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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문학박람회 시조의 미학적 활로와 전망을 진단하는 토론회 |
주제 : 시조의 미학적 활로와 전망
□ 추진 목적 : 유명 작가와의 만남을 통한 문학의 활성화 및 문학인의 저변 확대
□ 일시 : 2021. 10. 9.(토) 15:40~16:20
□ 장소 : 목포문학관
□ 주최 : (사)한국시조시인협회
▶ 사회자 : 우은숙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 토론자 : 문무학 대구문화재단 전임대표, 대구예총회장 역임
정수자 아주대 박사, 시조시인
염창권 광주교육대 교수, 시조시인
김삼환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박성민 시조시인
- 기록 및 정리 : 정희경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차장
- 사진 및 동영상 : 김양희 공화순《시조미학》책임편집
▶ 지금부터 목포문학박람회의 문학 토론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토론회의 진행을 맡은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우은숙입니다. 목포는 언제 와도 유달산과 바다내음이 반겨주니 포근함이 느껴집니다.
목포문학박람회의 귀한 행사 중 하나인 이번 토론회 주제는 ‘시조의 미학적 활로와 전망’으로 정했습니다.
코로나가 처음 창궐할 때는 이렇게까지 길게 이어지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계전쟁 때도 문학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위안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포스트 코로나(post corona), 아니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시대에는 문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 지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민족문학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시조의 미래를 위해 미학과 전망을 진단하는 이번 토론회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 그럼, 패널로 참석하신 시인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80년대 등단하시고 『가나다라마바사』, 『낱말』 등의 시조집으로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계신 문무학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다음은, 『저물녘 길을 떠나다』,『저녁의 뒷모습』 등으로 ‘저녁의 시인’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탐하다』라는 시조집 출판 이후 ‘탐나는 시인’이 된 정수자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다음은, 광주교육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도,『숨』 등의 시조집과 『존재의 기척』 등의 평론집을 통해 작품과 평론을 병행하고 계신 염창권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다음은, 얼마 전 『사랑은 내가 주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라는 산문집으로 우리나라 서점을 발칵 뒤집어 놓으신 김삼환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다음은 2000년대 대표시인으로,『숲을 金으로 읽다』라는 시조집을 내면서 숲과 금을 사랑하게 된 목포의 자랑, 목포의 문사 박성민 시인을 소개합니다.
▶ 다음은 토론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정환 이사장님으로부터 오늘 이 토론회의 기획 의도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 ‘시조의 미학적 활로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문학 토크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은 유명 작가와의 만남을 통한 문학의 활성화 및 문학인의 저변 확대를 위한 것입니다. 목포문학박람회와 함께 하는 이번 토론회는 추계 세미나의 일환으로 시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궁구하는 일이며, 시조의 앞날을 밝히는데 일조하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그럼, 지금부터 토론회의 진행 순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패널로 모신 시인들은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년대별로 시인들에게 <공통질문>을 드리고, 공통질문이 끝나면 한 분씩 돌아가며 자연스럽게 질의하고 답변하는 <개별질문> 순서로 진행하고자 합니다.
▶ 우선, 80년대 두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먼저 문무학 선생님께 여쭙겠습니다.
Q. 오늘 주제가 ‘시조의 미학적 활로와 전망’인 만큼 주제와 연관하여 질문하고 싶습니다. 문학 안에서 시인들은 다양한 형태로 미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조의 현대적 미학과 확장 가능성의 방안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고시조가 현대시조로 이름을 바꾸면서, 미학은 확장되었는가? 저는 고시조의 미학, 숭고미, 비장미, 우아미를 크게 넘어서지 않았다고 봅니다. 다만 실학사상이 대두되면서 사설시조가 생기고 이 사설시조가 희극미라는 새로운 미학을 이끌어냈습니다. 이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시조의 기본 형식을 다양하게 활용하면 미학이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실제로 경험하면서 비난을 많이 받았던 종장만으로 쓰는 시조, 단장시조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명길 선생은 절장시조라 불렀고, 저는 홑 글자를 소재로 종장만으로 써서 홑시라고 부릅니다. 그 무엇으로 부르든 간에 시조미학의 확장을 위해서는 종장만으로 쓰는 시조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 근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SNS시>와 <디카시>들입니다. 긴 시들이 아닙니다. 제도권 문단에서 인정해주고 싶지 않은 시지만, 상당한 세력을 형성해 있습니다. 끝까지 외면해도 좋겠습니까?
