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함과 깨끗함, 비움의 미학
김신중(시인)
불과 1년 전에 김광규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무척 따듯하면서도 섬세한 분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정년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나이인데도 때 묻지 않은 정갈한 삶의 모습, 깨끗하면서도 가끔은 애잔함이 숨어 있는 미소를 보면서 내밀하게 풍겨져 오는 삶의 깊이와 넓이를 읽을 수가 있었다.
시집을 읽다보면 현실을 살아가는 시인의 삶과 시속에 나타나는 삶이 너무 차이가 나서 시를 읽는 내내 불편할 때가 가끔 있다. 물론 시인과 시적 화자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의 진정성이나 진실성에서 보면 시인의 삶이 시에 풍겨 나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김광규 시인의 시를 음미하면서 시 전편에 나타나는 시적 화자의 삶에 시인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어쩌면 이렇게도 비슷할까 생각하면서 읽는 내내 무척 행복감을 느꼈다.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했다. 유홍준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에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는 다르리라.”고 하였다. 두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김광규 시인은 사물을 사랑하고 사물과 아름다운 만남을 계속하면서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시를 포함한 그의 삶은 참되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삶의 주변에 있는 사물을 바라보는 김광규 시인의 시선은 참으로 따듯하다.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기에는 뭔가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 따듯함, 따듯함을 통해서 냉혹한 현실을 이길 수 있고 더 나아가 극복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이면서, 오히려 그런 현실을 가볍게 여기는 자신감도 엿보인다.
희미한 유목(幼木)의 기억
모두가 쑥 쑥 자라
저 마다의 자태로
아름드리 노송이 되었다
힘 센 팔뚝 같은 가지를 옆으로 뻗어
서로를 부러뜨릴 수도 있었는데
송곳 같은 솔잎 끝으로
얼굴을 찌를 수도 있었는데
하늘 높이 솟으려는
나무 하나를 위해
옆으로 기울어진 나무들
언덕 아래로 곱사등이가 된 나무들
지차들이 맏이 하나 때문에
대학을 포기했던 어느 가족사 같은
등 굽은 소나무 형제들
부끄러운 손끝으로
나무의 온정 같은
찐득한 송진을 매만지는
숲속의 대낮
- 「세 그루의 소나무」 전문
맏이 때문에 지차들의 설움을 경험해 본 독자들이라면 이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짠했을 것이다. 맏이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도 없고, 새 교복, 새 옷, 새 양말은 거의 신어보지 못하고 형이나 누나들한테 낡은 것을 물려받으면서 가슴에 응어리가 맺히는 것이다. 이러한 애잔한 상황을 시인은 따듯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늘 부족하게 살았으면서도 배려하면서 서로를 세워줄 수 있었기에 ’아름드리 노송‘으로 설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나무는 ’힘 센 가지‘를 내지도 않고 ’송곳 같은 솔잎‘을 내지도 않으며 오히려 ’따듯한 온정‘을 드러냄으로써 아름다운 가족의 모습을 수채화처럼 완성하고 있다.
두 사람의 굴뚝 청소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굴뚝 청소를 하고 나온 두 사람 중에서 얼굴을 씻는 사람은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한다.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더러운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때 묻지 않은 깨끗한 사람은 때 묻은 세속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늘 자기 자신이 때 묻었음을 말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깨끗해지기를 애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김광규 시인에게 사물이나 현상은 모두 거울이다. 사물이나 현상을 보면서 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고 삶을 성찰하면서 더 깊어지고 넓어지며 낮아지기를 원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높아질 수 있고, 더러울 수 있겠으며, 냉혹해 질 수가 있을까?
