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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이 작품의 작자인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무덤 앞에 새겨진 묘비명의 구절이다. 작자가 만났던 ‘자유인 조르바’와의 행적을 토대로 창작된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라고 하겠다. 이미 오래 전에 앤서니 퀸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전에 직접 읽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국내에서도 <희랍인 조르바>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것으로 기억된다. 오랫동안 마음만 먹었던 이 작품을 이번 기회에 그리스어 원작을 바탕으로 번역된 판본으로 읽을 수 있었다.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이라는 부제가 원저의 제목이지만, 번역자는 영화와 기존 번역본들을 통해 잘 알려진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목으로 내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작품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조르바’라는 인물은 실존 인물이며, 작자가 그와 겪었던 행적들이 소설 내용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기존의 어떠한 권위와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는 조르바의 형상을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듯하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크레타에서는 아니지만, 작자인 카잔자키스가 조르바와 함께 갈탄광 사업을 함께 했다는 것도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부분적으로 작자에 의해 새롭게 형상화된 면모가 적지 않겠으나, 조르바를 형상화하는 주요 내용은 카잔자키스에게 각인되었던 조르바의 생각과 행적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해된다.
이 작품은 작자의 분신이라고 여겨지는 1인칭의 ‘나’가 주요 등장인물이면서, 내용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최고의 미친 짓을, 삶의 본질을 “행하라!”고 소리치는 내 영혼을 꼭 붙잡고 그렇게 하지 못한 내 삶’과 달리, ‘도덕과 관습이라는 탈을 벗어던지고 먼 여행을 함께 하자고 울부즞던 조르바’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프롤로그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내용이 그를 위한 ‘추도사’임을 프롤로그 말미의 ‘오늘이 그의 추도식 날’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영혼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던 ‘나’에게 도덕과 관습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거침없이 행동하는 조르바의 생각과 행적은 그야말로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아마도 작자 내면에 깊이 간직하고 잇던 하나의 이상이 조르바로 형상화된 것이라고 한다면, ‘나와 조르바’는 작자인 카잔자키스의 서로 다른 자아의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듯하다.
고향인 크레타로 돌아가 갈탄광 사업을 하려고 배를 기다리던 ‘나’가 조르바와 우연히 만나, 사업의 동반자로 동행하는 것으로부터 작품은 시작된다. 사업가로서 고향에서 모든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나’와는 달리, 조르바는 어떤 제도와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생각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존재이다. 그는 여관의 주인인 마담 오르탕스와 사랑을 나누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을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조르바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가 살아온 행적과 생각들을 소개하고, 조르바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지만 기존의 관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모습들이 비교되고 있다. 다른 한편 크레타 사람들의 형상과 삶의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조르바의 자유로움에 대비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하겠다.
카잔자키스는 ‘평생 자유를 위해 투쟁했고 인간 구원의 문제를 깊이 사색’했던 작가였다고 한다. 묘비명에 새겨진 것처럼 ‘자유’를 갈망했던 그였기에, 조르바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생각 일단을 표출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하겠다. 끝내 실행하지는 못했으나, 작자가 추구했던 삶의 이상을 조르바라는 인물을 통해서 표출하고자 했다고 이해된다. 작품의 말미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카잔자키스는 이 작품을 45일 만에 탈고한 후에 조르바의 부음을 전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3년에 걸친 탈고 작업을 거친 후에 출간했고, 이 작품을 통해서 ‘조르바’는 자유로운 영혼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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