둘째 문단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정형시 모색 양상은 민조시 3.4.5.6조, 1 행시, 17자시, 10자시 등이 시도되고 있는데 이는 시대적으로 짧은 시가 요구된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극서정시 주장까지 곁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조 종장만으로 쓰는 시조를 굳이 배척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셋째, 정형시의 미학과 대중성 등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일본 정형시 하이쿠를 거론합니다. 일본 정형시 하이쿠(훗쿠), 5.7.5 열일곱자 형식은, 와카의 5.7.5. 7.7.에서 조오쿠만을 딴 것입니다. 7.7.(단쿠)를 버린 형식입니다. 이렇게 일본 정형시는 줄여서 성공하는 정형시가 되는데 우리는 도저히 안 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 아닐까요. 따라서 저는 시조의 미학 확장을 위해 시조 형식을 파괴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본 형식을 다양하게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종장만으로 쓰는 시조는 시대가 요구하는 미, 즉 단순미(Simple, Smart) 같은 것으로 미학 확장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시조의 다양한 형식 활용은 문화콘텐츠의 대세가 되고 있는 OSMU이기도 합니다. 시조는 시조를 넘어 문학이 되어야 하고 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시조 미학의 확장은 여기에서 출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정수자 선생님께도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Q.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시조의 현대적 미학과 확장 가능성의 방안은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요?
A. 시조의 현대적 미학 구현은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정형의 전통성이라는 바탕 위에서 현대를 미학적으로 접맥하고 창출하는 작업이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현대미학의 근간을 이루는 다층성과 융합성을 정형으로 어떻게 빛낼 수 있을지 찾습니다. 요즘 발표작만 일별해도 낯익은 인식과 표현과 안정감이 주를 이루는 편이라 새로운 발견이며 시적 충격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현대의 다양한 인식과 감각, 서정 등에 대한 모색이나 탐험에 소극적이라면 정형시의 미적 확장은 더 제한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조의 문학적 위의는? 다시 원점 같지만, 정형시의 존재 의의 역시 정형의 미학으로 증명해야겠지요. 현대성이 두드러지더라도 정형의 인지가 어려울 정도면 형식의 은폐가 포기라고 비칠 수 있으니까요. 우리말에 잘 맞는 양식으로 정제되는 동안 살아남은 시조의 정체성 존중이야말로 시조를 택한 시인의 미학적 태도라 하겠습니다. 현대에 들어 창을 떼어낸 후 활발했던 형식 고찰에서도 정형을 지키되 내용의 현대성 추구라는 방향은 현대시조의 길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정체성에 현대성과 미적 위의를 빛내는 게 현대시조의 소임일 듯합니다. 책 속에 박제된 언어와 감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시조를 찾고 쓰는 갱신이 늘 절실합니다. 균형과 절제와 조화의 집약인 양식성을 현대적으로 확장하려면 그만큼 새로운 시적 충격이 필요합니다. 예부터 봐온 시조들과 오늘의 시조가 별로 다르지 않다면 현대시조라는 명명이 무색하지요. 자기 복제로 현대시조를 붕어빵처럼 재생산하지 않으려면 현대적인 무엇을 시적으로 발화시켜야 합니다. 인식이든 표현이든 감각이든.
▶ 다음은 90년대를 대표하는 염창권 선생님과 김삼환 선생님께 공통으로 드리는 질문입니다. 우선 염창권 선생님께 묻겠습니다.
