수군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의 하나로, 그 시절 남산포에는 경기수군의 배들이 수없이 드나들고 정박했을 것이다. 이 배들을 묶어두었던 계류석은 세월따라 모두 사라지고 이제 단 하나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계류석은 어느 집 담벼락에 버려진 듯 홀로 서 있다. 이곳이 본래 자리인지, 누군가 옮겨온 것인지도 분명치가 않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만 눈여겨 볼 뿐, 귀한 문화재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곳에 쓸쓸히 서 있다.그 외에도 교동도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알려주는 곳이 있다. 중국 양반과 조선 양반을 함께 모시는 교동향교가 있고, 향교 입구에는 섬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던 다양한 종류의 비석을 한 자리에 모은 비석군도 빠뜨리지 않고 둘러보면 좋겠다.
화개산성, 관미성일까?
교동도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바로 화개산을 둘러싸고 있는 화개산성이다. 화개산성은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화개산(259.5m) 위에 내․외성으로 축조된 산성인데, 총길이 2,168m에 이르는 포곡식 산성이다. 포곡식 산성이란 성 안에 계곡을 포함하고 있는 산성을 말하는데, 계곡이 있어서 물이 풍부하고 활동공간이 넓으며 외부 노출을 막기에도 좋다. 화개산 능선에는 봉수대도 있다. 이번 교동도 답사에는 ‘교동 관방체제의 역사’라는 주제로 도시인문학세미나를 함께 열었다. 인천발전연구원과 인천도시인문학센터, 인천섬연구모임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이번 세미나의 토론쟁점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관미성(關彌城)이 바로 화개산성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관미성에 관한 내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392년 7월에 광개토대왕이 남으로 백제를 쳐서 10개의 성을 함락하였다. 10월에는 백제의 관미성을 공함하였는데,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길이 끊어진데다 성 외곽에는 바닷물이 둘러쌓여 있는데, 왕이 군사를 일곱 갈래로 나누어 협공하게 함으로써 20일만에야 함락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파주의 오두산성, 강화도 봉천산, 예성강 하구를 관미성이라고 추정하면서 의견이 분분한데, ‘사면이 깎아 내린 듯 가파르고 길이 끊어진데다 해수로 둘러쌓여 있다’고 기록한 글을 보아 화개산성이 가장 유력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곳이 관미성이 맞다면 화개산성의 역사는 고구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화개산성은 산 능선 일부에만 흔적이 남아 있다. 교동도는 고려시대부터 시작한 간척사업으로 인근의 작은 섬을 연결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60, 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는 논을 경지정리하면서 화개산성의 돌을 옮겨 논바닥에 깔고, 돌을 잘게 부수어 도로를 닦을 때 쓰기도 했다. 일제침략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에는 문화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흉흉한 전쟁이 지나고 폐허가 된 땅에서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판에 문화재를 어찌 생각했을까?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문화재는 우리 곁에 겨우 남아있는 우리의 뿌리이자 정신이다. 교동읍성의 성곽을 연결하고 남문인 유량루, 동문 통삼루, 북문 공북루를 복원하고, 읍성 안에 자리잡았던 관아와 객사, 안해루, 상문루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면 교동도의 얼굴은 어떻게 달라질까? 민가의 낮은 울타리가 되고 논바닥에도 묻혀 있는 산성의 돌을 옮겨와 화개산성을 복원하는 것은 가망없는 상상에 불과할까? 지금은 허무맹랑한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이 상상이 현실이 되면 교동도는 강화도와 경주에 버금가는 역사관광지로 거듭날 것이다. 만약 내가 교동도 주민이라면 교동읍성을 복원하겠다는 강화군수 후보자에게 기꺼이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아니, 복원사업을 주요 공약으로 선정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다. 이 밖에도 교동 여행에 쏠쏠한 재미를 주는 곳은 무척 다양하다. 대개 섬은 물이 부족하지만 교동도의 쌀농사를 걱정없게 만들어준 고구저수지와 난정저수지, 철책선 안에 있는 갈빗살 방조제, 마을 사람들이 풍어제를 지냈던 고읍리의 거대한 물푸레나무, 섬에 있는 나무가 맞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무학리의 은행나무, 한국전쟁 때 찾아든 피난민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장이 섰던 대룡시장,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을 만들어 맹인들의 세종대왕이 된 송암 박두성 선생이 태어난 상용리 터와 선생이 다녔을 옛 교동교회도 교동도의 소중한 역사이다.