플라스틱 대야 속에 담긴
셔츠와 바지는
구겨진 나의 몸
그 안에 때 묻은 내가 있다
흙먼지와 함께
바람 부는 메마른 곳을
떠밀리고 다녔던
땀 절인 하루
몽롱한 비누 거품에
한 겹씩 벗겨지는 죄악의 껍질
헹굼의 수행 속에서
정화된 나를 번쩍 들어 올린다
듯 「손빨래를 하면서」 전문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자세히 보면 굴뚝과 같다. 사람들은 힘을 다해서 굴뚝 속에서 나름대로 청소를 하면서 이 세상의 한 부분을 쓸어간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삶이란 세상의 한 부분을 쓰는 것과 다름없다. 굴뚝 속에서 청소를 하다보면 누구든지 더러워지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때 묻은 얼굴을 닦아냄이다. 시인은 늘 ‘때 묻은 나’를 고백하면서 손빨래를 하듯이 자신의 허물을 벗겨내면서 ‘정화된 나’를 번쩍 들어 올린다. 그러면서 깨끗한 자신의 모습을 지켜나간다.
세속이란 흙먼지가 날리고 메마르며 땀으로 절인 삶이 상존하는 곳이다.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때에 절어 그 때를 헹궈낼 수가 없다. 이럴 때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죄에 대한 민감성이다. 우리의 모습이 때와 땀, 죄악에 절어서 살아가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삶에 대한 민감성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고백한 것처럼 죄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양심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 「송판의 못」도 이러한 민감성을 잘 보여준다.
무고한 송판에 박힌 작은 못 하나 나무의 시간 속에 들어왔다. 묵묵히 고통을 참아온 소나무 널빤지는 못의 속성을 잃게 했다. 못은 송판의 일부가 되었다. 누군가 못을 빼는 순간 박힐 때만큼 이나 빠질 때에도 송판은 아프리라. 못이 뽑힌 자리 구멍 난 가슴으로 불어오는 바람. 지난 날 나는 그대의 가슴에 못의 깊이로 박혀있었다. 문득 바람이 스치는 날 아픔의 송판 같은 그대의 이름을 불러본다. 한때 못이었던 내가.
- 「송판의 못」 전문
김광규 시인의 시를 읽으면 자연스레 ‘비움과 채움’, ‘겸양과 교만’이란 말이 떠오르는데 비움과 겸양의 덕성이 시 곳곳에 녹아 있어 시인의 사람됨을 알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면 비운다고 말은 하지만 세속의 삶이란 것이 비워내기가 쉽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 시인의 시에는 조금씩, 소박하게, 잔잔하게 비워가는 시인의 모습이 있다.
먼 파도소리에도
몸은 닳는다
내 속살은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한 아픔을 어루만지는
물결의 손에 몸을 적시고
온몸을 뒤척여 봐도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다
껍질의 허무한 충만 속으로
온기를 전해오는 햇살
졸음에 겨운 빈 몸에
한가득 담기는 갈매기 울음
먼 파도 소리에도
몸은 닳는다
- 「조개껍질」 전문
세속의 도시는 채우려고 하지만 시인은 조금씩 비워가면서 영원의 수평선을 바라본다. 오늘도 세속의 파도에 몸이 닳는다. 아픔으로 온 몸을 뒤척이면서도 껍질을 버리고 속살을 버린다. 그런 몸짓을 프로메테우스와 같이 운명처럼 계속하면서도 가끔 하늘을 바라볼 뿐 비워내는 작업을 계속하는 거룩함을 엿볼 수 있다.