Q. 문학은 기본적으로 언어적 소통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민족적, 지역적, 언어적인 범주성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봅니다. 하지만 현 시대의 특징적인 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IT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아마 코로나 이후 ‘IT 시대’는 좀 더 전진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이 ‘IT 시대’에 현대시조의 ‘현대성’은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요?
A. 현대의 텍스트들은 다구조성 뿐만 아니라 다기능성을 목표로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술성을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중성에 호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바로 이를 입증한다고 보겠습니다. 한 가지 사안은 독립적이라기보다는 다른 사안과 반드시 연결된 경우가 많으며, 은유와 상징은 다차원적으로 실현됨으로써 의미의 심화와 확장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모든 일에서 혹은 작품에 나타나는 의미의 ‘중층성’은 현대인의 삶이 복잡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에 따라 창작이나 감상에 있어서 지적인 충동이나 참여 없이는 문학 자체를 향유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저는 다음의 두 가지 관점에서, 현대시조도 복합 양식 텍스트(multi-modal text)에 대한 인식과 적응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첫째는 1960년대 백남준과 밥 딜런(Bob Dylan)에서 읽을 수 있는 전환기적 사고입니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1963년에 시작하여 60년대 후반에 정점을 이루었고 동시대에 싱어송라이터인 밥 딜런의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포크송이 흘러나옵니다. 현대미술사에서 백남준은 다매체적 표현 방식을 도입한 선구자입니다. 저는 ‘IT 시대’를 대표하는 텍스트 현상은 바로 다매체성에 있다고 봅니다. 즉, 문자텍스트, 영상, 그림, 음악, 이모티콘, 기본 텍스트에 덧붙여진 하이퍼텍스트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다매체시대의 시조의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현대시조 제1세대 작가인 가람 이병기나 노산 이은상의 시조가 가곡에 실려 부르게 되면서, 가사의 1차적 대본으로 시조 형식이 부각 된 바 있으며 국민 애송 가곡으로 시조 가사歌詞가 다수를 차지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오늘의 시점에서는 가사로서의 시조의 활용은 미미한 실정이며, 대중성 확보뿐만 아니라 다매체성의 실현에도 소극적이었다고 봅니다.
반면에 코로나 이후로, 비대면 생활양식의 확대로 인하여 ‘IT 시대’가 앞당겨졌으며, 새로운 소통의 양상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즈음에 ‘시조는 혁신하자’는 가람 선생의 말을 재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내용 면에서, 가람 선생이 말한 ‘실감 실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현대적 생활양식의 수용, 휴머노이드 시대의 인간성 재발견, 젊은 독자층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 맥락적인 면에서 시의성의 확보, 개인적 서정과 집단적 서정의 차이와 중첩, 이 시대의 디아스포라에 대한 탐구 등의 면에서 현대적 ‘실감 실정’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표현 면에서도, 자기 예언적 에크리튀르(écriture)를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시조는 정형의 틀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표현의 도식에 함몰될 우려가 있으며, 이로 인하여 자기 반복적인 작품이 양산될 위험이 크다고 봅니다.
▶ 김삼환 선생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Q. 코로나 이후 ‘IT 시대’에 현대시조의 ‘현대성’은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요?
