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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3∥시인정신 계간평
시의 본질 -시, 고독한 영혼을 위한 진혼곡
이 동 희 (시인․문학평론가)
현대인들은 외로움을 싫어한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라 한다. 아마 고대 원시인들도 그랬을 것이다. 울산에 있는 암벽화도 그렇고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그림들을 봐도 그렇다. 사람들은 심심하면 견딜 수 없어라 한다. 심심함을 잊고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재미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심심파적破寂이라 한다. 고유어 ‘심심’에 한자어 ‘파적’이 붙어 이루어진 말로써 그 쓰임이 꽤 오래된 성어인 듯싶다. 심심하고 무료한 상태를 깨뜨리고자 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단애의 암벽에 바위그림을 그린 원시인들도 심심파적하기 위해 그런 노고를 감내했을 것이고, 무덤의 벽에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한 것도 외로움을 달래려는 뜻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석기시대의 원시부족들도 심심파적으로 한 거대공사가 있다. 전북 고창에 있는 수많은 고인돌-지석묘를 보고 생각한 것이다.
현대의 중장비를 동원해도 그리 녹녹치 않은 거대한 바위를 묘 자리까지 옮겨오기 위해 기울였을 고대인들의 노역은 단순히 원시신앙의 모습이나 부족장의 명령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기에는 뭔가 성에 차지 않는 면이 있다. 고창에는 1600기가 넘는 고인돌이 집약되어 있다. 그 많은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 동원되었을 고대인들 역시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려는 심심파적의 일환이었다고 보아야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이런 심심파적한 결과가 현대인들에게 고대와 옛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암각화나 고분벽화, 그리고 고인돌 유적지들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들이게 되었지만 당대에 위험한 절벽에 매달려 돌칼로 바위를 새겼던 조각가들이나, 어두운 무덤의 높은 천장에 그림을 그렸던 화공들이나, 거대한 암석을 운반하여 옛무덤을 조성했던 석공들의 작업 동기 역시 고독한 시간과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당대의 인간들이 심심함이라는 시간의 외로움을 지우는 작업의 결과가 우리가 마주하는 유적이 된 셈이다.
고대인들은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으로 자연에 자취를 남기는 방법을 택했음을 알 수 있다. 자연과 살며, 자연에서 놀며, 자연 그 자체가 되었던 원시-고대인들의 외로움을 극복해낸 방법들이 지금 생각해 봐도 매우 현명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견고한 돌과 바위, 깊은 무덤과 거대한 암석을 매체로 한 외로운 작업들을 통해서 옛사람들은 외로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오래 사는 방법을 터득해 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현대에 접목시켜볼 때 그 효과는 더욱 선명하다. 현대인들 역시 심심파적을 삶의 중요한 동기로 삼고 있다. 단 현대인들이 심심하고 외롭고 고독한 경지를 깨뜨리려는 심심파적의 수단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현대인들은 인위적이고 인공적이며, 순간적이고 찰나적이며, 말초적이고 즉흥적인 재미-쾌락으로 외로움을 달래려는 경향이 있다. 현대인의 병폐를 드러내는 현상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인터넷 중독, 홈쇼핑 중독, 게임 중독,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증권 중독, 경마 중독, 경륜 중독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중독 증상에 현대인들은 시달리고 있다. 설사 중증은 아닐지라도 중독이 의심이 갈만한 증상까지 합친다면 현대인들은 거의 무엇인가 한 가지 이상의 중독 증상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건강한 생활을 위한 필수요소인 운동마저도 요즘에는 운동 중독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건강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운동을 위한 운동에 빠져서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심리적인 불안과 정신적인 혼란을 겪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운동이 건강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으로 인하여 건강하지 못한 지경에 빠진 것이다.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이 된 TV도 심각한 중독요소가 되었다. 애국가를 들으면서 TV를 켜고 애국가를 들으면서 TV를 끄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24시간 종일 방송체제로 바뀐 요즘에는 TV 중독자들이 어떻게 대처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 밖에도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든지, 가임여성들도 자신의 아이들이 장차 살아갈 열악한 사회 환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출산을 포기한다는 비율이 50%에 육박하여 출산율이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낮다든지, 노인들이 생활고와 말년의 고독한 생활을 스스로 청산하려는 노인 자살률이 세계 최고라는 등 불길한 통계들이 고독한 현대를 증명한다.
