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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께 공부한 시
나는 오늘
오은
나는 오늘 토마토
앞으로 걸어도 나
뒤로 걸어도 나
꽉 차 있었다
나는 오늘 나무
햇빛이 내 위로 쏟아졌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위로 옆으로
사방으로 자라고 있었다
나는 오늘 유리
금이 간 채로 울었다
거짓말처럼 눈물이 고였다
진짜 같은 얼룩이 생겼다
나는 오늘 구름
시시각각 표정을 바꿀 수 있었다
내 기분에 취해 떠다닐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종이
무엇을 써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텅 빈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사각사각
나를 쓰다듬어 줄 사람이 절실했다
나는 오늘 일요일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오늘 그림자
내가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잘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나는 오늘 공기
네 옆을 맴돌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너를 살아 있게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오늘 토마토
네 앞에서 온몸이 그만 붉게 물들고 말았다
_오은 시집 <마음의 일> (창비교육,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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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은 시인
198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2년 『현대시』로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 《없음의 대명사》, 《나는 이름이 있었다》, 《왼손은 마음이 아파》, 《유에서 유》,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호텔 타셀의 돼지들》, 청소년 시집 《마음의 일》, 산문집 《다독임》, 《너랑 나랑 노랑》 등이 있다. 대산문학상, 현대시작품상, 구상시문학상,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작란(作亂)’ 동인이다.
<오은 시인의 말>
“등단한 시기와 시인이 된 시기가 다르다.”
“가장 재미있어 하는 일 중 하나가 국어사전을 펼쳐보는 일”
<오은 시인의 다른 시>
1) 1년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이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무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만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오릅니다
어제의 밥이, 그제의 욕심이, 그끄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2) 계절감
귀퉁이가 좋았다
기대고 있으면
기다리는 자가 되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왔다가 물러갔다
뭔가가 사라진 것 같아
주머니를 더듬었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봤을 것이다
내가 개를 스쳤다
개가 나를 훑었다
낯이 익고 있다
냄새가 익고 있다
가을은 정작 설익었는데
가슴에 영근 것이 있어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땀이 흐르는데도
개는 가죽을 벗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땀이 흐르는데도
나는 외투를 벗지 않고 있었다
어찌하지 않은 일
우리는 아직 껍질 안에 있다
뭔가 잡히는 것이 있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꼬깃꼬깃 접힌 영수증을 펴보니
다행히 여름이었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
3) 이력서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 밤에는,
오늘 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될지는 나도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
4) 돌멩이
뻥뻥 차고 다니던 것
이리 차고 저리 차던 것
날이 어둑해지면
운동장이 텅 비어 있었다
골목대장이던 내가
길목에서
이리 채고 저리 채고 있었다
돌멩이처럼 여기저기에 있었다
날이 깜깜해지면
돌담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좁을 길로 들어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돌멩이처럼 한 곳에 가만히 있었다
돌멩이처럼 앉아
돌멩이에 대해 생각한다
돌멩이가 된다는 것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
온 마음을 다해 온 몸이 된다는 것
잘 여문 알맹이가 된다는 것
불현듯 네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
마침내
네 가슴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
철석같은 믿음이 된다는 것
입을 다물고 통째로 말한다는 것
날이 밝으면
어제보다 단단해진 돌멩이가 있었다
내일은 더 단단해질 마음이 있었다
5) 그것들
열면 그것들이 있었다. 보란 듯이. 잊어도 있겠다는 듯이, 있어서 잊지 못할 거라는 듯이. 그러나 잊으려고 열었다. 있으면 생각나니까, 나타나니까, 나를 옥죄니까. 잊지 못하니까.
있지 않을 거야, 있지 않을지도 몰라, 있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들은 있었다. 잊지 못할 거야, 영영 잊지 못할지도 모르지, 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어김없이 있었다.
그것들은 바깥에 있었다. 안에서는 모르는 곳에. 안은 안온해서, 평이해서, 비슷해서 알 수 없었다. 속사정은 여간해선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몸을 웅크려 농밀해지기만 한다.
평생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열 마음과 여는 손만 있다면. 없어도 계속 생각날 것이다. 머릿속에 나타날 것이다. 가슴을 옥죌 것이다. 없음은 있었음을 끊임없이 두드릴 것이다.
닫으면 그것들이 사라졌다. 감쪽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야. 눈을 감기가 미안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사이에 그것들이. 계속 생각나면 계속 생겨나는 그것들이. 열어도 닫아도. 열지 않아도. 닫지 못해서.
있다
6) 아침의 마음
눈을 떠도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세수를 해도 다 씻기는 것은 아니다
걷고 있다고 해서
꼭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가만있다고 해도
법석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심장이 뛸 때마다
속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발끝에 고인 눈물이
굳은살로 박히는 아침
바깥이 밝다고
안까지 찬란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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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함께 공부하기
1) 시의 이해
시 <나는 오늘>은 다양한 사물에 ‘나’를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매일 변화하는 감정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나의 정체성과 감정을 솔직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감각적, 내면적, 은유적
▶ 주제 : 나의 감정과 존재에 대한 성찰
▶ 특징 :
- 은유와 상징으로 감정을 형상화했다.
- 반복적인 표현으로 운율과 통일감을 나타내고 있다.
-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해 감정 전달을 쉽게 했다.
- 화자의 감정 상태를 구체적인 사물의 특징에 빗대어 표현했다.
(가) ‘토마토’를 처음과 끝에 반복한 이유는?