A.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사회자가 현대의 특징을 ‘IT시대’라고 정의한데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굳이 첨언한다면 IT의 힘에 의한 영상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화콘텐츠의 각 부문에서 문자보다 영상의 힘이 우위를 차지한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문자의 기반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니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현대시조의 현대성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 것인지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의 관심을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현대시조의 특징인 형식과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앞에서 문무학 선생님께서 시조 형식의 확장성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화두를 던져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별도의 논의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전통적인 시조의 형식은 이미 기존의 많은 논의와 인식의 기반 위에서 굳어진 상황입니다. 다소의 파격이 시도되고 있긴 합니다만, 그것은 큰 틀에서 보면 모두 시조의 형식 범위 내의 파격이라 할 것입니다. IT시대에 적절한 시조의 형식이 별도로 있을까 싶지만, 아무래도 단수시조의 발전 가능성은 많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IT시대, 영상시대에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어떻게 내용에 반영할 것이냐가 시조의 현대성을 살리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시조를 쓰는 시인들의 의식에 이러한 IT에 기반한 변화와 현대성을 어떻게 담아나가느냐 곧 변화의 시대에 어떻게 적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IT와 영상시대를 몸으로 체험하며 태어나는 순간부터 IT적 감수성을 갖고 살아가는 젊은 세대와 힘을 합쳐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IT적 감수성이 충만한 젊은 세대는 우선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성 시인들의 기준으로만 젊은 시인들을 판단한다면 점점 더 소통의 괴리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IT세대를 더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조를 창작하는 젊은 시인들을 발굴하고 육성하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시조의 IT적 현대성을 앞당길 수 있는 묘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IT에 기반한 현대시조의 현대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관한 토론은 실제로 현장에서 IT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이들 젊은 시인들이 앞에 나서야 명실이 상부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특별히 물리적으로 나이가 젊은 40세 이하 젊은 시조시인에게 될 수 있는 한 많은 영광과 행운이 돌아갈 수 있게 등단과 문학상 등에서 강제할당제를 도입하면 어떨까 합니다. 적어도 협회 주관 행사만이라도 그런 것을 한번 시도해보면 어떨까요?
▶ 다음은 2000년대를 대표하는 박성민 시인에게 묻겠습니다.
Q. 이번 질문은 앞 질문의 확장적 질문인 셈인데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는 문학 환경 안에서도 급속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 변화에 따른 시조의 존속과 활성화 방안에 대하여 한 말씀 해 주신다면 어떤 방안이 있을까요?
A.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따른 시조의 존속과 활성화 방안은 여러 측면에서 살펴봐야 할 사안인데, 시간 관계상 많은 유형을 거론하면 범박한 논의에 그칠 우려가 있으므로 한 가지에 집중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새로운 독자들의 요구와 SNS 시인들, 그리고 시조와의 관련성입니다.
저자의 죽음과 상호 텍스트성을 부르짖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수명을 다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용자였던 독자들이 생산자로 변화했고, SNS 시인들도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전문 창작자도 아닌 독자들이 시를 창작하면서 전문 창작인들보다 더 강력한 독자층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온라인에서 SNS 작가로 활약하고 있는 20대 청년 하상욱, 최대호, 김동혁 등은 생활 속 재미있는 소재로 재기발랄하게 짧은 시를 써서 공감을 얻고 있으며 수만 명의 팔로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 온라인에서 선보인 글들을 모아 펴낸 시집은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요즘 새로운 독자라고 할 수 있는 20~30대들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보거나 게임, 유튜브 영상물 등 멀티미디어에 빠져 심각하거나 심오한 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두세 줄, 길어야 5~6줄의 재치 있는 문장을 읽고 웃거나 공감하면서 열광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독자들이 SNS 시인들을 키우는 셈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하지 못한 생물들이 모두 멸종했듯이 문학이 폐쇄된 자기 영역에만 안주하여 새로운 환경을 비판만 한다면, 자본주의의 경쟁 논리 속에서 스스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도 공존합니다. 따라서 문학인들은 이제 어떤 방식으로든 대응방식을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문학의 독자성을 더욱 강조하면서 문학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것인가? 아니면 디지털 문학과 함께 호흡하면서 문학의 영역을 개방할 것인가?
이들이 쓴 글의 특성은 먼저 길이가 아주 짧다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단순성, 비속어 사용, 심한 감정 노출, 의미 없는 부호와 감탄사, 이모티콘의 잦은 사용 등을 특성으로 들 수 있습니다. 전문작가들의 눈으로 볼 때 시 쓰기의 초급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아무런 고뇌도 없이 써진 일상어를 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이들은 디지털 방식을 사용하여 대중들에게 문학에 대한 즐거움과 감수성을 제공하면서 신선한 자극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의 파급효과와 지속성에는 의문이 갑니다.