여행자들의 몫
교동도를 들어가려면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10여 분 가량 배를 타야 한다. 그러나 물때가 맞지 않으면 배가 외포리까지 한 시간 가량을 돌아서 가야 한다. 배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 교동도는 기다림과 여유를 배우는 곳이다. 그러나 이런 운치를 즐기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교동도와 강화도 사이에는 지금 연육교 공사가 한창이다.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연결하는 연육교(3.52㎞)가 2008년 10월 10일 첫 삽을 떠서 2014년 6월을 목표로 열심히 공사를 하고 있다. 다리가 연결되면 섬은 과연 어떻게 바뀔까? 섬 사람들은 운명의 공동체이다. 땀 흘려 지은 농산물이 남으면 이웃들과 나눠먹는다. 김장하고 남은 배추를 나눠먹고, 들판의 곡식과 야채도 서로 나눠 먹으며 이웃이 다 내 가족이려니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연육교가 놓이고 많은 관광객들이 자가용을 몰고 들어오면 이제 그들에게 적당한 값을 쳐서 판매하게 될 것이다. 대문이나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살았던 섬 생활도, 섬 사람들의 인심도 어떻게 바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변화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배를 타는 재미와 운치를 즐기는 여행자의 눈에도 다리가 연결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섬 사람들에게 연육교 건설은 평생 숙원사업이다. 다리가 완공되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대규모 지역 개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한밤중에 갑자기 아플 때 큰 병원까지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오직 그것뿐이다. 이 소박하고도 절박한 소원을 뭐라 할 수 있을까? 다만 앞으로 찾아들 많은 관광객들이 이 따뜻한 공동체의 삶을 흔들어놓는 훼방꾼이 되지 않기를, 이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용히 지켜봐 주기를 바랄 뿐이다.
역사의땅,생명의땅,아픔의땅,교동!
교동과 처음 마주한 것은 몇 해전 일간지에 실린' 시간이 멈춘 교동' 이란 기사였다.
시간이 멈춰버린 교동엔 대체 무슨 사연이 녹아 있을까?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교동에 대한 막연한 향수를 품고 있었다.
이번 5월 11일, 12일 이틀간 '인천섬마을조사단 1기' 단원으로 선발되어 조금 더 교동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교동으로 떠나기 전날은 마치 소풍을 떠나는 어린아이처럼 설레임이 가득했다. 약속한 시간에 늦지 않으려 새벽잠을 설쳤다. 하나둘 단원들이 모여 교동도로 출발했다.
설레임, 긴장감, 그리고 마주한 교동
창후리 선착장에 도착하니 약간의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무장한 군인이 보이고 철망앞엔 얼마 전 자살하려는 시민을 구하려다 순직한 정옥성 경위를 찾는 현수막이 걸려 있어 숙연해지는 마음이었다. 간단하게 각자의 신분확인이 끝나고 교동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수십마리의 갈매기가 먹이를 찾아 뱃전으로 몰려드는 속에 저 만치 교동에 보이기 시작했다. '웃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교동' 이란 글귀가 반겨주는 월선포에 닻을 내렸다. 군사 접경지역이여서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의 눈빛에 바짝 긴장감이 몰려 왔다.