이 모두가 외롭고 쓸쓸하며 고독한 현대생활이 낳은 병폐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손대기 시작한 비자연적인 방법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움-고독을 극복하기는커녕 고독에 지는 결과에 이른다. 고독은 피해야 할 악성 병균이 아니라, 잘만 길들이면 창조적 결실을 낳는 훌륭한 유익균이 될 수 있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고대인들의 유적이 그것을 입증한다. 현대인들이 겪는 중독 증상들은 고독을 극복하거나 고독과 친해지는 방법이 아니라, 고독이 두려워서 피하고 달아나는 방법이다. 고독은 극복하고 상생하도록 길들일 때 시간을 뛰어넘는 창조에 이를 수 있고 피하고 달아날 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 고독의 심술이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G.바우만『고독을 잃어버린 시간』31쪽에서)
‘철들자 노망든다’고 필자의 짧지 않은 일생을 돌이켜보면 고독과 맞섰을 때가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추억거리가 되지 외로움이 싫어서 회피한 과거로부터는 쓰디쓴 후회의 아픔만 느낄 뿐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그래도 향학의 꿈을 키우고, 가난한 주경야독일지라도 줄기차게 학교 근처를 맴돌았던 고독과의 싸움이 오늘의 나를 바로 서게 하였음을 실감할 때마다 실소를 머금게 된다.
육체적으로는 조금은 배가 고픈 경지에서, 정신적으로는 뭔가 결핍을 실감하는 상태에서, 심리적으로는 외롭고 쓸쓸해서 자신마저 가눌 수 없는 고독감에 휩싸일 때 창조는 가능하다. 몸의 기능이 정신적인 상태와 조화를 이룰 때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운동선수들도 이런 외로움과 결핍을 느낄 때 최고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어찌 스포츠맨뿐이겠는가? 기교와 정신이 최고의 상태에서 조화를 이룰 때 창작이 가능한 예술가들도 이런 조건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송창식이라는 대중 음악가는 낮과 밤을 거꾸로 생활한다는 고백을 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 창작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밤이 주는 적막감과 고독감에 흠뻑 빠져서 창작에 몰입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어느 클래식 연주가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위를 철저히 비워두지 않고서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한다. 어느 화가 역시 낮에는 빈둥거리다가 고요가 찾아드는 밤이 되어서야 텅 빈 위장을 차가운 냉기로 채우고 비로소 붓을 든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예술가들에게 결핍과 외로움은 아픔을 낳는 악성 병균이 아니라, 창작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점은 공개된 비밀이다.
그런 고독한 작업의 가장 치열한 곳에 시가 있고, 그 주체로서 시인이 있다. 모든 시는, 그러니까 기쁨을 최고조를 끌어올리기 위해 지어진 경축의 시까지도 그 출발점은 상실과 아픔, 외로움과 고독한 서정의 맥락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통점痛點이네, 비극적 정조情操네, 고통의 형상화네 여러 가지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 중핵은 외로움과 고독한 정서의 변주를 일컫는 말일뿐이다. ‘그 속에 한 조각의 애처로움도 없는 시는 쓰이지 않는 편이 낫다’(오스카 와일드)는 지적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아픔에 대한 성찰이 없는 시는 필연적으로 아파하지 않거나,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의 소산일 터이므로 고독한 사람의 내면에 아무 울림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이 중독에 빠질 수 없어서 시를 읽는다. 외롭고 쓸쓸해서 시를 읽고 쓰는 것이 아니라, 외롭고 쓸쓸함 자체가 시를 이루는 질료가 된다. 고독한 사람이 시를 쓰고 읽는 것이 아니다. 고독함이 시를 읽고 쓴다. 고독은 방편이 되지 못하고 고독이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시문학은 고독이 낳은 외로움의 힘이다. 그 쓸쓸한 힘이 비로소 육체적 허기를 이기게 하고, 정신적 공허를 메우게 하며, 심리적 허무를 극복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런 시만이 존재의 이유가 있다.
외로움을 방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것을 지우고 떨어내기 위해 다른 방편을 도입한다. 그것이 중독을 낳는다. 손에서 잠시도 떼어놓을 수 없는 스마트폰의 스마트하지 않는 중독 역시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낳은 현대병이다.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하루 종일 허송세월하는 사람들 역시 외로움이 방편이지 외로움 자체가 되지 못한다. 즉 주체적 고독을 직시하지 않고, 방편적 고독에만 몰입하다가 주체를 잃는 경지가 바로 중독으로 나타난다.