우리 시조단은 트위터가 지닌 형식적 특징 중 ‘140글자’라는 발신 정보의 제한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독자층들은 난해하고 긴 시보다 간단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짧은 시를 선호하는 경향도 감지됩니다. 일본의 하이쿠가 그렇듯이 현대시조가 해야 할 역할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시조, 특히 단시조의 3장은 단 3행의 짧은 시구로 현대인의 감성을 파고들 수 있으며 2수짜리 연시조도 100글자를 넘어가지 않습니다.
근래의 많은 자유시들은 시가 운문이라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듯 너무나 산문화되어 있으며 난해시를 씀으로써 독자들을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사오십 년간 자유시를 썼던 원로시인들조차도 현재 상황을 우려하고 있고 어떤 원로시인들은 시조집을 발간하는 실정입니다. 어떤 비평가들은 현대시조로 그 눈길을 돌리면서 시조가 기존 자유시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 시조단이 합심하여 노력해야 할 시점입니다. 크게 성공한다면, 자유시에 100년 가까이 내주었던 문단의 중심을 차지할 수도 있고, 그에는 못 미치더라도 문단의 한 축을 당당히 차지하여 시조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환경 변화는 시조단에 큰 기회의 시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 연대별 <공통질문>에 이어 이번에는 패널들 한 분, 한 분에게 <개별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 우선 정수자 선생님께 먼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Q. 선생님의 시조집 『탐하다』가 나온 이후 맹문재 시인은 선생님의 작품에 나타난 사회적 관심에 대하여 선생님의 작품관을 설명하고 있던데요. 선생님의 생각하는 ‘시조에서의 리얼리티의 확장 가능성’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A. 리얼리티에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다른 예술에서도 리얼리티는 중요하죠. 현실성 즉 리얼리티가 부여하는 그럴듯함으로 작품의 구조도 단단하게 하니까요. 시조의 문제로 종종 지적되는 추상성이나 피상성도 이런 리얼리티 결여에서 비롯되는 게 많습니다. 리얼리티는 현실인식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묘사와 진술을 핍진성을 일깨우며 표현의 문제를 환기합니다. 시조를 쓰며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애초의 발상과 세부묘사가 정형 안에서 현저히 졸아들 때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인식과 감각과 서정을 어떻게 정형의 묘미로 조화롭게 살려낼 것인가에 가중되는 고민이 있죠.
그 길에서 찾은 하나는 다의성으로 정형에 다층적 폭을 만드는 것입니다. 해석의 여지가 넓고 다양한 만큼 정형의 확장도 가능하려니 생각해서죠. 시어가 본질적으로 지니는 모호성을 정형의 확장에 활용하면서 시적 효과와 울림의 폭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물론 당면한 주변의 현실부터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 큰 바탕이니 그런 것들도 갖추고자 합니다.
흔히 관심은 관찰을 낳고 관찰은 관통을 이룬다고 합니다. 자신을 늘 추스르는 것은 ‘읽어야 쓴다’는 기본적 다짐입니다. 영화 같은 인접 예술에서 즐거운 충격과 새로움을 찾아보는 것도 시적 인식의 확장에 자극이 됩니다. 제멋 찾아 놀고 읽고 찾고 쓰기가 나름의 리얼리티 확장과 새로운 영역 발생에도 힘을 주려니 여기며 뒤처지는 자신을 벼리고 있습니다.
▶ 다음은 김삼환 선생님께 개별질문을 드리겠습니다.
Q. 시인마다 개인이 갖고 있는 특유의 언어습관, 특별한 정서, 사유체계 등을 통칭하여 그 시인의 ‘개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성이 시조 작품 창작시 어떻게 보편성을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개성과 보편성 중 김삼환 선생님은 어디에 더 중점을 두고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A. 개성과 보편성을 화두로 놓고 보면 4개의 다이아그램이 그려집니다.
첫째 개성은 월등하나 보편성이 미미한 경우, 둘째 보편성은 충분한데 개성이 보이지 않는 경우, 셋째 개성도 없고 보편성도 찾을 수 없는 경우, 넷째 개성도 충분하고 보편성도 충분하여 완벽한 작품일 경우.