사람보다 동물이
동물보다 식물이
식물보다 무생물이
좋아지려고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전문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번쯤은 하지만 이 시만큼 절실하게 들리지 않는다. 비워 내다보면 끝에는 빈 백지만 남게 되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지워지게 되는 것이다. 김광규 시인에게 사람이란 세속적인 욕망으로 문제가 많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어서 연민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연민을 통해서 오히려 욕망으로 가득한 현실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비움과 겸양의 끝에 다시 사람에 대한 따듯함이 스며들게 된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길이 있듯이
눈을 뜨고도 보이지 않는 길이 있네
한낮에도 어둠이 이곳에 숨어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네
해가 진 저녁
나와 소가 들어가
또 한 겹의 어둠을 보태네
한손은 벽에다 손바닥을 쓸며
다른 한손은 소를 질질 끌며 오는 길
발목까지 차오르며
철퍼덕거리는 도랑물이 얼음 같았네
두려움 떨치려 부른 노래
소리의 공명에 소스라치게 놀라
나는 뒷걸음질 치고
소는 안 갈려고 하네
어느덧 출구에 반짝이는 빛
초롱불 깜빡이는 외딴집이 보이네
막걸리 드시느라 마중도 오시지 않는
야속한 아버지여
- 「공굴을 지나며」 전문
공굴을 지나본 사람이라면 어둠이 얼마나 깊고 두려운 지를 안다. 길을 찾아가는 시인의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절창이라고 하겠다. 길 위에 가득한 어둠을 헤치고 집을 찾아가는 시인의 모습이 한없이 안쓰러우면서도 절실하다. 아마 이런 모습 때문에 이 시를 단순한 어릴 때의 기억을 넘어서서 길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상징적인 모습으로 읽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흔들리며 살아간다. 시인도 “바람 부는 광야에서/ 흔들리며 살아온 뒤안길/ 바람 불지 않는 곳에서도/ 비틀거렸던 나(흔들림에 대하여)”로 흔들린다. 그러면서 흔들리지 않고 꼿꼿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롱한다. “꼿꼿하게만 서 있는 당신/ 필경 넘어지기 십상이지/ 벌레처럼 기어 갈 줄도 알아야(자벌레)” 한다면서 굴욕을 사랑하면서도 흔들림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외친다. 이런 삶의 모습은 자기 자신을 미화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애정과 사랑에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바람도 그친
황혼의 운동장에서
나를 찾았네
남 보기에는 언제나
평형의 몸이었지만
언제나 무거운 자에게만
마음이 기울었었네
때로는 외로운 허공
그곳에
약한 자를 올려놓은 채
- 「시소의 고백」 전문
이제 황혼의 나이에 지나온 삶을 반성하면서 세상에 대한 관조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공평하고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생각을 했는데 힘 있는 사람들을 더 무겁게 여기고 약한 자를 가볍게 여겨온 삶을 반성하면서 더 정직하고 공평해질 거라는 시인의 고백을 읽을 수가 있다. 이렇게 흔들림에서 공평함으로 나아가는 태도는 어쩌면 최고의 비움이요, 관조라고 하겠다.
이제 시인은 담담한 마음으로 황혼을 바라보고 있다. “테라스 그늘 아래 홀로 앉아/ 물끄러미 석양을 바라 보았네 / 유리잔에 담긴/ 돌이킬 수 없는 하루의 부끄러움/ 몇 모금은 노을의 슬픔 같았네/ 쓰고 떫은 입술의 여운/ 생의 멀미에 익숙해 진 듯/ 흔들리지 않고 걸었네(어떤 저녁)”처럼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소리 없는/ 운명의 칼날에 베인/ 나의 얼굴// 피 흘리지도/ 울지도 않았네(주름살 2)”처럼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쉽사리 눈물을 흘리지 않는 단단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들이 만든 줄/ 두렵지 않은 마음 하나가/ 걸어가(외줄을 타는 사람)”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으며 두렵지 않은 시인의 모습, 이런 삶의 태도를 관조적이라고 한다면 바로 시인의 이런 관조적인 태도가 있기까지에는 따듯하면서도 깨끗하게 끊임없이 자신의 비워낸 삶에서 우러러 나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김광규 시인은 이러한 삶의 모습을 삶의 깊은 곳까지 천착해 가는 내밀한 상징들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따듯함은 사람들에 대한 더 가까운 소통으로, 깨끗함은 몸과 마음을 넘어 영혼의 높이까지 잇닿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비인 공간에는 내면의 소리가 자리하여 아름답게 울려 퍼질 공명의 소리들을 기다리게 한다. 뜨거운 뙤약볕의 소리가 아니라 깊고 넓게 퍼져 나갈 노을의 소리를 조용하게 기다리는 행복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