시는 철저히 고독한 주체가 낳은 애처로움에 대한 미학적 위안이다. 그것이 세상에 맞서 싸우다 얻는 상처였건, 혹은 스스로 입은 내상이건 고독은 방편이 아니라 생존의 주체가 되어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 슬픔의 샘을 파고 또 파들어 간다. 그것이 시의 세계요, 그런 작업자가 바로 시인이다.
중독되지만 않는다면 외로움과 쓸쓸함이 얼마나 많은 창조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는가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세계가 바로 시문학의 세계다. 철저히 고독한 주체가 될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아름다움을 위하여 오늘도 시인들은 밤과 벗하며, 어둠을 태워 시의 촛불을 켜들고 있는 것이다.
내 詩의
발바닥
너무 단단하다
네가 손 흔들고 있는
바위산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
-김순일 「山羊에게」 전문 시인정신 2012 가을호
철강은 강하다. 강한 것은 독재다. 독재는 반생명성이다. 딱딱한 것은 부드러움의 상대역이다. 강하고 딱딱한 것은 부드럽지 않다. 부드럽지 않은 것은 죽은 것이다. 죽은 것은 딱딱하다. 단단하여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현실의 암벽에 단단한 발바닥으로 오를 수는 없다. ‘내 시의/ 발바닥’은 단단하지만 그 발바닥이 담고 있는 ‘산양의 시’는 부드럽다. 부드러운 시를 감싸고 있는 산양의 시는 친생명이다. 그 단단한 발바닥을 지니고서 산양은 산의 정상에 아무렇지 않게 오르내릴 수 있다.
시인의 비극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시인의 고독은 방편이 아니다. 본질이요 주체로서의 외로움이다. 산양은 저렇게 단단한 반생명성의 발바닥으로 친생명성인 자연의 삶을 산의 정상-삶의 최고경지에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올려놓는데, 산양처럼 단단한 발바닥으로 감싸고 있는 ‘나의 詩’는 그렇게 삶의 최고 경지에 오르지 못해 쓸쓸한 것이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고 저주받은 양식이다. 시는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옥타비오 파스) 내 시의 주체를 드러내면서 산양의 세계를 창조한다. 내 시는 단단한 발바닥의 고독에 닿아 있으나, 그 부드러운 생명의 본질은 시라는 생명성이다. ‘단단한 발바닥’으로 내 시와 산양의 세계와 결합시키면서, 동시에 격리시킨다. 오를 수 있는 산양과 오를 수 없는 내 시의 비극적 결합이자 격리된 세계다.
시가 고독을 방편으로 여기면 ‘손 흔들고 있는 바위산’을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시인도 그렇지만 시도 고독을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안고 있는 한 (정상에 오르는 일을)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시는 선택받은 자(시인)들의 빵이고 저주받은 양식이 된다. 고독으로부터 도망가고 회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고독을 방편으로 여겨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중독이 아니다. 시는 영원히 고독한 주체가 의미 있게 실패하는 노래다.
너의 향기로 나는 눈떴다
행복한 눈뜸을 꿈이라고 말할 때
사랑은 푸르게 날개를 달고
절망이란 깊은 강 건너갈 수 있게 용기로 오는가 보다
바라만 보았고 슬픈 마음 깊이 잠겨 있어도
느낌으로 알고 있지, 네 심장 박동소리
알아도 몰라도 가깝고 멀어도
외따로 살고 있는 나를 지켜보는 너
우는 듯 웃는 듯 조용한 나를 바라보는 너
기댈 수 없어도 기댈 수 있어도
이 하늘 이 땅에 살아있음만으로도
사랑은 놀라운 힘이 되는가 보다
사랑은 강인한 날개를 기르고
절망이란 높은 벽 넘을 수 있게 꿈으로 오는가 보다
내 마음 세계지도엔 사랑하는 조국과 영혼의 고향
우리아버지 처음으로 주신 희망이란 말 살아있다
북극성은 너의 별자리, 지금 나는 웃고 있다
나도 너처럼 큰 꿈 지녀 살아가련다한다
꿈은 수만 개의 절망 넘을 수 있게 사랑과 향기로 오는가 보다
-황영순 「너의 향기로」 전문 시인정신 2012 가을호
고독을 잃어버린 자리에는 절망이 찾아온다. 쓸쓸함으로 말라버린 샘에는 건조한 실망만이 고인다. 외로움에 한숨짓는 서녘하늘에는 불길한 기운이 물든다. 그러나 고독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고독한 시간을 아주 외면하지 않는 시간의 틈을 허용하는 한 고독의 자리에 희망이 찾아오고, 쓸쓸함의 샘에는 살뜰한 그리움이 고이며, 외로운 서녘하늘엔 황홀한 노을이 물들기 마련이다.