가장 이상적인 작품은 개성을 충분히 살리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이런 작품은 평생을 두고 한두 작품 쓸 수만 있다면 행운인 셈이지요. 반면에 개성도 없고 보편성도 읽을 수 없는 작품이라면 발표를 하지 않는 게 도리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보편성은 충분한데 개성이 없는 시는 왜 써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내가 아니라도 남들이 다 쓰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개성이 월등하면서도 보편성이 조금이라도 확보되는 그런 시를 쓰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개성이 강한 시는 자기 자신만 알고 쓰거나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시를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은 제가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하는 역량의 한계를 노출하는 셈이지요.
▶ 다음 질문은 문무학 선생님께 던지고 싶습니다.
Q. 선생님의 시조집 『낱말』이나 『가나다라마바사』 등에 나오는 작품을 살펴보면 선생님은 언어를 가지고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작품을 많이 쓰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시조가 이 시대를 수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Martin Heidegger는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읽었습니다. 저는 외람되게 이 명제를 패러디해서 ‘언어를 시대의 집’으로 읽고 싶습니다. 말에는 시대가 실려 있습니다. 시대가 변하는 양상은 말로 나타납니다. 말을 따라가면 시대가 보입니다. 새로운 모든 것들은 말을 따라 태어납니다. 말 보다 먼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제 시적 사유가 말에 집중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낱말은 생성 소멸합니다. 생겨나는 낱말이 있고 사라지는 낱말이 있습니다. 생겨나는 말에도 사라지는 말에도 시대의 호흡이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태어나는 아이에 이름이 없을 수 없고, 핑계 없는 무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겨나는 낱말이 까닭 없이 생겨나며 사라지는 낱말이 뜻 없이 사라지겠습니까? 그 이유를 따져 들어가면 시대의 변화라는 말을 만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말, 말 그 속에는 세상을 쥐고 흔드는 낱말이 있고, 세상에 흔들리는 낱말이 있습니다. 그 말의 움직임에 마음을 얹으면 시대에서 크게 엇길 가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말들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낱말은 낱말 그 자체로 역사가 되고, 역사의 켜는 낱말로 쌓여집니다. 좋은 말이 쌓이면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고 나쁜 말이 쌓이면 부끄러운 역사가 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생겨나는 낱말들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걱정입니다. 말이 온전해야 세상이 온전해지고 말의 안녕이 나와 세상의 안녕이 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시대, 우리 언어도 백신을 맞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시조는 시절가조時節歌調입니다. 시대의 언어를 외면하고 시대의 노래를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시대를 품지 않은 노래는 그 시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낱말을 낳고 낱말은 시대를 각인시킵니다. 시조가 시대를 수용하는 길은 말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다음은 박성민 시인에게 묻고 싶습니다.
Q. 50년 전과 비교하면 시조 문예지의 확대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문예지가 개성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작품을 발표할 문예지가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박성민 시인은 시조 문예지의 앞으로의 지형과 방향성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A. 시조 문예지의 지형과 방향성에 대해 진단하기 전에 오늘의 문예지 사정을 잠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요즘은 문예지가 너무 많은 시대라고들 합니다. 너도나도 문예지를 하려고 한다는 비난 섞인 말속에는 문예지를 통해 문단 권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는 비판의 어조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한 권의 문예지가 발간되기까지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보면 발행인의 문학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인정해야 합니다. 《창작과 비평》, 《문학동네》, 《문학과 사회》와 같은, 소위 메이저급의 문예지들도 공급에 비해 수요층이 예전 같지 않은 시점인데, 다른 문예지의 경제적 사정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현재 시조에 지면을 내주는 문예지는 《시산맥》, 《서정과현실》, 《현대시학》, 《시와문화》, 《상상인》, 《열린시학》, 《다층》, 《한국동서문학》, 《문학청춘》 등입니다. 그리고 시조를 주로 다루는 문예지는 《시조시학》, 《정형시학》, 《좋은시조》, 《시조21》, 《시조정신》, 《정음시조》, 《시조미학》, 《오늘의시조》, 《개화》 등입니다. 그 외 몇 개의 시 문예지들은 시조라는 구분 없이 청탁하곤 합니다.
