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천년학 리조트'

천년학 리조트 천년학 리조트 바로 앞 바닷가 (물이 빠진 상태)

리조트 왼편의 마을 모습 제방위로 새로 반듯한 길이 생겼다.
건물은 넓고, 깨끗하고, 바다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시골답게 우리를 맞이하는 식구는 한둘이 아니었다.
모기, 벌레, 불편함...
그러나 그런 것이 여행의 즐거움이다.
불편함이 이야기를 만들어준다.
아침을 먹고 이청준 생가로 갔다.
이청준의 소설 <눈길>에서 주인공 나는 엄마를 '노인'이라고 부른다.
처음 그 소설을 읽었을 때 그 맹맹함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몇 페이지를 넘기도록 '노인'이 엄마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엄마는 '엄마'이지
'노인'이라는 칭호로 대체될 수 없는 존재라고 내 대뇌는 고정박고 있었던 것이다.
부유한 집의 아이가 어느 날 몸만 빠져나와 가난의 뒷골목에 내팽겨쳐진 그런
드라마같은 인생이 주인공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드라마같은 패망은 나의 잘못도 그렇다고 '노인'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어느 날
집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고, 문득 '엄마'는 몸 하나 누일 곳이 없는 신세가 되었다.
주인공이 그 옛집에서 하룻밤 묵어간다.
주인공은 이른 새벽 동네눈을 피해 눈길을 걸어 그 마을을 떠나고 그날 이후 마음까지도 깡그리 거두었다.

리조트 왼편의 마을 모습 제방위로 새로 반듯한 길이 생겼다.
건물은 넓고, 깨끗하고, 바다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시골답게 우리를 맞이하는 식구는 한둘이 아니었다.
모기, 벌레, 불편함...
그러나 그런 것이 여행의 즐거움이다.
불편함이 이야기를 만들어준다.

이청준 고향마을 어느 마을처럼 큰 나무가 마을 한가운데 있다.
<눈길>은 주인공 나의 길이 아니라 나를 배웅하고 돌아가는 어머니의 길이다.
이제 옛 집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아들은 훌쩍 도시로 떠나고
어두운 눈길을 다시 혼자 돌아갔던 어머니의 길이다.
" ...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아들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몹쓸 늙은것으로 탓하며
혼자 걸어가는 늙은 어머니의 길이다.
이청준 생가 - 마당에 난 작은 풀들,,,

이청준 생가에 있는 소담스런 장독대

이청준은 아주 공부를 잘한 마을의 신동이었다고 한다.
'공부를 하려면 청준이만큼은 해야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란다.
하지만 정작 이청준은 오래 고향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눈길을 밟고 도망치듯 떠난 고향처럼
그에게 고향은 그리 따스한 곳은 아니었나 보다.
그럼에도 이청준의 문학은 바로 그 전라남도 장흥, 자신의 고향을 모태로 태어난다.
천년학, 서편제가 모두 그곳의 이야기들이다.
그곳에 눈 먼 소리꾼이 있었고,
고집스러운 서민들의 삶이 있었고
끊어지지 않는 생명 같은 것이 있었다.
옛날에는 포구였던, 지금은 논으로 바뀐 곳에서 잠시 눈길을 멈추었다가 우리는 다시 그의 묘소로 갔다.
그의 무덤은 포근하고 넓직했다.

이청준의 묘소에 술 한 잔을 부어 드리고....

무덤 앞 비석들 바닥에 새겨진 그의 구상 노트
무덤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고, 비석이 있었고, 그의 낙서가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준희샘이 그의 묘소에 술을 따르고
우리는 함께 묵념을 했다.
그의 집필노트에 해당하는 밑그림을 바닥에 새겨놓은 것은 참 신선해 보인다. 그의 필치와
그의 고민과 그의 냄새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니 말이다.
이청준의 소설은 친절한 맛이 없다.
가끔 그의 책은 독자를 '병신과 머저리'로 만든다.
그래서 손 놓지 못하고 계속 보게하는 작가.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본질 저 안쪽을 들여다보는 작가. 그의
목소리는 깊고 웅숭하다.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책으로 계속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는 늘 
해변 밭 언덕 가에
나와 앉아
바다의 노래를
앓고 갔다
노래가 다 했을 대
그와 그의 노래는
바다로 떠나갔다
바다로 간 그의 노래는
반짝이는
물비늘이 되고
먼 돛배의 꿈이 되어
섬들과
바닷새와
바람의 전설로
살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