고독한 시간을 놓지 않고 함께 하느냐, 아니면 고독한 시간을 잃어버리고 놓아버리고 쫓아버리고 외면하느냐에 따라서 고독은 창조의 원동력이 되거나, 상실의 저주가 되기도 한다. 시는 고독한 시간을 최대한 주체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고독을 방편으로 여기는 자는 생활의 창고에서 환락과 쾌락의 도구를 찾아들고 중독의 길에 나서며, 고독 그 자체가 되는 자는 시의 그늘에서 아득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불러들인다.
‘너의 향기’로 은유된 원관념이 ‘꿈’이었음을 시의 결구에 드러내면서 시적화자는 고독하게 행진한다. 그런 외로움으로 내 딛는 발걸음마다 꿈이 서려 있음을 알게 한다. 꿈이 이루는 파장이 하도 드넓어서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비극적 통점이 분산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래도 화자의 고독은 ‘절망을 넘을 수 있는 꿈’을 향해서 줄기차게 행진한다.
‘너의 향기’로부터 출발해서 ‘꿈’에 이르는 과정에 부딪치는 고독은 대립적이거나 상호작용하는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진행한다. 이를테면 “알아도↔몰라도, 가깝고↔멀어도, 우는 듯↔웃는 듯, 기댈 수 없어도↔기댈 수 있어도, 이 하늘↔이 땅” 같은 모습이다. 이런 시적 진술은 필연적으로 ‘절망↔희망 : 기쁨↔슬픔’이라는 대립 항을 형성하는 정서가 내면에 자리 잡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는 역할에 충실하다.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시의 모습이라는 옥타비오 파스의 시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 같다. ‘우리아버지가 처음으로 주신 희망이란 말’처럼 고독을 방편으로 여기지 않고 고독 그 자체로 사는 시인된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늘 살아 있는 말일 터이다. 그런 희망이 온존하지 않아서 쓸쓸하고 외로우며, 슬프고 아픈 것이다. 희망이 온존한 세계와 사람들은 고독하지 않다. 그것이 온존하지 못한 사람들, 희망이 항상 절망의 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과 그의 시간, 슬픔이 기쁨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주저하는 사람과 시간들에서 우리는 시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시는 구원의 힘이자 격리시키면서 결합하는 힘을 발휘한다. 고독을 문전박대하지 말자. 외로움을 저 홀로 버려두지 말자. 쓸쓸함에 결코 지지 말자. 고독한 사람에게서 시인의 영성이 싹을 트고, 외로운 시간에 영혼이 별빛을 비쳐주며, 쓸쓸함에 가슴 아픈 순간을 노려서 진실한 아름다움이 내 삶의 창문을 두드릴 것이다. 시의 세계가 그렇다.
꿈의 변주양식으로 보인 것이 ‘사랑’이다. 꿈과 사랑이 별개의 정서인 것 같지만 실은 동일한 이음동의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꿈의 구체적인 실체가 사랑이어야 하며, 사랑이 막연하게 그리는 마음그림 자리에 꿈이 자리 잡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연거푸 거론되는 사랑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은 꿈의 변주양식을 항상 긍정적으로 지니고 있는 시인의 내면풍경을 드러낸 셈이다.
앞에서 열거한 대립 항에서 긍정적인 측면의 꿈의 색깔이 바로 사랑과 접맥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꿈은 푸르고 강하며, 놀라운 힘이고 강인한 날개이며, 사랑과 향기라는 제재를 형상화하는 맥락으로 귀결된다. 고독한 사랑을 꿈꾸는 자의 종착점이 바로 북극성의 별자리에서 웃고 있는 고독한 주체다. 고독한 영혼을 위한 사랑의 진혼곡이 바로 북극성 별자리로부터 들려오는 듯하다.