토마토는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같은 말이다. 이러한 단어를 처음과 끝에 반복함으로써 시의 통일감과 안정감을 주고 있다. 또한 아무리 감정이 변화무쌍해도 ‘나는 나’라는 정체성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나) 이 시의 주요 표현 방식은?
가장 중요한 표현 방식은 은유이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그 감정과 닮은 사물로 비유했다. ⇒ 금이 간 유리 = 상처받은 마음
(다) 핵심 시어의 상징과 의미
1연, 토마토 : 앞뒤가 같은 나의 정체성·본질
2연, 나무 : 성장과 확장
3연, 유리 : 불안정함과 상처
4연, 구름 : 변화무쌍함
5연, 종이 : 혼란과 공허함
6연, 일요일 : 휴식과 시간의 멈춤
7연, 그림자 : 죄책감과 내면
8연, 공기 : 존재의 미묘함과 보이지 않는 감정
(라) 이 시가 전달하는 중심 메시지는?
매일 달라지는 감정도 결국은 모두 ‘나’라는 존재의 일부이며, 그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 언어유희와 시
(가) 언어유희(言語遊戱) : 어떤 의미를 암시하거나 전달하기 위해 말이나 단어, 문자 등을 해학적으로 사용하는 표현. 동음이의어를 재치 있게 구사하거나 유사 발음을 이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단순한 말장난에 머물기도 하지만 날카로운 풍자와 기지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바나나 먹으면 나한테 반하나’
‘오렌지 먹어 본 지가 얼마나 오랜지’
※ 언어유희의 대가 : 김삿갓 ⇒ (예, 美 / 婦)
(나) 황진이 시조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 일도창해(一到蒼海) 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벽계수는 푸른 산속에 흐르는 시냇물을 지칭하는 말이자 왕족 한 사람의 이름, 명월은 밝은 달이자 황진이의 기명으로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언어유희이다.
(다) 이근모 시인의 <거지>
길을 간다는 거 / 산길을 간다는 거 / 사실은 / 내가 나를 걷는 거지 // 바람을 만나 걷다가 / 구름을 만나 쉬다가 / 늙은 고목 부둥켜 울어도 보고 / 그렇게 수없이 내가 되어 걷는 거지 // (중략)
(라) 오은 시인은 ‘언어유희의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_“나는 오늘 토마토 / 앞으로 걸어도 나 / 뒤로 걸어도 나” _오은 <나는 오늘>에서
_“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쓸 수 있을 거야. 가능에 불을 질러. 불가능해질 거야” _오은 <아찔>에서
_“경우의 수는 허수이거나 무리수였다 / 실수는 실수하는 법이 없었고 / 분수는 넘칠 줄만 알았다.” _오은 <뭉클>에서
_“여름 방학처럼 내내 기다리다 / 겨울 방학처럼 몸이 굳었다 / 막 시작된 줄 알았는데 / 봄 방학처럼 짧았다 // 가을방학처럼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_오은 <첫사랑>
_“꿀맛이 왜 달콤한지 알아요? 꾼 맛도 아니고 꾸는 맛도 아니어서. 미래니까요!” _오은 시인의 말
▶ 재밌는 언어유희
_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과일은? 천도복숭아
_병아리가 먹는 약은? 삐약
_살이 찌면 안되는 도시는? 마르세유
_‘방귀 뀌지마’를 영어로 하면? 돈까스
_국수와 국시의 차이는? 밀가루로 만들면 국수, 밀가리로 만들면 국시 / 끓이면 국수요, 끼리면 국시 / 봉지에 담으면 국수, 봉다리에 담으면 국시
_봉지와 봉다리의 차이는? 봉지는 가게에서 팔고, 봉다리는 점빵에서 판다.
_가게와 점빵의 차이는? 가게에는 아주머니가 있고, 점빵에는 아지매가 있다.
_아주머니와 아지매의 차이는? 아주머니는 아기를 업고 있고, 아지매는 얼라를 업고 있다.
_아기와 얼라의 차이는? 아기는 누워 자고, 얼라는 디비 잔다.
_학교와 핵교의 차이는? 학교는 다니고, 핵교는 댕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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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를 마치며
나는 오늘 토마토
여러분과 함께 시를 공부하며
내 마음이 즐거움으로 꽉 차서
그만 붉게 물들고 말았습니다
_오은 시인의 <나는 오늘>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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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 늦었지만 시공부 참가하고 싶은 사람은 어디로 가면 가입되는지 위치와 시간등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시 공부는,
-일시 : 매월 첫 금요일 오후 7시
-장소 : 한양문고 주엽점 117호(귀가쫑긋 공부방)
-준비물 : 필기도구(노트, 펜)
-회비 : 평생회비 1만 원
(월회비, 연회비 등이 없으며, 회비는 공부방을 사용하게 해 주는 감사의 뜻으로 전액 인문학 모임 '귀가쫑긋'에 찬조합니다.)
다음달인 7월에는 4일(금요일)에 공부를 할 예정입니다.
그날 직접 오셔서 함께 공부하시고 시 공부반인 <쓰리_고> 회원에 가입하시면 됩니다.
참가 인원이 많을 때는 귀가쫑긋 공부방이 아니라 가까운 곳의 큰 방으로 옮겨서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만일 귀가쫑긋 공부방에 아무도 없을 경우 저에게 문자를 보내시면 됩니다. 전화가 아니라 꼭 문자를 부탁드립니다(010-8780-2114, 이다.).
다음달부터 함께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다. 네~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