포구에 내린 섬마을 조사단원들은 인천녹색연합 장정구 사무처장의 브리핑을 듣고 첫 조사지인 '교동대교' 건설현장이 마주보이는 방파제로 향했다. 방파제 현장은 그야말로 폭격을 맞은 것처럼 처참했다.
그 많던 '숭어'와 '대하'는 어디로....
방파제로 향하는 길은 보통의 길이었으나 방파제가 붕괴되면서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방파제 안쪽에 위치한 양어장은 그 기능을 잃은지 오래 되어 보였다. 이 곳에서 '숭어'와 '대하' 를 양식했다고 하는데 현장의 모습은 '그랜드캐년' 처럼 물이 빠진 자리에 협곡이 형성되어 있다. 이미 바닷물에 잠겨 말라버린 나무에서 예전의 모습을 짐작케 했다. 조사단이 걸어가는 길도 곳곳에 손목이 들어갈 정도로 갈라져 위태로워 보였다. 이미 길이 아닌 길을 따라 조사단원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잠깐 발길을 멈춘 그 곳엔 갓 낳은 듯한 새의 둥지, 그 옆은 부너져 내린 방파제 절벽이 조사단의 안타까운 마음을 더 했다. 부디, 탈 없이 훨훨 날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해무 속에 교동대교의 건설현장이 이곳의 사정을 알고는 있는지 무심해 보였다.
'시간이 멈춘 교동엔 적막감이'
1박2일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시간이 멈춘 교동' 대룡시장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조사단이 방문한 날도 여러 팀이 촬영을 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르게 문을 닫은 가게들이 더 늘어난 모습과 마을 곳곳엔 폐가가 방치되어 있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 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찾아 조사단원들은 2개조로 나누어 활동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원교동주민과 이북이 교향인 실향민들 사이게 깊게 자리한 해결되지 못한 앙금이 어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교동대교 개통을 두고, 앞으로 발전을 기대하는 사람과 '다리가 놓인다고 달라질게 뭐있냐?' 라는 의견이 갈라져 있고 이제 나이가 들어 생전에 통일을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시선은 멀리 연백을 향하고 있었다.
'세상의 빛이 된 그 자리'엔 무성한 잡초만이
무거운 발 길를 돌려 '훈맹정음'을 만들어 시각장애인에게 세상의 빛이 되어주신 '송암 박두성' 선생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조사단원이 마주한 그곳엔 무관심을 대변이라도 하듯 잡초만 무성했고 그 흔한 안내판 조차도 없었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송암 선생이 땅을 기부했던 '교동교회'도 덩그러니 비어 있어 적막감만 맴돌았다. 나즈막히 쌓아올린 교회마당의 계단과 종탑은 세상의 빛이 되었던 송암 선생의 모습을 닮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흔적만 남은 그 자리에서 밀려드는 이 죄책감은 무엇일까? 송암 선생의 생가터를 돌아서 오는 길에 자꾸만 자꾸만 발길이 멈칫 거렸다.
'화개산성? 관미성?'
각 방송사에서도 특별 취재를 다녀갔을 만큼 요즘 관심의 중심에 서 있는 화개산성엔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어 그 규모를 가늠케 했다. 조선시대 한증막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에서 조사단원들이 직접 들어가 보면서 잠시나마 그 시절의 생활상을 상상해 보았다. 가쁜 숨을 고르며 화개산 정상에 오르니 산자락엔 조팝나무꽃이 하얗게 눈밭을 이루고 있다.
화개약수터에서 목마름을 해결하고 내려오니 '효자묘'가 잠시 머물러 가자 손짓했다. 얼마나 효심이 지극해 시묘살이를 했으면 아직도 머리를 조아려 큰 절 올렸던 자리가 화석처럼 남았을까? 죄송한 마음을 안고 산자락을 내려오니 '연산군 유배지'표지석이 잠깐 발길을 멈추라 한다. 교동은 연산군 외에 여러 왕들이 거쳐간 곳이기도 하다.