어머, 저 여자, 가시 돋친 욕정이 없었다면, 생마저 구차했으리, 저 가벼운 몸웃음 흘리며, 가슴 속 투덕이는 불덩이, 어쩌지 못해, 뭍에 숨겨둔 정부情夫와, 옹골지게 딴 짓하다 들통난 대낮,
어머, 어머, 저 여자, 타래감긴 분통. 끓어올라, 짠바람에 절여진 웃통, 냅다 벗어던지고, 그래, 화냥년이다, 오늘 너 죽고, 막판 나 살자, 이빨 짱짱, 눈 딱 감고, 머리 치밀다 치밀다, 된통 얻어터진,
한주먹 화끈한 핏덩어리,
-김기찬 「해당화」 전문 시인정신 2012 가을호
외로움에 저항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외롭고 쓸쓸한 심사를 입을 즐겁게 해서 해결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 비만은 필수 코스다. 외로움을 스스로 바람자락에 의지해 해결하는 사람도 있다. 자유분방함이 그의 캐릭터지만 겉으로 웃고 속으로 울기 십상이다. 바람은 항상 부는 것이 아니다. 멀쩡한 나뭇가지를 찢어놓고도 이내 잠잠해지는 것이 바람의 속성이다. 쇼핑 중독이네, 컬렉션 중독이네 하는 것들도 외로움에 대항하는 서툰 방편이기 마련이다. 고독을 잊기 위한 방편이 결국은 자신을 집어삼키기 십상이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 치맛자락 휘날리는 여인은 고독한 화냥기를 지닌 여인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화냥기를 잠재우지 못해서, 가시처럼 돋치는 욕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서,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불두덩 같은 외로움의 덩어리를 어찌하지 못해서 여인은 벌건 대낮에 그 딴 짓을 하다가 들통을 내고 만다. 비록 화냥기를 참지 못해 오늘 죽을망정, 그리하여 막판에 나 죽고 너 살망정 눈 딱 감고 한 주먹 얻어맞아 눈퉁이가 밤퉁이가 될망정 ‘한주먹 붉은 핏덩이’를 쏟아내야 풀릴 욕정의 화신이다.
“사랑은 내용과 형식 그리고 질서를 중요시한 세계의 덕목 속에서도 감성과 자유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낭만성의 덕목이기도 하다. 때문에 객관적이 아니라 개성적이며, 이성적이 아니라 감성적이며, 원칙적이 아니라 항상 변칙적이다. 게다가 도덕성이나 법질서를 뛰어넘어 자연 발생적이며 동시에 본능적이자 공격적이다.”(송수권 「사랑의 몸시학」 12쪽에서)
김기찬 시인이 바로 몸시학의 정통을 향하여 칼을 빼든 형국이다. 한 떨기 해당화를 갈가리 짓이기고 바수고 비틀고 새롭게 분칠하고 낯설게 색칠해서 화냥기 가득한 사랑의 화신을 만들어 놓았다. 사랑이 지닌 형식과 내용의 특성에 충실한 재탄생이다.
마음그림쟁이imagist가 즐겨하는 고급 취향의 몸사림이 아니라, 몸시학에 충실한 살 냄새 짙은 몸의 언어를 구사한다. 이보다 개성적이고 화냥기 농후한 해당화여인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으랴, 이보다 감성적인 색녀色女를 어디에서 조우할 수 있으랴, 이보다 변칙적인 사랑의 교태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랴! 그래서 사랑의 형식과 내용은 항상 사람마다, 사랑마다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그래야 사랑이다. 육법전서대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다. 남의 눈치 보며 나누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시늉이다. 감추고 숨기고 내숭 떠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간보기다. 간보기로 언제 농축된 사랑의 절정에 닿을 수 있겠는가, 언제 고독한 사랑의 결핍을 메우겠는가?