시조 문예지는 시 전문 문예지에 비해 양적인 결과물이 적지만 꽤 오랜 시간 시조에 대한 애정을 담아 온 잡지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조 문예지가 시조를 쓰는 작가들끼리만 공유되는 책이라면 이 문제는 충분히 고민의 가치가 있습니다. 갈수록 종이책이 읽히지 않은 시대, 더구나 전통시가라는 인식이 강한 시조를 다루는 문예지가 일반 독자 혹은 평론가, 자유시를 쓰는 시인들과 소통되지 않는다면 문예지가 지향하는 원론적인 목적과 지향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조단은 물론 시조단 바깥의 독자들로 하여금 시조 문예지가 소통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변화와 혁신이 필요해 보입니다.
시조 문예지를 펼치다 보면 시인들의 작품 발표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조에 대한 학술적 고민을 공유하는 기획 특집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집중 소시집, 시인 특집 등과 같은 여러 이름으로 시인들에게 작품 발표 지면을 지나치게 할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조를 쓰는 시인들에게는 폭넓은 발표 공간을 제공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다수의 독자들과 소통이 되는 문예지인가에 대한 물음에 흔쾌한 답변은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여, 당대의 문학 담론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의 자리가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문예지의 공간은 시인들의 작품 발표 지면 외에도 시대의 이슈를 진단하고 인문학적으로 사색해 보는 기획 특집 평론이나 좌담, 당대의 문학적 이슈와 사건 등을 조망해 보는 평론, 작고한 문인들에 대한 연구나 시조 동인에 대한 논의 등 학술적 연구에서부터 문학적 담론을 이야기하는 자연스러운 산문까지 아우르며 기획을 한다면 양적, 질적으로 풍성한 문예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시조는 소재나 주제, 기법이 자유시에 비해 다양하지 못합니다. 자유시가 낭만주의 시, 경향 시, 순수시, 모더니즘 시, 생명파의 시, 초현실주의 시, 자연 시, 저항 시, 리얼리즘 시, 참여시, 민중 시, 환경 시, 생태 시, 극서정시 등 어떤 사조에 대한 반발이나 보완으로 발전해 왔음에 비해 우리의 시조는 그러한 경로를 거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미 1960년대에 자유시에서 활기차게 제기했던 순수냐, 참여냐의 논쟁과 같은 분위기도 연출해내지 못했습니다. 자유시는 생산적인 논쟁을 통해 분열된 것이 아니라 김우종, 이형기, 김수영, 이어령과 같은 거물급 문인들을 스스로 배출해 냈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사상계》라는 월간 종합 잡지가 해냈습니다. 그 뒤에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이라는 상반된 성격의 두 잡지도 서로 다른 성격의 독자층들을 수용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문단의 쌍두마차로 군림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권혁웅 평론가에 의해 주도된 미래파 논쟁은 또 어떤가요?
우리 시조단에서는 생산적인 논쟁이 부족하고 이를 통해 상호 발전해가는 전략도 없습니다. 자유로운 발상과 전략, 생산적인 논쟁은 지금과 같은 엄숙한 위계질서와 등단을 서열로 고착화하는 분위기에서는 나오기 힘듭니다. 이런 생산적인 논쟁의 장을 열어주고 그것을 통해 발전해 나가는, 중차대한 사명을 맡아야 하는 것이 문예지일 것입니다.
많은 시인의 발표 공간도 중요하지만 이와 함께 읽고 싶은 문예지를 만드는 것이 훗날 문예지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연구하는 작업에도 큰 성과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1920년대 《창조》, 1930년대 《시문학》, 1970~80년대 《창작과비평》 등을 읽고 시대사의 연구가 가능하듯이 시조 전문지가 그 역사를 만든다면 문예지 자체만으로도 연구의 텍스트가 되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시조시인협회 기관지인 《시조미학》의 기획 평론은 이 시대 담론을 공유하는 소중한 가치라 할 것입니다. 이 시대 담론과 문학적 성찰을 공유하면서 소통하는 문예지가 된다면 시인들의 작품도 더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지한 문학적 담론이나 토론이 있는 문예지는 보관하고 싶은 문예지. 다시 읽고 싶은 문예지, 소개하고 싶은 문예지로 그 존재 가치를 발휘할 것입니다.