구본선(교동교회) 목사를 만나 송암 선생과 교동교회의 이야기와 교동지역 학교현황 등 지역의 역사를 듣느라 하루의 일정이 빠듯하게 지나갔다. 교동향교로 떠났던 다른 팀이 돌아오고 잠시 저녁식사를 겸한 휴식을 취했다.
흔적, 흔적, 그리고 바람
조사단 일행을 맞이한 교동의 밤은 요동쳤다. 천둥번개와 강풍과 비바람에 놀란 가슴은 전쟁이 난줄 알고 밤새 인터넷 검색창을 확인하는 해프닝 이야기로 아침을 맞이했다.
고읍리 곳곳엔 '흔적'의 연속이었다. '옥사터'엔 어렴풋한 흔적만이 소리없이 맞이했다. 현청터에선 물푸레 나무를 두고 300년이란 설과 150년이란 설이 서로 자웅질을 했다. 고수저수지를 둘러싼 마을 곳곳엔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어 발길을 멈추게 했다. 마을 이장님의 안내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성'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 이번 조사단의 거둔 수확이라고 할까? 그러나 문화재의 흔적을 싹 지워버린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들어야 하는 괴로움도 겪어야 했다.
기존 도로의 폭을 확장하는 문제를 두고 강화군과 지역주민들간의 의견를 듣고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길을 없는지, 어느 재력가가 땅을 구입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절터엔(갈공사지로 추정됨) 낯선 건축물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동엔 이 외에 안양사지, 화양사지, 법정사(월정사)지 등이 있다. 폐교 된지 10여년이 지난'화동국민학교' 의 교정엔 '독서하는 소녀상, 이승복 어린이상, 이순신 장군 동상만이 가시덤불 속에서 지난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발길을 돌려 철책선을 따라 해무 속에 보이는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비'에 잠시 머무니 백로의 자유로운 날개짓이 한 없이 부러운 마음이다.
강화 나들길 9길을 따라 걸으니 이 땅의 아들들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보이고 쓰레기 더미속에 파묻힌 '계루석'이 '나 여기 있다' 는 듯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일손이 분주한 들판을 지나니 어느 집 대문처럼 되어 버린 '교동읍성'이 조사단을 맞이했다. 마을 곳곳엔 '성'의 흔적이 밭의 돌담으로 어느 집 담장으로 각각의 운명처럼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연산군을 모신 사당 '부군당'엔 제사 지낸지 며칠 지나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다.
밭이랑을 따라 발길을 옮기니 교동의 넒은 들판 같은 모습의 '느티나무'가 조사단을 반겼다. '느티나무'가 품어주는 싱그러움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교동부지'로 향했다. 덩그러니 남은 표지석과 한 때는 화려했을 일본식 건물이 남아 그 규모를 알려 준다.
뒤뜰에는 아직도 메마르지 않은 우물이 서 있다. 일행과 뒤쳐진 걸음을 바지런히 옮기니 '연산군 적거지' 가 휑하니 나타났다. 표지판 앞쪽에 남아 있는 우물엔 이 곳의 사연을 알음직한 고목의 밑둥이 우물에 뿌리를 박고 서 있다. 세월의 무상한 바람이 역사의 무관심을 깨우치듯 저수지를 따라 불어왔다. 마을 가운데엔 조선 태종 때 황룡이 출현 했다는 전설이 있는 '황룡우물'이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 여정인 '동진포'에 들러 이번 조사단의 일정을 마무리 했다.
'교동'의 역사를 어찌 한 두번의 방문으로 다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역사와 지역의 문화와 환경과 생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 나가야 하는 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가 해야 할 몫인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우리가 조상으로 부터 물려 받은 것이고 우리 후손으로 부터 잠시 빌려 쓰는 것'이라고
-2013년 인천섬마을조사단 1기 문경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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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푸, 풍민?!!
왜내르포가여깄냐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