해당화는 전혀 새로운 사랑의 형식과 내용을 지니고 우리 앞에 ‘한주먹 붉은 핏덩이’를 토해내고 있다. 해당화를 통해서 욕정에 불타는 여인의 치마 속을 넘보며, 바람기 농후한 여인의 교태를 느끼며, 가시 돋친 해당화에 다치지 않으려 내 몸 사리는 동안 시는 고독한 주체를 미감의 실체로 바꾸어 놓는다. 잠시나마 꿈꾸었던 바닷가 정사에서 깨고 나면 또 다시 밀물처럼 밀려올 고독한 현실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시인과 시의 독자가 만나는 외로움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G.바우만이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고독한 시간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의 삶을 전혀 새로운 용기와 기쁨으로 충전시킬 자격을 얻게 되는 외로움이다. 그래서 시는, 더구나 농익은 사랑의 시는 고독한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곡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이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고독한 시인을 만든다. ‘내가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만든 것이다.(괴테)’ 고독한 시는 시인의 영혼마저 바꿔놓는다.
지렁이 한 마리가
제 몸을 오므렸다가 펼쳤다,
불 땡볕 계단 위를 올라가고 있다.
포탈궁을 향해 온몸으로
돌밭을 기어오르는
티벳 승려모습이다
미끈거리는 붉은 살점으로
제 몸의 물기를 바싹바싹 말려가며
낙산사, 저 높은 해수관음보살상을 친견하려고
뜨거운 돌계단에 머리를 박고, 꾸불텅
몸부림치며 오르고 있다
‘다음 生엔, 지렁이 몸 벗으려고’
불땡볕 돌계단을 티벳의 승려 한 분이,
오체투지五體投地
고행을 하고 있다.
-권정남 「오체투지五體投地」 전문 시인정신 2012 가을호
여름날 뙤약볕에 말라죽은 지렁이를 볼 때마다 저들의 속내를 몰라서 안타까웠다. 이제야 알았다. 저들도 땅속 어둠이 외롭고 쓸쓸해서 해수관음보살상을 만나보려는 몸부림이었음을 알았다. 불은佛恩을 입으려는 몸부림의 끝이 윤회에 닿던 말건 지렁이는 줄기차게 땡볕의 돌계단을 올라간다. 고독은 힘이 세다. 외로움을 피하지만 않는다면, 땡볕에 머리를 처박고 뜨거운 돌계단을 올라갈 만큼 고독은 힘이 세다.
고원의 나라 티베트 각 지역에서 삼보일배三步一拜 느린 걸음으로 수개월에 걸쳐 포탈라 궁을 향하는 참배객을 다큐멘터리로 보며 한없는 연민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그것을 인류애 혹은 인류애적이라는 애매모호한 감정의 색채를 ‘的’에 묻어둬야 할지 내 감정을 의심한 적이 있었다. 춥고 바람 거센 고원지대에서 노숙하느라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요, 삼시세끼 거친 식사를 해가며 ‘저렇게까지 해서…’ 입으려는 부처님 은혜가 뭘까 매우 궁금한 적이 있었다.
이제야 알았다. 다음 生엔 지렁이 몸 벗으려는 것임을 알았다. 오체투지는 온몸을 땅에 닿게 하는 절拜이다. 두 손을 땅에 짚은 다음 무릎을 굽히고 발끝에서부터 두 팔을 머리 위에 뻗어 온몸을 땅에 밀착시킨 다음 역동작으로 다시 일어서는 일련의 과정이 한 번의 절[오체투지]이다. 자벌레가 자신의 몸의 길이만큼만 앞으로 나아가듯이, 참배자는 오체투지 하는 한 번의 동작만큼만 앞으로 전진 할 수 있다.
오체투지는 전신운동이자 고행이요, 자기를 최저로 낮추는 겸손한 예절이자 비움의 행위다. 세상에 있는 예절 중에서 오체투지보다 더 심각한 고행예절은 없으리라. 고행자들은 말이 없다. 아니 말을 잊은 듯하다. 온몸이 부서져도 오체투지를 멈추지 않는다. 냇물이나 지형지물이 오체투지를 할 수 없으면 장소를 옮겨 그만큼 더 오체투지를 한 다음 지속한다. 누가 감시해서가 아니다. 지렁이가 땡볕에서도 머리를 처박고 미끈거리는 제 몸을 바짝바짝 말려가며 친견의 보행을 계속하듯이, 티벳의 수행자들도 그렇게 한다.