▶ 다음은 염창권 선생님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Q. 선생님의 시조 평론집 『존재의 기척』에 보면 ‘삼장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시조 형식의 현대적 의미를, 삼장을 토대로 한 의미결속에서 찾고자 하였던데요. ‘삼장 선언’의 의의와 전망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A. 저는 새로운 소통의 형식으로 ‘삼장’을 제안하고, 그 의의를 밝힌 바가 있습니다. 사실상 자유시나 산문체인 수필은 표현 형식으로써 자기완성에 이르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외적 형식을 통해서 예단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여 정형시는 장르 규약에 의하여, 표현과 전달 면에서 신뢰감을 높이고 형식적 완결이라는 권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봅니다.
앞에서 말씀해주신 토론자들께서도 저와 같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기에,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아서 제가 정리한 것이 ‘삼장 선언’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목격해 온 바, 언론이나 정치권 등에서 일어나는 일로, 파편화된 말이나 정보를 통해 상대의 견해를 왜곡하고, 폄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3장이라는 짧은 형식의 완결된 텍스트를 통해 개인의 의사를 완전성 있게 소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를 지식인 계층의 교양적 지표로 삼게 될 경우, 자신의 품위를 위해서라도 3장의 형식적 완결 장치를 소통의 코드로 활용하게 될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는 표현 방법으로서 3장三章형식의 도입은, 파편화된 삶을 조립하여 자아 정향을 확보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는 예술을 떠나서 생활인의 철학을 담은 새로운 표현 형식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시조’와는 달리 ‘3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3장에 관한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 이 형식을 익숙하게 사용하다 보면, 처음에는 시조의 독자층으로 수용되었다가 나중에는 창작자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상정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은 우리 협회원이라면, 통념으로 받아들일 만한 내용입니다. 대다수가 알고 있지만, 실행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평범함 인간으로서 자기 한계를 벗어나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범성을 뚫고 등장하는 후배 시인을 기다리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젊은 시인들을 많이 응원해주는 시조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예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토론을 마치고 오늘 토론을 열심히 들으신 선생님들 중에 질문이 있으면 받겠습니다.
Q. 시조를 쓰고 있는 조안입니다. SNS시대에 맞추어 단장시조 쓰기에 공감이 많이 갑니다. 대중성이 있으면 시가 짧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 시조가 단장시조로 간다면 기존의 시조단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리고 단장시조는 어디에 발표할지 궁금합니다.
A. 단장시조를 우리 시조단 전체가 쓰자는 주장이 아닙니다. 단장시조로 표현해서 효과가 있는 것은 그렇게 쓰자는 주장입니다. 주제와 내용에 따라 형식의 범위를 넓혀 보자는 의미이지 단장시조를 꼭 쓰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고 단장시조를 투고하면 안 실어주는 문예지도 있습니다만 협회에서 발행하고 있는 《시조미학》은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단장시조를 쓰셔서 시조집으로 발간하길 권합니다.(문무학)
▶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어 더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마지막으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번 토론회를 통해 느낀 점을 문무학 선생님과 정수자 선생님께서 대표로 간단히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함께 시조의 내일을 꿈꾸는 토론이 되어서 기쁩니다. (문무학)
독자들이 시조집을 사들고 와서 함께 통독하는 그런 날을 꿈꾸어 봅니다.(정수자)
▶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토론회를 모두 마치려고 합니다.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목포문학관과 패널로 참석해 주신 다섯 분의 선생님, 그리고 한국시조시인협회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시조를 사랑하는 한 시조는 계속 발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끝까지 함께 해 주신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