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명물 물랭루즈를 가려면 전철을 타고 블랑쉬 역에 내리는 게 좋다. 그리고 계단을 따라 지상으로 나오면 붉은색의 커다란 풍차가 바로 눈앞에 보인다. 이곳이 19세기 후반, 파리 유흥문화의 대단한 성공을 보여주는 물랭루즈이다.
랭루즈는 프랑스어로 ‘붉은 풍차(Moulin Rouge)’라는 뜻이다. 물랭루즈가 생겨난 몽마르트 지역은 원래 풍차(방앗간)가 많았던 지역으로 19세기 후반에는 오래된 풍차들이 공장이나 술집, 카페, 여관, 유곽으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물랭루즈가 풍차의 외형을 가진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슬럼화된 몽마르트 지구에 다양한 유흥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사회 각계각층의 여러 취향을 모두 만족시킬 오락문화가 등장했다. 그리고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밤을 밝혔던 극장식 캬바레, 물랭루즈가 1889년 문을 열었다. 물랭루즈의 쇼와 화려한 불빛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파리를 점령했던 나치마저도 하던 전쟁을 내버려 둔 채 물랭루즈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물랭루즈에서 유명해진 배우와 가수는 너무도 많다.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땅 같은 대스타들이 이곳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물랭루즈의 포스터를 그려서 더 유명해진 화가, 툴루즈 로트렉(Toulouse-Lautrec-Monfa 1864~1901)도 이곳에서 명성을 얻었다. 로트렉은 물랭루즈로 유명해졌고, 물랭루즈는 로트렉 덕분에 더욱 유명해졌다.
툴루즈 로트렉의 꽃정물화
물랭루즈의 화가 로트렉은 꽃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아니다. 그림을 배우던 시절의 꽃정물화 습작이 남아있을 뿐, 그의 그림은 몽마르트 주변에 있었던 술집의 실내 풍경과 무대 위의 공연자들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로트렉의 삶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탐미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여유롭지 못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불운한 신체적 결함, 이로부터 생겨난 자괴감, 아버지에게 배척되었던 기억들이 몽마르트의 화려한 세계에서 그는 많은 것을 잊을 수 있었다.
툴루즈 로트렉은 프랑스 남부의 중심도시 ‘툴루즈’와 근교의 ‘알비’라고 하는 지역을 통틀어서 가장 유서 깊은 툴루즈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부유하게 성장한 로트렉은 귀족 가문에서 종종 있었던 근친혼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렸다. 그의 부모는 이종사촌 사이였다. 로트렉은 13살 때 가볍게 넘어진 일로 왼쪽 넓적다리뼈가 부러지고, 그다음 해에는 오른쪽 다리마저 부러지는 불운을 겪었다. 그 이후 여러 차례의 수술이 있었지만 그의 하체는 더이상 자라지 않았고, 로트렉은 150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평생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기형적인 신체로 살아가야 했다.
로트렉의 아버지 알퐁스 로트렉 백작은 귀족 스포츠인 승마와 사냥을 유난히도 즐겼던 사람으로 이제 말을 탈 수 없는 외아들에게 냉정한 자세를 일삼았다. 더구나 술집과 유곽의 여인들을 소재로 그린 아들의 그림에 대해서 비난을 일삼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그림을 배우고 화가 생활을 하는 데에는 부모 모두 아낌없이 후원하였던 점이다.
툴루즈 로트렉, 물랭루즈의 굴뤼 1891~92, 뉴욕 현대미술관
로트렉이 어머니와 파리에 올라와 코르몽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절 그린 꽃 습작 <화병의 제비꽃>을 보자. 이 작고 아름다운 꽃그림에 어둠만이 가득하다. 그의 우울한 성장 과정 탓이었을까. 고향의 삼촌에게 그림을 배우던 시절의 그림, <오퇴유의 추억 1881>에서 알 수 있는 밝은 빛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그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이사한 후,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풍경화에서 점차 멀어지고, 술집을 드나들며 환락과 유흥문화 속에서 생활하는 인물을 그리는 즐거움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