지독한 고독이 저들의 수행을 감싸고 있음을 감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왜 이 힘든 고행을 자처하는가? 저들의 대답은 말이 아니다. 그저 싱긋 웃는 웃음이 전부다. 때로는 말처럼 구차한 것도 없다. 몇 개월 걸려야 닿을 수 있는 포탈라 궁의 생불生佛을 친견하려면, 그리하여 깊은 불은을 입어 좋은 인연으로 환생하려면 지상의 고행-고독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달콤한 고통인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세계에 유한한 존재로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무한에로, 모든 존재에로 열려 있다. 이 말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수수께끼 같은 본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의 유한함 및 우연함에서 오는 체험적 진리다, 만일 인간에게 자신이 유한한 존재이며 이성은 무한에로 열려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기원과 운명에 대하여 물을 수가 없을 것이다. (김산춘 발타살의 신화적 미학-감각과 초월 82쪽에서)
지렁이가 자벌레가 되어 해수관음보살상을 친견하려 하는 것이나, 티베트의 참배객이 오체투지로 포탈라 궁을 향하여 고행하는 것이나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줄기찬 소행의 과정이다. 그래서 종교가 가능하며, 고독한 영혼에 울림을 주는 시詩가 가능하리라. 유한한 실존적 존재로서 무한을 넘보는 인간의 행위는 수수께끼의 세계다. 그러나 그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문을 시문학이 열어두고 있어 다행이다.
유한한 존재성을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지렁이처럼 땡볕에 몸을 태우고서라도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 비로소 ‘저렇게까지 해서…’라는 의문과 불가사의한 인간 이해의 뚜껑이 열리는 순간이다. 우주적 존재로서 인간은 단독자다. 아무도 나와 같을 수 없으며 어디에도 나와 같은 존재는 없다. 그런 절대 고독의 경지에 빠진 사람들만이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무한 세계를 끊임없이 넘보려 한다.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우면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것도 잊을 수 있을까? 고독은 힘이 세다.
길을 걷다가 문득
어머니 무릎이 그리울 때가 있다
풀벌레들이 귀이지개를 들고
켜켜이 쌓인 귓밥을 헐어내는 날이나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더 살고 싶은 날들
나뭇잎처럼 가볍다,
흔들린다
투정 부리는 아이처럼
가볍지 않은 행장을 부려두고
그냥 주저앉고 싶은 그늘
양지만 찾아다닌 운행이기보다는
찾아서 오솔길이며
녹음이 이끼처럼 더께 앉은 길만
길이라며
찾아서 오프로드를 달리기도 했다
길이 끝난 데서 길은 시작된다
몸의 형상기억은 언제나 음지에
나를 심었다
여름 논밭을 건너온 바람이
나를 더욱 깊게 초록무덤으로 묻어두자
내가 나무인지 나무가 나인지
그늘의 혈관을 타고 스멀스멀 잠의 키를 키우는
한낮!
장자의 나비가 나를 깨울 때까지
파란 가슴으로 계시는 어머니께서는
자랑하지 않아도 좋으실
아들의 시를
자분자분 바람결로 낭송하고 계셨다
문득!
-이동희 「느티나무 아래 눕다」 전문 시인정신 2012 가을호
외로운 이는 길을 나선다. 나그네는 외로움을 몸으로 버티는 자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는 항상 길에 머문다. 행운유수行雲流水, 정처 없이 떠도는 구름 같은 존재, 머물지 못하고 흘러가는 물 같은 존재가 나그네다. 나그네는 외롭다. 외로움은 필연적으로 그리움을 낳는다. 나그네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랴. 모두가 한 세상 떠도는 구름이요, 잠시 흘러가는 물이다. 그런 구름과 물이 닿는 첫 번째 여울목은 그리움의 원형인 어머니다.
하느님은 일일이 사람에게 임할 수 없어 ‘어머니’를 두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신성하다. 모성이야말로 신성에 가장 가까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 모성의 지극한 사랑을 미처 다 받아 누리지 못했거나, 일찍이 별리의 고통을 맛본 나그네에게 어머니의 결핍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에 익숙해지게 한다. 그렇게 고독이 전신을 흔들 때마다 나그네는 길을 나선다. 여정의 도처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일은 여정의 축복이다. 여정 중에 만나는 어머니는 결핍된 고독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모성을 실감하는 순간은 무시로 온다. 무더위가 극성인 한 여름 나그네가 닿는 느티나무 그늘은 그대로 어머니의 품안이다. 어머니의 무릎베개를 베고 시난고난 지난 시절을 떠올리기도 한다. 길이 아닌 길을 찾아 헤맨 아픔도 지나고 보면 뜻이었음을,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헤맬 때도 포기하지 않았음을, 결핍에 익숙한 몸의 세포들은 음지에서도 양지를 지향했음을, 그리고 길이 끝난 절망 앞에서도 새롭게 일어설 수 있었음을 말씀드린다.
그러노라면 먼 길을 돌아온 나그네의 노독과 어머니의 자상하신 미소 같은 산들바람이 불어 외로움을 잠재운다. 고독도 잠시 숨을 고르며 잠에 빠져든다. 실은 잠 속에서 만난 어머니에게 들려드린 말씀이 비몽사몽간에 잠의 키를 키워 한낮의 정적 속에 나를 풀어놓는다. 잠들자 비로소 고독에서 헤어나는 나그네는 이미 현실적 존재가 아니다. 느티나무가 된 시이거나, 시가 된 느티나무일 뿐이다. 외로움과 쓸쓸함 그 자체가 될 뿐이다.
몰아일체沒我一體의 상황이거나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에 빠진다. 고독한 주체를 잊고 모성적 사랑에 충만한 존재가 된다. 그럴 때 내가 꿈속의 나비인가, 아니면 꿈속의 나비가 나인가 즐겁게 헛갈린다.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비몽사몽간을 헤맬 때 잠시도 손길에서 놓지 않았던 내 시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느낌으로 눈을 뜨면 그만이다. 이미 꿈속의 모성은 자연성이 되어 무시로 나의 시혼을 일깨우고 있었던 셈이다. 내 빈약한 영혼의 쓸쓸함에 시를 낭송하듯 바람이 귓가에 간지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시는 삶을 소중하게 만드는 힘이다. 시를 위해 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 불이 필요하듯이,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밧줄이 필요하듯이, 배고픈 사람에게 주머니 속 빵이 소중하듯이 시도 그러하다. 정말 그렇다. (로저 하우스덴『언제나 내 앞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40쪽. 메리 올리버의 ‘시 입문’ 재인용)
외로움에 떠는 사람에게 화톳불 같은 것이 시의 불길이다. 고독에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는 몸이 시의 기둥이다. 쓸쓸함에 버거워하는 사람에게 자분자분 들려주는 위안의 말씀이 시다. 고독에 두려워 말자. 외로움에 도망가지 말자. 그 고독하고 외로울수록 더욱 정면으로 맞서 고독을 길들여야 한다.
원시인들이 외로움과 맞서 자연에서 살며, 자연을 통해서, 자연 그 자체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하여 유구한 세월의 저편까지 인류의 영역을 무한 확대하고 연장하여 삶의 지평을 넓혀두었듯이 현대인들도 고독과 맞서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대서 고대인들처럼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자연에 몸을 담을 수 없을 만큼 현대는 삭막해졌다. 그렇다면 자연을 대신해도 좋을 대체물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다. 시는 우리가 버린 자연의 본 모습을 되찾으려 하고, 우리가 외면한 자연 그 자체에 몸담게 하는 힘이 있다. 육체적으로 조금은 배가 고파야 창조의 물꼬가 터지고, 정신적으로 조금은 외로워야 창작의 원기가 살아나며, 마음으로 조금은 쓸쓸한 편에 들어야 비로소 절대적 고독의 자아를 마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독은 불행의 씨앗, 악성 바이러스가 아니라 불가사의한 인간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해답이 될 수 있다.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고독한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고독한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은 고상한 이상을 세속의 머리에 넣고, 즉물적 욕망의 발을 물신에 담근 채 ‘나는 평균적으로 매우 행복하다’고 주술을 거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외로움이 주는 역동의 힘을 누리는 사람은 고독한 영혼의 진혼곡을 들으며 죽을 것 같은 고통마저도 즐겁게 음미하며 진혼곡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현대의 시인들은 암각화를 새기는 조각가요, 무덤의 벽에 그림을 그리는 화공이며, 고인돌을 축조하는 석공들인 셈이다.
고독한 영혼을 달래주는 진혼곡을 듣듯이 시를 듣는다.
-시인정신 2012년 겨울호
이동희(李東熙) :1985년 [심상] 신인상. 전북문인협회장 역임. 시집 『벤자민은 클래식을 좋아해』 외 다수. 저서 『문학의 즐거움 삶의 슬기로움』 외 다수. <전북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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